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85628891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7>후고려기(後高麗記)(30) - 광인" 내용이 모두 이사도 내용이라 제목을 바꿨습니다.
이사도 (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7>후고려기(後高麗記)(30) - 광인" 내용이 모두 이사도 내용이라 제목을 바꿨습니다.
이사도 (5)
2010/05/07 07:06
[十四年春正月庚辰朔, 以東師宿野, 不受朝賀.]
14년(819) 봄 정월 경진 초하루에 동쪽으로 출정한 군사들이[東師] 숙야(宿野)를 함으로 조하(朝賀)를 받지 않았다.
《구당서》헌종본기
당 헌종 원화 14년(819)의 정월 경신 초하루는 천자가 신하들로부터 받는 조하의식이 거행되지 않았다. 동쪽으로 나간 군사들이 숙영하고 있는데 마음 편하게 조하나 받을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정벌을 위하여 동쪽으로 나간 군사, 치청행영(淄靑行營)의 군사들은 모두 한 곳, 고려 이씨가 다스리는 평로치청 제를 노리고 있었다.
[丁亥徐州軍破賊二萬於金鄕.]
정해(8일)에 서주군(徐州軍)이 적 2만을 금향(金鄕)에서 깨뜨렸다.
《구당서》헌종본기, 원화 14년(819) 정월
금향이 무령절도병마사 이우에게 넘어갔을 때, 제의 신하들은 그걸 사도왕에게 아뢰는 말도 쉽게 꺼내기 힘들었다. 번진들의 공격으로 자신이 수세에 몰리게 되자 성격이 변해서 걸핏하면 불안해하고 신하들에게도 툭하면 화를 잘 냈다는 것이다.
이때를 전후해, 진허절도사(陳許節度使) 이광안(李光顏)은 복양현(濮陽縣)에서 사도왕의 군사들과 맞닥뜨린다. 복양은 예전 납왕이 당군에 포위되어 항복을 청했던, 제로서는 치욕적인 기억의 현장. 활주나 조주와도 인접한 복주 최동단의 요새가 함락되면서, 이광안은 두문성(鬥門城)ㆍ두장책(杜莊柵)까지 장악했다. 전홍정도 운주에서 10km 거리까지 진격해 군영을 설치하고 제의 서북쪽을 공략하면서, 북쪽에서부터 운주를 공격했지만 실패한다.
[田弘正, 復於故東阿縣界, 破賊五萬, 諸軍四合, 累下城柵.]
전홍정이 다시 옛 동아현 경계에서 적 5만을 깨뜨리고 여러 군이 4면에서 연합하여 여러 성책을 점령하였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구당서》열전의 이 기록은 《구당서》본기에서 "병신(17일)에 위박군(魏博軍)이 적 5만을 동아(東阿)에서 깨뜨렸다[丙申, 魏博軍破賊五萬於東阿]."고 한 것과 맞는 기록이다. 이때 사도왕은 양곡(陽谷)에 주둔하고 있던 치청도지병마사 유오를 시켜 5만 군사로 전홍정에 맞서게 했지만, 전홍정은 이들을 '간단하게' 격파했다.
[辛丑, 斬前滄州刺史李宗奭於獨柳樹. 朝廷初除鄭權滄州, 宗奭拒詔不受代, 既而爲三軍所逐, 乃入朝, 故誅之. 癸卯夜, 月近南斗魁. 丙午, 魏博軍破賊萬人於陽穀.]
신축(22일)에 전(前) 창주자사(滄州刺史) 이종석(李宗奭)을 독류수(獨柳樹)에서 처형했다. 조정이 처음 정권(鄭權)을 창주(滄州)에서 내쫓았을 때 종석이 조를 거절하고 대신하려 하지 않았기에 드디어 삼군(三軍)이 쫓겨난 바, 입조하기에 이르러 죽였다. 계묘(24일)의 밤에 달이 가까이 남두괴(南斗魁)로 갔다. 병오에 위박군이 적 1만 인을 양곡(陽穀)에서 깨뜨렸다.
《구당서》헌종본기, 원화 14년(819) 정월
정권은 일찌기 창주절도사로서 제의 군사 5백 명을 제주 복성현에서 격퇴한 인물. 그런 그가 창주절도사에서 뜬금없이 '좌천'이라니 어이가 없다. 《구당서》열전에도 나오질 않는다. 《자치통감》에 보면 두 사람의 사이가 '불엽(不葉)'이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서로 좋은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다. 두 사람이 서로 삐걱대다가 결국 정권이 헌종에 의해 쫓겨나고 이종석이 대신 횡해절도사가 되었는데, 이종석은 그 자리에 부임하는 것을 거부했다. '난이 두려워 주를 떠날 수 없다[懼亂未敢離州]'는 게 이유였던 것 같다. 결국 조정은 오중윤(烏重胤)에게 횡해절도사를 시키고 이종석은 내쫓았다. 그리고 경사로 도망쳤다가 처형당한다.
다섯 번진의 절도사가 총공세를 펼쳐오는 데에는 제아무리 사도왕이라도 별수가 없었다. 사도왕은 자신이 다스리던 제의 성과 책을 하나하나 빼앗겨갔다.
[乙卯, 敕淄靑行營諸軍, 所至收下城邑, 不得妄行傷殺, 及焚燒廬舍, 掠奪民財, 開發墳墓, 宜嚴加止絕.]
을묘(7일)에 치청행영제군(淄靑行營諸軍)에 칙하여 차지한 성읍(城邑)에 이르거든 함부로 상살(傷殺)을 저지르지 말고 여사(廬舍)에 불을 지르지 말 것과,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지 말고, 무덤을 훼손하고 파헤치는 일은 마땅히 엄하게 다스리라 하였다. 이에 법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구당서》헌종본기, 원화 14년(819) 2월
어느 나라든지, 죄를 수장에게만 묻고 나머지 부하들은 목숨을 살려준다는 방식으로 적진 진영을 흐트러놓는 것은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수단이었다. 평로치청 안에도 전쟁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이고, 또 이 전쟁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을 거다. 그들이 전쟁을 싫어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기가 죽기 싫어서'였다. "나라를 위해서 하나뿐인 목숨을 바치는 것이 그렇게 싫습니까?" 이건 국가가 국민에게 행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폭력이고 피지배층에 대한 압제의 가장 노골적인 수단으로 쓰이기도 한다. 인간으로서, 아니 모든 생명 가진 존재로서 살기를 바라고 죽기를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병사로 차출되어 전쟁에 나아간다. 전쟁에서 이기면 자신과 자신의 식구들에게 돌아올 보상을 노리고, 그리고 전쟁에 나가더라도 자신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도 포함된다.
군사들의 위아래를 갈라놓으면 이긴다는 말을 《손자병법》에서 본 적이 있다. 병사들은 대부분 '어쩔수 없이' 전쟁에 나아가지만, 한편으로는 자기가 이 '어쩔수 없는' 전쟁에서 이길 지도 모른다, 영웅이 될지도 모른다,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쟁에 임한다. 사지에 몰아넣으면(개미 새끼 하나 도망갈 수 없는 철통같은 진으로 에워싼 적군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고 생각해보자) 더 독해져서 죽기살기로 싸운다는 말이 이런 것이다. 전쟁에 이기든 영웅이 되든 다 필요없고 일단은 살고 보자는 식으로 싸우니까. 싸우는 입장에서는 누구든지 자신들의 본심을 숨기니까 아군 입장에선 적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 그저 '적군은 나쁘다'고만 배우니 막연히 그들을 보기만 해도 '날 죽이러 온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작 저들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반사적으로 보호본능이 발동하게 되면 적군이 무슨 의도로 다가오든 아군쪽에서는 적군에게 총을 쏠 수 있다.
하지만 적군 쪽에서 '너희를 죽이지는 않는다'라고 아군 쪽에 말하고 그걸 또 어필을 시켜버리면 동요한다. 죽일 생각이 없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하는 마음으로 도박을 던지는 것이다. 자신들에게 적군을 죽이라고 말하는 아군 지휘관을 배신하는 것도 그 도박의 한 방법이다.
[數令促戰, 師未進. 乃使奴召悟計事. 悟知其來殺己, 乃稱病不出, 召將吏謀曰 "魏博兵強, 乘勝出戰, 必敗吾師, 不出則死. 今天子所誅, 司空一人而已. 悟與公等皆被驅逐就死地, 何如轉禍爲福, 殺其來使, 以兵趣鄆州, 立大功以求富貴?" 衆皆曰 "善." 乃迎其使而斬之, 遂賚師道追牒, 以兵趣鄆州. 及夜, 至門. 示以師道追牒, 乃得入. 兵士繼進, 至球場, 因圍其內城, 以火攻之, 擒師道而斬其首, 送於魏博軍. 元和十四年二月也.]
수차례 영을 내려 싸움을 독촉했지만 군사들은 나가지 않았다. 이에 노비를 시켜 오를 불러 이 일을 상의하려 했다. 오는 자신을 죽이려 온 것을 알고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으면서 장리(將吏)를 불러 모의하였다. “위박의 군사는 강하고 승세를 몰아 출전하였으니 우리는 반드시 패할 것이고 나가지 않아도 죽을 것이다. 지금 천자가 죽이려는 것은 사공(司空) 한 사람 뿐이다. 나나 공들 모두 싸움터로 쫓겨와 사지(死地)에 빠졌으니 전화위복을 위해서 그 사신을 죽이고, 병사들을 거느리고 운주로 쳐들어가서 큰 공을 세워 부귀를 누림이 어떠냐?” “좋습니다.” 이에 그 사신을 맞아들여 죽인 뒤 마침내 사도의 공문에 대한 추첩(追牒)을 갖고 군사들과 함께 운주로 갔다. 밤이 되어서야 성문에 이르렀다. 사도에게 보내는 추첩(追牒)을 보이며 들이게 했다. 병사들이 잇달아 진격하여 구장(球場)에 이르러서 그 내성을 포위하여 불을 지르고, 사도를 붙잡아 목을 베어 위박군으로 보냈다. 원화 14년(819) 2월의 일이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고려 이씨 일문이 당조를 상대로 4대에 걸쳐 벌인 대담하고도 치열했던 이 전쟁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엉뚱한 이유로 전세가 뒤집히면서 결국 고려 이씨 일문과 제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치청절도도지병마사 겸 감찰어사였던 유오는 원래 옛 평로절도사 유정신의 손자로서 아들 유종간 덕분에 출세한 자인데, 당조에 상주하는 일을 보좌하던 문하별주(門下別奏)였던 아들에게서 당조의 제의 옛 땅과 그 백성들에 대한 처분 문제를 듣고서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다. 실제로 위박군에게 한 번 패한 뒤에는 전쟁에 나가기를 꺼려하던 겁 많은 남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전쟁 속에서 자신의 주군을 배신하는 길을 택했다. 《자치통감》은 유오가 성으로 들어와 성안을 약탈하던 그 날의 일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使士卒皆飽食執兵, 夜半聽鼓三聲絕即行. 人銜枚, 馬縛口, 遇行人, 執留之. 人無知者. 距城數里, 天未明, 悟駐軍, 使聽城上柝聲絕, 使十人前行, 宣言 "劉都頭奉帖追入城." 門者請俟寫簡白使, 十人拔刃擬之, 皆竄匿. 悟引大軍繼至, 城中噪嘩動地. 比至, 子城已洞開, 惟牙城拒守, 尋縱火, 斧其門而入, 牙中兵不過數百, 始猶有發弓矢者, 俄知力不支, 皆投於地. 悟勒兵升聽事, 使捕索師道. 師道與二子伏廁床下, 索得之.]
군사들을 모아 밤중에 북이 세 번 울리는 소리가 끊어진 뒤에 곧 나아갔다. 사람들은 떠들지 못하게 하고[銜枚] 말은 입을 묶었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잡아 가두었다.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성에서 수리 떨어진 곳에서 하늘이 아직 밝지 않았는데 오는 군사를 주둔시킨 뒤, 성 위에 기성(柝聲)이 끊어졌는지 듣게 하고 사신 10인이 앞으로 나아가서 선언하였다. “유(劉) 도두(都頭)가 첩(帖)을 받들고 성안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문지기[門者]가 사간(寫簡)을 사신에게 고할 것을 기다리라 청하자 열 사람이 칼을 빼어 겨누었다. 모두 달아나 숨었다[竄匿]. 오는 대군을 끌어다 그 뒤를 따르게 하고 성안이 떠들썩하여 땅이 울렸다. 이때에 자성(子城)은 이미 훤히 열렸고 아성(牙城)은 막아 지키려 하였는데 거듭 불을 지르고[縱火] 도끼로 그 문을 찍어 부수고 들어갔다. 아중(牙中)의 병사들은 불과 수백을 넘지 않았다. 처음에는 활을 당겨 싸웠으나 힘이 다하여 지탱할 수 없음을 알고 모두 땅에 엎드렸다. 오는 병사들을 억지로 청사(聽事)에 올려 보내 사도를 찾아 잡게 했다. 사도의 두 아들은 측상(廁床) 밑에 엎드려 있다가 잡혔다.
《자치통감》권제241, 당기(唐紀)제57,
헌종소문장무대성지신효황제(憲宗昭文章武大聖至神孝皇帝) 하(下), 원화 14년 기해(819) 2월
사도왕이 패전을 거듭하던 부하들에게 마구 화를 내고 채근한 것도 유오의 불안을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전쟁에 패한 자신을 사도왕이 그냥 두지 않을 것은 불보듯 뻔한 일. 어쩌면 반란은 사도왕의 사신이 도착하기 전부터 그의 머릿속에 계획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반란을 일으키려 할 때 그는 자신의 계획에 반대하는 별장 조수극 등 서른 명을 죽였고, 운주성에 먼저 들어가는 병사에게는 1백 민(緡)의 상금과 함께 성내를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었다.(《자치통감》에 나오는 이야기다)
다만 사도왕 본인은 유오를 죽일 생각이 없었음은, 유오가 답신을 갖고 운주성에 왔을 때 제의 군사들이 그를 별 의심없이 성안으로 들였다는 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유오를 경계했다면 성 안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 아닌가.
[師道晨起聞之, 白其嫂裴曰 "悟兵反. 將求為民, 守墳墓." 即與弘方匿混間. 兵就禽之, 師道請見悟, 不許. 復請送京師, 悟使謂曰 "司空今為囚, 何面目見天子?" 猶俯仰祈哀, 弘方曰 "不若速死!" 乃並斬之, 傳首京師.]
사도가 아침에 일어나 소식을 듣고 형수 배씨에게 말하였다. "오(悟)의 병사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백성을 구하고 조상의 무덤을 지켜야 합니다." 곧 홍방과 함께 측간에 숨었다. 병사가 들이닥쳐 이들을 사로잡았다. 사도가 오를 보게 해달라 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다시 경사로 보내달라고 청하자 오의 사자가 말하였다. "사공께서는 지금 죄수의 몸인데 무슨 낯으로 천자를 뵌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간절히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홍방이 나섰다.
"그러지 않으려면 빨리 죽여라!" 이에 이들의 목을 베고 그 머리를 경사로 보냈다.
《신당서》권제213, 열전제138, 번진열전 치청ㆍ횡해
제가 멸망할 징조는 사도왕이 죽음을 맞이하던 그 달에 이미 드러났던 것 같다. 《신당서》오행지에는 원화 14년(819) 2월에 길이 한 자가 넘는 물고기가 대낮에 갑자기 운주에 떨어졌는데 물도 없이 팔딱거리다가 곧 죽었고, 또 운주종사원의 문 앞에 한 자 깊이의 몹시 짙고 붉은 피가 고여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게 어디서 흘러온 것인지를 몰라 하늘에서 떨어진 줄로만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물고기가 땅에 떨어진 것은 사도왕의 멸망을 알리는 전조였다고 기록에 덧붙여져 있지만, 정작 운주종사원 문 앞에 고여있던 그 수북한 피는 실지 인간의 피, 고려 이씨 일족의 나라가 얼마나 참혹하게 멸망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했다. 10만 명에 가까운 제의 군사들은 유오의 반란군에 맞서, 그리고 성이 함락된 뒤 전홍정의 부하장수 사헌성의 군사들과도 맞서 싸우다가 그들의 주군만큼이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때가 음력 2월 초라 땅은 얼어붙어 피가 스며들지도 못하고, 더구나 지형적으로 낮은 곳에 있어 쉽게 물에 잠기는 곳이 운주라는 곳이다. 물은 조금이라도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속성이 있다.
부하의 배신 앞에서 사도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신ㆍ구《당서》나 《자치통감》을 지은 저자들은 '감히' 당조에 거역한 사도왕을 어떻게든 형편없고 용렬하고 무능한 자로 깎아내리려 했지만, (군사들이 쳐들어왔을 때에 뒷간에 숨어있다가 붙들린) "백성을 구하고 조상의 무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사도왕의 모습은 끝내 지워버리지 못했다. 사도왕의 아들 홍방 역시 포로가 된 상황에서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최후를 맞았으니, 이 또한 인정해주지 않을 수 없다.(《자치통감》에는 사도왕이 뒷간에 숨었다는 식의 말은 나와있지 않다.) 정확히 2월 9일이 바로 사도왕의 기일이자 제가 몰락한 그 날이다.
[是月, 弘正獻於京師, 天子命左右軍如受馘儀. 先獻於太廟效社, 憲宗禦興安門受之, 百僚稱賀.]
이 달에 홍정(弘正)이 경사에 바치니 천자는 좌우 군(軍)에게 명하여 괵의(馘儀)를 행하였다. 먼저 태묘(太廟)와 교사(效社)에 바친 뒤 헌종이 흥안문(興安門)에서 그것을 받으니 백료들이 하례하였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구당서》본기에는 2월 임술에 전홍정을 통해 사도왕이 죽었음이 보고되었고 헌종과 신하들은 선정전에서 잔치를 열고 축하인사를 주고받았다. 12개 주를 다스리며 당조를 벌벌 떨게 했던 고려 이씨 일족의 제가 4대 55년이라는 역사를 끝으로 몰락한 것이다. 기사에 이르러 흥안문(창안 동궁 북문)에서는 전홍정이 잡아온 제의 포로들과 사도왕 부자의 목을 바치는 의식인 괵의가 거행되었는데, 재미있는 건 이게 전쟁에서 적군 수괴의 머리를 베어왔을 때 그걸 아군 수장에게 바치고 수장이 그걸 받는 의식이란다.(하여튼 별게 다 의식이야) 흥안문 앞에서 괵의가 거행되기 전에, 우선 사도왕의 목은 태묘와 교사에 바쳐졌는데, 당조 천자들의 위패를 모신 '종묘'인 태묘와 천지의 신께 제사지내는 교사에까지 알리는 폼은 꼭 작은 일 하나 해낸 걸 쪼르르 달려가서 '나 잘했지?'하고 펄쩍펄쩍 뛰고 자랑하는 어린애 같다.(내 눈에는 그러하다.)
사도왕과 함께 당조에 저항을 꾀했던 성덕군의 왕승종은 사도왕의 참수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죽은 한편, 자신의 나라를 배신하고 당조에 붙었던 치청도지병마사 유오는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尚書)ㆍ골주자사(滑州刺史)ㆍ의성군절도사(義成軍節度使)에 팽성군왕(彭城郡王) 식읍 3천호(戶)의 봉호와 전(錢) 2만 관, 저택까지 한 채 떡하니 하사받고, 전홍정은 검교사도(檢校司徒)ㆍ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라는 벼슬이 더해졌다. 여담인데 《자치통감》에는 유오가 난을 일으키면서 전홍정에게 사신을 보내서 운주 진입이 "성공하면 흰색 연기를 피워서 신호를 보내기로[事成, 當擧烽相白]"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패하면 전홍정에게 병사를 이끌고 도와달라고까지 하면서, "공은 모두 내가 아닌 당신 것"이라 말하는 유오의 모습은 비굴하다 못해서 짜증이 나려고 한다. 이런 인간을 알아보지 못한 사도왕에게도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는 비난은 불가피할 것이다.
《구당서》에는 안 나와있지만 《신당서》에는 또 이런 이야기도 실어놓고 있다. 목을 잃은 사도왕 부자의 시신은 운주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버려져 있었는데, 다른 역적들의 시신이 그러하듯 후환을 두려워한 사람들은 그 누구도 목 없는 시신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자칫 잘못하면 똑같이 역당으로 몰려 죽을 수도 있었다. 그 시신을 염한 것은 운주의 선비로 영수(英秀)라는 자였는데, 시신들을 염해서 운주성 왼편에 놓은 것을 3월 3일에 운복조등주관찰등사로 이곳에 부임해온 마총이 사대부의 예로 다시 장례를 지낼 때까지, 한 달 동안 사도왕의 시신은 땅에 묻히지도 못하고 운주성 한 켠에서 썩어가야 했다. 그나마 그때 마총이 장사지냈다는 그 무덤도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반역자로 몰려 죽은 사람의 무덤을 누가 돌봐줄까.
[師道妻魏氏及小男並配掖庭. 堂弟師賢ㆍ師智配流春州, 侄弘巽配流雷州. 詔分其十二州爲三節度, 俾馬總ㆍ薛平ㆍ王遂分鎭焉. 仍命宰臣崔群撰碑以紀其績.]
사도의 아내 위(魏)씨와 어린 아들은 액정에 배정(掖庭)하고, 당제 사현(師賢)과 사지(師智)는 춘주(春州), 조카 홍손(弘巽)은 뇌주(雷州)로 유배했다. 그 12주를 3개 절도로 나누고 마총(馬總)과 설평(薛平), 왕수(王遂)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이에 재신(宰臣) 최군(崔群)에게 명하여 비석을 세워 그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춘주는 지금의 광둥(廣東)성, 뇌주는 그 광둥성의 최남단. 이곳으로 사도왕의 식구들을 흩어놓고, 제의 12주는 3개 절도로 나누었다. 운주ㆍ복주ㆍ조주의 3주는 화주자사 마총이, 치주ㆍ청주ㆍ제주ㆍ등주ㆍ내주의 5주는 의성군절도사 설평이, 나머지 기주ㆍ해주ㆍ연주ㆍ밀주의 4주는 왕수에게 돌아갔다. 여기서 설평은 예전 고려와 당이 맞섰을 때 당군의 장수로 활약했던 설인귀의 후손인데, 새로 평로절도사로 임명된 그에게 압신라발해양번사, 옛날 정기왕이 얻었던 것과 같은 관직이 이후 821년 3월에 치청절도사에게도 주어지면서 신라와 발해 양국과의 외교는 치청절도사와 평로절도사가 각각 분담해서 맡게 된다.
[己亥, 置臨海監牧, 命淮南節度使兼之. 敕李師古妻裴氏ㆍ女宜娘於鄧州安置, 李宗奭妻韋氏放出掖庭:坐李師道族人籍沒, 上湣之, 宥以輕典.]
기해(22일)에 임해감목(臨海監牧)을 두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에게 겸하게 했다. 칙으로 이사고의 아내 배(裴)씨와 여선랑(女宜娘)을 등주(鄧州)에 안치하고 이종석의 아내 위(韋)씨를 액정(掖庭)에서 방출했다. 이사도의 족인(族人)을 적몰(籍沒)하는 것과 관련해 상은 그것을 딱하게 여기고 너그러운 법률로서[輕典] 처리하였다.
《구당서》헌종본기제16, 원화 14년(819) 5월
죄는 사도왕 이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남아있는 기록만 본다면야 헌종은 그러한 자신의 공약에 충실했던 것 같다. 사도왕의 형수 두 사람을 등주에 안치한 것에 이어 그의 족인을 적몰하는 것에 대해서도 헌종은 너그럽게 처리했다고 하지만, 과연 그 말대로 되었을까 하는 것에는 의문이 간다. 어딜 가든 삐딱하게 팅팅거리는 사람이 한두명은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이로부터 두 달도 안 되어 기주에서 반란이 터졌던 것이다.
[時分師道所據十二州爲三鎭, 乃以遂爲沂州刺史, 沂兗海等州觀察使. 遂性狷忿, 不存大體. 而軍州民吏, 久染汙俗, 率多獷戾, 而遂數因公事訾詈將卒曰反虜. 將卒不勝其忿. 牙將王弁乘人心怨怒, 十四年七月, 遂方宴集, 弁噪集其徒, 害遂於席. 判官張實ㆍ李甫等同遇害.]
이때 사도가 다스리던 12주를 3진(鎭)으로 나누니 이에 수는 기주자사(沂州刺史)로서 기(沂)ㆍ연(兗)ㆍ해(海) 등의 주관찰사(州觀察使)가 되었다. 수는 속이 좁고 각박해서 대체(大體)가 없었다. 군과 주의 백성과 관리들은 오랫동안 우속(汙俗)에 물들어 다스림에 삐걱대는 일이[獷戾] 많았는데 수는 이때문에 여러 번 공사(公事)때면 장졸(將卒)들에게 반로(反虜)라고 욕했다. 장졸들은 그 분노를 이기지 못했다. 아장(牙將) 왕변(王弁)이 그 인심이 원망하고 노하는 것이 많음을 노려 14년(819) 7월에 수가 무리를 불러 연회를 할 때, 변이 모인 무리들에게 소리치면서 자리에 앉아있던 수를 죽였다. 판관 장실(張實)ㆍ이보(李甫) 등도 함께 해를 입었다.
《구당서》 권제162, 열전제112, 왕수(王遂)
원화 14년(819) 7월 계묘. 사도왕이 죽고 불과 다섯 달. 처음으로 옛 제의 땅에서 반란이 터진다. 왕수라는 이 남자는 치청행영제군량곡사(淄靑行營諸軍糧料使), 즉 후방에서 군량지원하던 인간이고, 왕수를 죽인 왕변은 원래 사도왕의 신하였다. '속 좁고 각박해 부하를 제대로 통솔 못하던' 이 남자가 평소 기주 사람을 '반로(反虜)' 즉 '반역한 노비놈들'이라며 모욕하는 언사를 자주 입에 올린 것이 화근이었다 했다. 어찌 보면 그것이 멸망한 제에 대한 충성심 내지는 당조에 대한 고려인들의 민족의식이 작용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당조는 왕수가 피살되자 그의 후임으로 체주자사 조화(曺華)라는 자를 새로 기해연밀등주도단련관찰등사로 임명했다.
[華至鎭, 視事三日, 宴將吏, 伏甲士千人於幕下. 群校旣集, 華喻之曰 "吾受命廉問, 奉聖旨, 以鄆州將士分割三處, 有道途轉徙之勞. 今有頒給. 北州兵稍厚, 鄆州士卒處右, 州兵處左. 冀易以區別." 分定, 並令州兵出外. 旣出闔門, 乃謂鄆卒曰 "天子深知鄆人之勞. 然前害主帥者, 不能免罪." 甲士自幕中出, 周環之, 凡鄆一千二百人, 立斬於庭. 血流成渠. 是日, 門屛之間, 有赤霧高丈余. 久之方散. 自是海ㆍ沂之人, 重足股栗, 無敢爲盜者.]
화는 진에 이르러서 사흘 동안 일을 살핀 뒤 장리들에게 잔치를 열고, 조용히 갑사(甲士) 1천 명을 막하에 모았다. 병사들이 모이자 조화가 말했다. "내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운주 병사들에게 세 곳을 따로 지키게 하여 수고롭게 했다. 오늘은 황제의 하사하신 것을 내려주겠다. 북주 병사들에게 후하게 줘야 하니 운주 사졸들은 오른쪽에, 주병(州兵)들은 왼쪽에 서라. 그래야 구별하기 쉽다." 둘로 나뉘자, 주병들에게 바깥으로 나가 있으라는 명을 내렸다. 주병들이 합문(闔門)을 나가자 운주 병사들에게 말했다. "천자께서는 운주 병사들의 공로를 잘 알고 계신다. 허나 주인을 살해한 죄는 그냥 둘 수 없지." 갑사들이 막 안에서 나와 운주병사 1,200명을 에워싸고 즉시 뜰에서 죽였다. 피가 흘러 강을 이루었다. 그 당시에 문과 가리개의 사이에 붉은 안개가 자욱했는데 높이가 한 장이나 되었다. 오래 지나서야 비로소 흩어졌다. 해(海)ㆍ기(沂)의 사람이 몹시 두려워 떨었을 뿐 아니라, 감히 도적질하는 자도 없었다.
《구당서》 권제162, 열전제112, 조화(曺華)
더러운 놈. 이 대목을 보면서 혼자 이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조화의 군사들은 모두 체주에서 힘자랑이나 하고 다니던 깡패들이었고, 사람 죽이는 데는 조금도 주저할 줄 모르는 것들이었다. 일본의 학자 츠지 마사히로처럼 "이들을 죽이지 않고선 반역한 번진을 순지화하지 못했기 때문에"가 아니라, "이들이 고려인이었기 때문에"라고 보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울 지도 모른다. 학살된 운주 병사들 가운데 고려인만 있었겠나. 백제나 신라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중국인도 적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운주, 정기왕이 다스렸던 평로 12주의 모습은 중국인들이 살아가던 당시 풍습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풍습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은 '우속汙俗'이라고 적고 있다)
조화가 이곳에 부임해 왔을 때, 그는 이곳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 "추(鄒)ㆍ노(魯)는 유자(儒者)의 고향인데 예의를 잊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鄒ㆍ魯儒者之鄕, 不宜忘於禮義]." 추와 노는 중국에서는 흔히 산동 지역, 공자의 고향을 가리킬 때 많이 쓰이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동이 '추로지향'으로 불린다) 공자의 고향 사람들이 어떻게 '예의'를 모를 수가 있느냐는 말은 이곳이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예교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화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제가 몰락한 뒤 혼란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기도 하다. 고려계 이씨 일족과 그들이 세운 제의 몰락은 이곳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에게는, 20세기 중엽 중국내 '조선공동체' 연변을 뒤흔들었던 문화대혁명의 광풍과도 맞먹는 혼란을 가져왔다. 민족의식이 강하던 연변 땅을 일개 중국소수민족자치구로 개조해버린 끔찍한 사상탄압이 마찬가지로 옛 평로치청 안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평로치청 안에 살아남아 있던 고려인들도 어떻게든 중국인처럼 보이기 위해서 갖은 애를 썼을 것이 틀림없다. 피눈물을 삼키면서 자신의 조상을 고려인이라 기록한 족보를 태워버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래도 난 당은 싫어'하면서 차라리 신라인으로 자처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고려인이 일으킨 반란이 진압을 당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이 고려인이라고 내놓고 다니는건 병신짓거리였으니까, 살기 위해서는 고려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부정해야 했다. 잘 하지도 못하는 중국어를 싫어도 해야 하고, 중국 옷을 입고 중국 사람처럼 행동해야 하고. 죽을 때까지 고려라는 이름을 바깥으로 내놓지도 못한 채 고려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사라지고 새로 태어난 아이들은 고려라는 나라가 뭐였는지 어떻게 세워져 어떻게 망했는지도 듣지 못한 채 당의 백성으로 살아간다. 하나의 민족은 그렇게 사라진다.
자발적으로 민족이 흡수통합되는 것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어쩔수 없이, 국가체제의 탄압과 험악한 사회분위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민족통합이 과연 얼마나 역사적 호소력이나 사회적 효력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일제 시대, 월남 이상재가 일본의 정치가 오자키 유키오(尾崎行雄)한테서 '일본과 조선은 부부 같은 사이인데 남편이 좀 잘못했기로 아내가 들고 일어나는 건 너무하지 않을까요?'라는 질문을 받고 '한쪽 욕심으로 폭력을 휘둘러 맺어진 부부니 그렇지' 하고 응수했다는 일화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師道祖父弟兄, 盜據青ㆍ鄆, 得計則潛圖兇逆, 失勢則偽奉朝旨, 向背任情, 數十年矣. 或問曰 "師古之前, 三帥而不滅, 師道繼立, 數年而亡者, 何哉?" 答曰 "納與師古, 自運奸謀, 躬臨戎事. 朝廷任盧杞, 以私妨公, 致懷光變忠為逆, 李納父子, 宜其茍延. 洎憲宗當朝, 裴度為相, 君臣道合, 中外情通. 師道外任諸奴, 內聽群婢, 軍民攜貳, 家族滅亡, 不亦宜乎? 假息數年, 猶為多矣, 何所疑焉?"]
사도의 조부와 제형(弟兄)은 청(靑)ㆍ운(鄆)을 훔쳐 차지하고서 계책이 이루어지면 흉악스런 짓을 하려 들고 힘을 잃으면 조정의 뜻을 받드는 척. 이런 식으로 향배(向背)를 자기 내키는 대로 한지 수십년이었다. 누군가 물었다.
"사고 이전 세 우두머리[帥] 때에는 멸망하지 않더니 사도가 자리를 이어받고 몇 년만에 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납과 사고는 스스로 간악한 음모를 꾸몄기에 직접 정벌하려 하였다. 조정에 임한 노기가 사사로운 일로 공무를 그르쳐 회광(懷光) 같이 충성된 자를 반역하게 만들었다. 이납 부자는 근근히나마 부지하였다. 洎히 헌종이 즉위함에 배도(裴度)를 재상으로 삼았는데 군신의 도(道)가 합하여 안팎으로 정(情)이 통하였다. 사도는 바깥으로는 여러 노비를 등용하고 안으로는 여러 계집종들의 말을 들었으므로 군민(軍民)이 두 마음을 갖고 혼란스러워했다[攜貳]. 가족이 멸망함이 당연하지 않은가? 몇 년씩이나 간 것이 오히려 '길었다'고 할 판에 무슨 의문이 있단 말인가!"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간추리자면 뭐, 천자가 조정의 일을 재상 노기한테 맡겼는데 노기가 사리사욕으로 정치를 공평하게 못 한 바람에 거기에 분노한 이회광이 반란을 일으킨 혼란한 틈을 타서 정기왕의 두 아들이 대를 이어 세습할 수 있었다, 이런 얘기지만 달리 말하자면 정기왕이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도 당조는 정말 멸망했을 지도 모른다는 뉘앙스도 깔려있다. 하지만 '인재 등용의 실패'가 사도왕 멸망의 패착이었다는 평은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실제로 사도왕은 자기 측근의 배신 때문에 망하고 말았으니.
한편 이때 액정궁에 배속되어 노비가 된, 사도왕의 부인 위씨는 이듬해인 원화 15년(820)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고 《구당서》열전은 짧게 뒷맺고 있다. 아마 죽은 남편과 두 아들의 넋을 평생 위로하고, 살해당한 운주 병사들의 명복을 빌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위씨 부인이 출가한 그 절의 이름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싶었는데,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것에 죄송스럽기만 하다.
정기왕과 그의 아들 손자까지 평로치청에서 봉사했던 사람들의 모든 마음이 다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기왕이 당조에 반란을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고려인'이라는 민족의식으로 그런 반란을 일으켰을까. 나는 고려 멸망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유민'으로서 잘 알려진 고선지나 왕모중 같은 고려계 당인들의 이야기는 싣지 않았다. 고려인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우리 역사에 이바지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싣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에서였다. 단재 선생이 <조선상고사>를 처음부터 다시 쓴다고 하셨던 것을 이루셨더라면 단재 선생께서는 이들에 대해 어떤 평을 하셨을지. 흑치상지나 고선지한테 그랬던 것처럼 하셨을까나. 반란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마 정기왕도 다른 고려계 당인들과 다를 것이 아무 것도 없었을 거다. 적국에 대해서 군사적으로 무력충돌로 일관한다면 그들은 민족의식이 강한 자들인가?
당조가 고려의 적국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고려를 무너뜨린 당조에게 복수하는 이유가 민족의식과는 하등 상관이 없었던 정기왕은 단순히 그 일가가 4대를 이어 당조에게 저항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다른 유민들보다 훨씬 주목받고, 재조명되고 있다. 당조에 '군사적'으로 저항한 것만으로 그 이유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민족성'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리라. 그렇다면 진정 민족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정기왕과 그 4대가 고려인의 후예로서 중국 역사 속에서 '가장 성공했던' 삶을 살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이고 그걸 부정해서는 안된다.
다른 나라에서 성공한 고려인들의 삶을 보면서 그걸 자랑스러워하는 이유가 단지 '우리가 더 우월하지'라는 유치한 논리로 귀결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고려인의 이름과 민족성을 버리지 않고도 적국 땅에서 성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법'을 가르쳐주는 사례로 뽑는 것이 낫겠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망하더라도 한민족이라는 민족은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살아만 있으면 나라 따위는 언제든지 다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제의 역사 속에서 알아갔으면 한다. 이국에서 우리 풍속을 지키며 살아가는 한인(韓人) 디아스포라들에게 모두 한국 국적을 주진 못해도 그들이 사는 땅에서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은 권익을 누리며 살수 있게라도 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쟁 속에서 다이라 가문의 흥망성쇠를 담담하게 노래했던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첫 구절을 떠올리며 사도왕의 이야기를 끝맺는다. 불처럼 확 솟구쳐 일어나 사방을 태워버리고 한순간에 사그라들어버린 한 일족의 나라를 설명하기에 이보다 더 나은 구절도 없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원정사의 종소리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울림이요
사라쌍수의 꽃잎은 성자필쇠(盛者必衰)의 이치러니.
교만한 자도 오래지 못하여 그저 봄날 밤의 꿈과 같았고
용맹한 자도 결국 사라졌으니 한줄기 바람 앞의 티끌 같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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