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전쟁시기 한중공동전선의 전개 
4. 1930년대 초 만주의 한중항일연대에 드리운 그림자
항일전쟁시기 한중 공동전선의 전개 - 민족문제연구소 > 한국의 독립운동과 중국혁명 - 이준식 > 4. 1930년대 초 만주의 한중항일연대에 드리운 그림자" (p17-p19)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침략은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저항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항일무장투쟁을 모든 일상활동의 중심에 두도록 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세력은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응해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을 남만과 북만에서 각각 결성했다. 조선혁명군은 1936년 무렵까지, 한국독립군은 1933년 무렵까지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이들의 활동은 중국인 항일의용군과 공동작전을 벌이는 형식을 띠고 있었다. 이에 비해 사회주의세력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도를 받으며 각지에서 항일유격대를 결성했다. 조선인이 거주하는 곳의 중국공산당 현유격대는 초보적이고 소규모의 조선인 무장대로 출발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인 사회주의자가 이끄는 무장대는 처음부터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초 당시 중국 거주 조선인 사회주의자의 대다수가 만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은 애초에 조선공산당 당원이었다. 그런데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조선공산당의 지부승인을 취소했다. 그러면서 ‘1국1당원칙’에 따라 중국에 거주하는 혁명가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라고 지시했다. 일부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코민테른의 방침을 거부하려고 했지만 대세는 ‘1국1당원칙’을 수용하는 것이었다. 만주에 거주하며 혁명운동을 계속하려는 대부분의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1930년 무렵까지 중국공산당에 입당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 혁명운동을 성공시키면서 조선혁명을 지원한다는 ‘이중의 임무’40)를 수용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에 소속된 당원 1,190명 가운데 95% 이상, 공청단원 1,500여 명 가운데 9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지의 유격대가 출범했고 이들 유격대는 1933년부터 동북인민혁명군(제1군-제7군)으로 재편되었다.
 
그런데 1930년대 초에는 만주의 한중항일연대를 뿌리에서 흔드는 일대 사건이 일어났다. 중국공산당에 의해 진행된 반(反)민생단투쟁이 바로 그것이다.41) 민생단이란 박석윤 등의 친일파가 ‘재만조선인에 의한 간도자치’를 내걸고 만든 친일단체였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민생단이 만주의 항일투쟁역량을 파괴하기 위한 공작을 벌였으며 그러한 공작에 많은 활동가가 넘어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면서 1932년 10월부터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민생단을 반대하는 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일 것을 하부조직에 지시했다. 말이 반민생단이지 일제의 간첩혐의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조선인 활동가를 숙청하라는 것이었다.
 
애초에 조선인 활동가가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데는 중국혁명을 이룸으로써 조선혁명을 지원한다는 이중의 임무론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혁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곧 민생단의 간도자치공작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라는 혐의를 받게 됨에 따라 중국공산당에서 활동하는 조선인으로서는 이중의 임무를 고수함으로써 민생단으로 몰릴 것인가 아니면 이중의 임무 곧 조선혁명을 포기할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 셈이다.
 
1932년 10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지속된 반민생단투쟁에서 중국공산당에 의해 목숨을 잃은 조선인 혁명가는 최소 5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심사와 비판의 대상이 되거나 체포당하고 고문을 받은 숫자는 더 많아서 수천 명에 이른다. 반민생단 투쟁에서 가장 주목해야 하는 것은 피해자가 모두 조선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간도를 중심으로 한 동만의 항일역량은 사실상 조선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보기를 들어 1931년 8월 현재 중국공산당 동만특위 산하의 당원 587명 가운데 단 12명을 제외한 575명이 조선인이었다. 이러한 양상은 당조직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같은 해 가을까지 연길, 화룡, 왕청, 혼춘의 4개 현에서 항일유격대가 꾸려졌는데 대원 360여 명 가운데 조선인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결국 조선인을 빼고는 동만지역에서의 항일투쟁은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도 중국공산당은 반민생단 투쟁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 투쟁역량을 파괴하는 일을 벌인 것이다.
 
설사 반민생단투쟁 과정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혁명가도 민생단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는 못했다. 1933년 9월 이후 조선인과 중국인의 연합으로 출범한 동북인민혁명군의 경우를 살펴보면 실제로 무장력의 중심이 조선인인 경우에도 간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고 심한 경우에는 중국인과 같은 부대를 편제하는 것조차 금지되었다. “우선 인민혁명군(동북인민혁명군-인용자)의 주요한 상급 영도기관(군부, 사부, 단부)을 대부분 믿을 만한 중국동지로 바꾸어 책임지게 했다. (중략) 인민혁명군을 다시 편제하고 특히 중국인과 고려인을 갈라 편제했”42)다는 기록이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준다. 이는 동북인민혁명군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1934년 말부터 1935년 중반까지 중국공산당에서 주도하는 주요 회의가 열릴 때 조선인은 의도적으로 회의에서 배제될 정도였다.
 
당시 동만지방의 상황에서 조선인에 대한 배척과 탄압은 바로 항일의 포기 내지는 자멸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도 중국공산당은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반민생단투쟁을 벌임으로써 조선인 항일역량을 일시적으로 궤멸상태로까지 몰아갔다.
 
중국공산당이 반민생단투쟁을 철회한 것은 1935년 말 이후의 일이었다. 이 해 5월 중국공산당의 간부로 코민테른에 가서 반파시즘 인민전선 방침을 전달받은 양쑹(楊松)이 11월에 ‘독립’을 요구하는 조선민족의 요구가 정당하며 이를 이루기 위해 조선인만의 당조직을 꾸리는 것도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43) 이제 민족을 이야기하면 일제의 간첩이라는 반민생단투쟁의 근거가 부정되기에 이른 것이다. 같은 해 1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이 동북항일연군 제1군으로 확대 재편된 것을 시작으로 1937년 10월까지 동북항일연군으로의 전환이 마무리되었다.
 
‘연군’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념과 민족을 떠나 항일에 동조하며 무장활동을 하겠다는 사람을 모두 대오로 받아들인 결과 동북항일연군의 병력은 3만여 명까지 확대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이 최고지도자는 중국인이었지만 군장, 사장, 정치위원 등의 중간간부 가운데는 조선인이 상당수 포진하고 있었다. 조선혁명을 꿈꾸는 조선인 혁명가들의 발언권도 그만큼 강해졌다.
 
1936년 5월에 중국공산당의 승인 아래 조선의 독립을 선결과제로 내건 재만한인조국광복회가 결성된 배경에는 이러한 변화가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비로소 중국공산당 차원에서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의 유기적 결합 곧 진정한 의미의 연대가 이루어질 토양이 마련된 셈이었다.
 
 
 
40)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45)」 (아세아문화사, 1999), 257 286쪽.
41) 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김성호, 「1930년대 연변 '민생단사건' 연구」 (백산자료원, 1999) 볼 것.
42) 「中共東滿特委書記 馮康的報告(之五)」, 中央黨案課 外 , 「東北地區革命歷史文件匯集」 甲30(吉林省工商聯印刷廠, 1989), 331쪽. 
43) 楊松, 「論東北人民反日統一戰線(1935. 11. 2)」, 󰡔共産國際󰡕 , 1-2(1936), 125 127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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