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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5>후고려기(後高麗記)(28) - 광인"에서 이사도 관련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이사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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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5>후고려기(後高麗記)(28) - 광인"에서 이사도 관련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이사도 (3)
정기왕이 처음 평로치청을 독립번진으로 만든 이래, 제의 여러 왕들은 서주를 되찾기 위해서 부단히 애를 썼던 듯 하다. 정기왕부터 납왕, 사고왕, 그리고 사도왕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들은 꼭 서주를 차지하려고 그곳을 찔러보곤 했다. 납왕의 종숙부였던 자사 이유가 다스리던 서주를 들어 항복한 이래(보력 8년-서기 781) 납왕이 팽성을 치고, 사고왕이 또 서주를 수복하려다 덕종의 권유를 받고 포기, 그리고 또 사도왕이 서주를 노리기까지. 그렇게 잠시 서주를 수복했지만 곧 빼앗겼다. 그렇게 본다면 정기왕부터 사도왕까지 4대에 걸치는 고려 이씨조 제의 지상과제는 잃어버린 땅을 되찾는 것에 있었다고 하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라 본다. 서주 수복.
그렇게 보면 옛 왕조는 유독 '빼앗긴 땅'에 대한 집착이 많았다. 온달이나 연개소문도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는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전쟁을 벌였고, 당 태종도 요동이 원래 한무제 사군의 땅이라며 되찾겠다는 명분을 세웠고(사실 그건 억지에 가까웠다만), 훗날 고려 태조 왕건도 옛 고려 땅을 되찾겠다며 북진정책을 펼쳤다. 흉노족들도 그랬지만
'땅은 나라의 근본'이라는 옛 말에 충실했던 것일까. 그것보다는 '고토 수복'이라는 민족적 염원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해 먹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한다.
고토 수복을 외치던 시대의 왕들은 이상하게 왕권의 지지기반이 약하거나 부당한 방법으로 정권을 탈취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사도왕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조부 정기왕이 다스렸던 옛 땅인 서주를 되찾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원래 우리에게 할당된 몫을 다시 되찾자는 이 '거국적' 염원을 이용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해먹는 것. 하지만 이것도 되짚어보면 단순히 꿈만 같은 이야기를 가지고 사람들을 선동하면서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기치를 내세우며 사람들을 모으려고 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고토수복'을 외치는 여론이 정계뿐 아니라 정계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조성이 되어 있었다고 하는 해석도 가능하긴 하다.
[十年十二月, 武寧軍節度使李願遣將王智興擊破師道之眾九千, 斬首二千余級. 獲牛馬四千, 遂至平陰.]
10년(815) 12월, 무령군절도사(武寧軍節度使) 이원(李願)이 장수 왕지흥(王智興)을 보내어 사도의 무리 9천을 격파하고 2천여 급을 참수하였다. 얻은 소와 말이 4천이라 드디어 평음(平陰)에 이르렀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구당서》헌종본기 12월조에 "갑진에 이원이 이사도의 무리 9천을 쳐서 패배시키고 2천 급을 목베었다[甲辰, 李願擊敗李師道之衆九千, 斬首二千級]."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왕지흥은 그 누구냐. 예전에 사도왕의 아버지 납왕이 서주를 토벌할 때 자사 이유 휘하에 있었던, 서주에서 직선거리 8백 km나 되는 창안까지 네닷새 만에 달려가 당조에 구원을 요청했던 바로 그 자다. 이유가 죽은 뒤 서주자사직을 이어받았는데, 807년에는 조정의 도첩(승려허가증)을 제멋대로 팔아 재산을 모았던 탐욕스런 위인이다.
[丁酉, 武寧節度使李願奏敗李師道之眾. 時師道數遣兵攻徐州, 敗蕭ㆍ沛數縣, 願悉以步騎委都押牙溫人王智興, 擊破之. 十二月甲辰,智興又破師道之眾, 斬首二千餘級, 逐北至平陰而還. 願, 晟之子也.]
정유에 무령절도사(武寧節度使) 이원(李願)이 이사도의 무리를 이겼다고 아뢰었다. 이때 사도는 여러 번 병사를 보내어 서주를 쳤으나 숙(蕭)ㆍ패(沛)의 여러 현에서 패했다. 원(願)은 모든 보기(步騎)와 위도압아온인(委都押牙溫人) 왕지흥에게 쳐서 깨뜨리게 했다. 12월 갑진에 지흥이 다시 사도의 무리를 깨뜨리고 목벤 것이 2천여 급. 마침내 북쪽으로 평음(平陰)에 이르러 돌아왔다. 원은 성(晟)의 아들이다.
《자치통감》권제239, 당기(唐紀)55,
헌종소문장무대지지신효황제(憲宗昭文章武大至至神孝皇帝) 중지상(中之上) 원화 10년(815) 12월
정확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815년 이전에도 서주를 공격해 차지했다가 당조의 반격을 받고 도로 빼앗긴 일이 있긴 했다.(그때도 왕지흥이 자사로 있었다.) 12월 갑진에 사도왕의 장군 왕조안이 서주의 패현을 공격했지만 이마저도 왕지흥의 반격으로 실패, 운주에서 불과 10여 리에 불과한 평음까지 밀려날 정도로 제의 군사들은 큰 심리적 영향을 받았다. 이후 1년 가깝게 당조와 제 사이에는 군사적 소강상태가 지속된다. 사실 당조로서도 제를 정벌할 만한 힘은 없었거든.
재미있는 건 무령군은 신라의 해상왕이었던 장보고가 속해 있던 번진이라는 것. 낮은 신분으로 신라 안에서 출세할 길이 없었던 장보고가 친구 정연과 함께 당으로 건너가 당군에 지원한 것으로 말타고 창 쓰는 것이 군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바람에 무령군에서 소장(小將) 벼슬까지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 《삼국사》의 설명이다. 하지만 《자치통감》의 설명을 보면 이것은 헌종의 명령이 아니라 사도왕과 이원 사이에 서주를 놓고 벌어진 분쟁의 하나에 불과했던 듯. 헌종이 다른 절도사들에게 사도왕과 제에 대한 총공세를 감행하는 818년의 일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11년(816) 2월 계묘에 발해의 사신에게 금채(錦綵)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경술에 발해의 사신 고숙만(高宿滿) 등 20인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또 국신(國信)을 하사하여 돌려보냈다.
《책부원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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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一年十一月, 加師道司空, 仍遣給事中柳公綽往宣慰, 且觀所為, 欲寬容之. 師道茍以遜順為辭, 長惡不悛.]
11년(816) 11월 사도에게 사공(司空)을 더해주고 급사중(給事中) 유공작(柳公綽)을 보내어 위무하는 한편 그들의 하는 짓을 감시하면서 용서해주고자 했다. 사도는 한때나마 겸허히 따랐지만 오래도록 악을 저지르며 회개할 마음이 없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오래도록 악을 저지르며 뉘우칠 줄 몰랐다." 실제로 사도 관직을 받은 그 해(816) 12월에, 사도왕은 미앙궁(未央宮)과 비룡초장에까지 불을 질러버렸다. 그런 한편 운주에 궁궐을 세웠는데, 본격적으로 당조에 대항할 새로운 정부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하겠다. 《구당서》오행지에 나오는 얘기다.
12년(817) 2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책부원귀》
태세 정유. 그러니까 희왕 주작 5년에 해당하는 원화 12년, 《구당서》는 2월 임신에 이르러 헌종이 "내고에서 견과 포 69만 필과 5천 냥의 은을 내어 군비로 조달하고[以內庫絹布六十九萬段匹、銀五千兩, 付度支供軍]", 경자에 "경성에 사는 주민들에게 간신수색을 위해 5호씩 서로 보증시키게 했다 [敕京城居人五家相保, 以搜姦慝]"고 적었다. 오가작통법이라는 '연좌제' 법령인데 승상이 살해되고 배도가 습격받는 위기 앞에서 당조가 창안에 내린 '계엄령' 같은 것이었다. 여기서도 "이때 왕승종과 이사도가 용병의 세력을 믿고 사람을 시켜 능묘의 창을 꺾고 쌓여있는 문적을 불태우며 화살에 편지를 묶어 날려보내니 온나라가 공포에 떨었다. 미리 교란을 막기 위해 수색한 것이다[時王承宗、李師道欲阻用兵之勢, 遣人折陵廟之戟, 焚芻槁之積, 流矢飛書, 恐駭京國, 故搜索以防姦.]."라고 설명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도 결국 사도왕의 작전에 방해가 되지는 못했다. 사도왕의 제가 멸망하고 나서 운주에 보관되어 있던 기록보관실을 조사하다가 밝혀진 사실이지만 포(蒲)ㆍ동(潼)의 관리들에게 사도왕이 상을 준 일이 있었다. 왜 상을 줬는지야 안 봐도 뻔하지. 사도왕의 밀정이 마음대로 관문을 드나들도록 관료들까지 뒤를 봐주고 있었다는 얘기. 말 그대로 "수색만으로 충분한 예방을 할 수 없었다[搜索不足以爲防]."
3월 갑술에 발해의 사신 대성신(大誠愼) 등에게 금채(錦綵)를 하사하였다.
《책부원귀》
한편 오원제는 10월 기묘에 붙잡혀 11월 병술 초하루에 독류수 밑에서 처형되었다. 《구당서》를 보면 오원제는 창안으로 압송되어 이 날 흥안문(興安門) 앞에서 헌종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 앞에 무릎꿇려진 채 문죄를 받고, 창안의 동ㆍ서 양시(兩市)에서 백성들이 던지는 돌과 오물을 맞으면서 온갖 수모를 당한 뒤 독류수(獨柳樹) 밑에서 처형당했다. 아내 심씨는 액정의 노비가 되고, 오원제의 두 아우와 세 아들은 유배당한 뒤 처형. 회서절도의 판관 유협 등 일곱 명도 모두 처형당했다.
이것은 사도왕 혼자만이 아니라 지금까지 60년에 걸쳐 이 평로치청, 제라는 나라를 지탱해왔던 고려 이씨 일족의 몰락을 예고한 신호탄이나 다름없었다. 당조에 대한 번진들의 저항의지는 오원제 토벌을 기점으로 꺾여버렸고 이후 당조에 항복하는 번진들이 속속 출현하게 된다.
[及誅吳元濟, 師道恐懼, 上表乞聽朝旨, 請割三州並遣長子入侍宿衛, 詔許之.]
오원제가 토벌당하자 사도는 두려워하며 표문을 올려 조정의 뜻에 따를 것을 청하고, 3주를 떼어 바치면서 맏아들을 입시시켜 숙위하고자 한다 하였다. 조를 내려 이것을 허락하였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맏아들 홍방을 창안에 인질로 보낸다는 것은 제 내부의 친당파 관료였던 이공도와 이영담의 제안에 따른 것인데, 성덕절도사 왕승종까지 2개 주를 당조에 떼어바치며 머리 숙이는 것을 보고 확실히 위기가 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얼마 안 가서 번복된다.
[師道識暗, 政事皆決於群婢. 婢有號蒲大姊ㆍ袁七娘者, 為謀主, 乃言曰 "自先司徒以來, 有此十二州, 奈何一日無苦而割之耶? 今境內兵士數十萬人. 不獻三州, 不過發兵相加,可以力戰,戰不勝,乃議割地,未晚也" 師道從之而止, 表言軍情不葉.]
사도가 어리석어 정사는 대개 여러 계집종들이 결정했다. 계집종으로 포대자(蒲大姊)와 원칠랑(袁七娘)이라는 자들이 있어 그들이 주동하여 말하였다. “선대 사도(司徒, 이정기) 이래로 12주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아무 고통도 없이 그들에게 땅을 떼어준단 말입니까? 지금 경내에 병사가 수십만 인입니다. 3주를 떼어주지 않으면 군사를 내어 공격해올 수밖에 없을 겁니다. 힘써 싸우다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면 그때 땅을 떼어줄 것을 의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사도는 그 말을 따라 그만두면서 표문을 올려 군사들의 마음을 돌리기 어렵다 하였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이에 여러 군에 조하여 토벌하게 했다[乃詔諸軍討伐]." 《구당서》이사도열전 바로 뒤에 이어지는 다음 내용이다. 사실 《구당서》의 말도 억지스러운게 포대자나 원칠랑 같은 두 여자가 사도왕에게 항복해서는 안된다고 했다는 것, 그리고 그걸 사도왕이 따랐다는 것을 비판한 것은 유교적인 '남존여비', 즉 '여자가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봉건사상의 발로였지만, 단순히 남자가 '체신머리없이(?)' 여자 말만 듣고 나라의 명운을 결정했다는 비판을 차치하고 본다면 '이렇게 쉽게 항복하면 안된다'고 말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실제로 이들의 말마따나, 15개 주를 차지한 사도왕의 제가 수십만의 군사를 가지고 있었을 리는 없겠지만, 체주나 덕주, 서주를 빼고 천보 연간(742∼756)의 12주의 인구가 4백만 명을 헤아렸다는 기록이 있다. 1/10이 아니라 1/20만 뽑아도 20만 명은 충분히 유지할 수 있는 것. 더구나 3주는 앞서 말했던 당조의 최대 소금생산지 가운데 하나. 쉽게 주기는 사도왕이나 제로서는 아까운 점이 많은 땅이다.
결국 사도왕은 3주를 떼어주는 것도 맏아들을 인질로 창안에 보내는 것도 모두 중지하고, 당조에 맞서 끝까지 싸울 것을 천명하면서 휘하의 친당파를 제거했다. 판관이었던 이공도는 종사 가직언의 간언으로 죽음을 면했지만, 이영담은 내주로 쫓겨나 끝내 죽었다. 가직언 역시 투옥당한다. 하지만 좌산기상시 이손을 사신으로 보내 약속을 번복한 이유를 묻기만 하고 당조는 별다른 군사적 행동을 보이진 않았다. 기록에야 '여러 군에 조서를 내려 토벌하게 했다'는 말 뒤에 무령군절도사 이원의 활약상이 나오긴 하지만 이건 오원제가 토벌당하기 전의 일이고, 항복의사를 번복한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다. (무슨 이유로 원화 12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신ㆍ구《당서》나 《자치통감》모두 원화 10년에 일어났다고 적고 있는 걸 12년에 일어났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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