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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독립군의 1930년대 초 한·중 연대 실현과 공동 투쟁" 중 "조선혁명군" 관련 내용(p80-p83)만 가져왔습니다"
 
3. 독립군의 1930년대 초 한·중 연대 실현과 공동 투쟁
항일전쟁 시기 한중 공동전선의 전개 - 민족문제연구소 >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의 한·중 연대투쟁 - 장세윤 > 3. 독립군의 1930년대 초 한·중 연대 실현과 공동 투쟁 

1) 남만주 조선혁명군 독립군의 요녕민중구국회(遼寧民衆救國會) 참여와 독립전쟁
 
1932년 3월 21일 중국 랴오닝/요녕성(遼寧省) 환런/환인현(桓仁縣)에서 중국국민당 특파원 왕위원/왕육문(王育文) 및 구 동북군 장교 탕쮜우/당취오(唐聚五)․리춘룬/이춘윤(李春潤), 대도회(大刀會)의 왕펑거/왕봉각(王鳳閣)등 유력자들과 항일투쟁을 표방한 남만주 동변도(東邊道) 10개 현의 대표 30여명이 모여 조직한 항일투쟁 조직. 일명 요녕구국회라고도 한다.
* 동변도(東邊道) : 압록강 건너편과 남만주 남쪽 일대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만주침략(이른 바 ‘만주사변’, 또는 ‘9․18사변’) 이후 북경(北京)에서 결성된 ‘동북항일민중구국회’에서는 중국 동북지방의 항일투쟁을 촉진하기 위해 환인현에 주둔하고 있던 구 동북군부대 지휘관 탕쮜우/당취오(唐聚五) 등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항일봉기를 촉구하였다. 특히 ‘9․18사변’ 직후 중국 관내로 피신했던 중국국민당의 동북군 영수 장쉐량/장학량(张学良/張學良)은 항일투쟁 의지가 투철한 탕쮜우/당취오를 방어군(요녕 육군보병 제1단) 단장으로 임명하고 적극 후원하였다. 이에 따라 위의 중국인 유지 이외에 쑨수옌/손수암(孫秀岩)․장종저우/장종주(张宗周/張宗周)․쉬다샨/서대산(徐大山) 등이 합류하여 요녕민중구국회가 결성되었다.
* 책원지(策源地) : 책략의 근원지
* 병비(兵匪) : 군대와 비적
 
이 조직은 더욱 많은 항일 대중을 참여시키기 위하여 1932년 4월 20일 환런/환인현 사범학교 운동장에서 항일 선서대회를 개최하고 항일무장투쟁 조직으로 ‘요녕민중자위군’의 조직을 공식 선포하였다. 요녕민중구국회 산하에는 정치 및 군사부문의 두 개 위원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 조직의 상무위원회 위원장 및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왕위원/왕육문이 맡고, 군사위원회 위원장겸 요녕민중자위군의 총사령은 탕쮜우/당취오가 맡았다. 이 때 신빈현(新宾县/新賓縣) 동다잉/동대영(东大营/東大營)에 주둔하고 있던 구 동북군 영장(營長) 리춘룬/이춘윤이 군사위원회 위원겸 제6로군 총사령이 되었다.
 
이 무렵 남만주 지방에서 왕통쉬안/왕동헌(王彤轩/王彤軒)이 이끌던 요녕농민자위단(遼寧農民自衛團)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조선혁명군 독립군은 4월 29일 탕쥐우/당취오 등 요녕민중자위군의 수뇌부와 협상하여 작전협정을 맺고 공동투쟁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조선혁명군은 요녕민중자위군의 특무대와 선전대대(宣傳大隊)로 편제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은 특무대 사령관이 되고, 김광옥(金光玉)은 선전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은 이 해 10월경까지 요녕민중자위군의 일원으로 거의 200여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조선혁명군이 요녕민중자위군의 이춘윤 부대와 함께 치른 영링지에/영릉가(永陵街) 전투와 신빈현성(싱징시엔청/흥경현성) 공방전은 조선혁명군의 용맹을 떨친 작전으로 유명하다.15) 
 
조선혁명군과 요녕민중자위군이 함께 싸운 주요 전투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표 1> 1932년 4월~8월 조선혁명군이 행한 주요 연합전투 및 단독전투
출전 : 신빈만족자치현민위조선족지편찬초 편(新賓滿族自治縣民委朝鮮族志編纂組 編), 「신빈조선족지(新賓朝鮮族志)」(선양(瀋陽): 요녕민족출판사(遼寧民族出版社), 1994, 27쪽.
 
 
2) 조선혁명군의 중한항일동맹회(中韓抗日同盟會) 조직과 활동
 
1934년 9월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梁世奉)(본명 양서봉/梁瑞鳳)이 순국하고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토벌’ 공세가 강화되자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조선혁명군 등의 활동은 차츰 어려워졌다. 이에 조선혁명군을 지도하고 있던 조선혁명당에서는 일종의 자치조직인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통합하여 1934년 11월에 ‘조선혁명군정부’를 조직하여 난관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혁명군 총사령 金活石(本名 金鐸)의 지시를 받은 제1사 사령관 한검추(韓劍秋,본명 최석용/崔錫鏞)는 1935년 9월 20일 남만주의 지안현(辑安县/輯安縣/집안현/즙안현)에서 활동하고 있던 왕펑거(王凤阁/王鳳閣/왕봉각)의 의용군 부대를 방문하여 한·중 양 민족의 공동항일 투쟁을 논의하였다. 이때 ‘중한항일동맹기성위원회’가 결성되고 ‘중한항일동맹회’의 성립선언 및 정강의 초안이 마련되었다. 이후 같은 해 11월 초 이 성립선언 및 정강(政綱)이 한·중 양측의 동의를 거쳐 정식으로 승인되었다.
 
이 한중연합투쟁 조직은 선언 및 서사(誓詞), 정강, 세칙과 군사조직 등을 발표하여 체제를 갖추었다. 이 조직의 정치위원회 위원장은 조선혁명당을 이끌던 고이허(高而虛)가 맡았고, 군사위원회 위원장은 왕펑거(王凤阁/王鳳閣), 군의 총사령관은 한검추가 담당했다. 전체 병력은 1,150명 정도였는데, 한검추 산하 조선혁명군 부대가 100여명이었다. 조선혁명군 1사(師)는 교도련(敎導連)으로 편제되었다.16)
 
중한항일동맹회의 결성목적을 명시한 정강 제2조(종지/宗旨)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중국의) 동북실지(東北 失地)를 회복하며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함”이라고 규정하여 일제 침략과 ‘만주국’의 수립으로 상실한 중국 동북지방의 회복과 조선독립이 가장 중요한 투쟁목표임을 분명히 하였다. 17) 
* 종지(宗旨) : 주장이 되는 요지나 근본이 되는 중요한 뜻.
 
조선혁명군이 자신의 부대규모보다 훨씬 많은 왕펑거/왕봉각 세력과 연합하면서 뚜렷이 ‘조선독립’을 양 세력 연합의 목표로 내세운 점이 주목된다. 또 동맹회의 정책으로는 세계 각민족의 항일단체와 연락을 유지할 것과 중·한 양국의 신정권 수립을 명시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혁명군이 중국의용군 세력과 연대하면서도 조국의 독립과 신정권의 수립이라는 확고한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모색하며 투쟁한 사실을 알 수 있다.18)
 
 
 
14) 「재만조선인(在滿朝鮮人)의 불령행동(不逞行動) 및 단속상황」, 「독립운동사 자료집」 10집,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1984, 611~612쪽. 다른 자료는 한국독립군의 활동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당관내(當管內) 각지에 산재(散在)하는 선인(鮮人)은 거의 각계 민족주의 불령단체(不逞團體)에 속하여 음으로 양으로 불령행동(不逞行動)을 감행하는 음모의 책원지(策源地)가 되어왔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로서 …… 근년(近年) 갑자기 대두한 공산당의 진공 등으로 인하여 활동지반이 현저히 축소되었지만 …… 한족총연합회는 …… (만주)사변 발생과 동시에 일본군의 入吉(길림 입성/入城 - 필자)을 보고 멀리 닝안(宁安/寧安/영안)·우창(五常/오상) 등의 지방에 그 종적을 감추기에 이르렀으나, 이들 불선인(不鮮人)은 다시 병비(兵匪)를 이용하여 초지(初志)를 관철하려고 획책하는 일이 적지 않은데 …… 한족총연합회 남대관 권수정(權守貞) 등은 중동선 산시(中東線 山市)에서 부하 약 40여명과 함께 병비(兵匪)와 합류하여 닝안현(安县/寧安縣/영안현) 하 일반 선인 각호(鮮人 各戶)로부터 매월 300적완(吊宛)의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다… (「소화7년9월40일재돈우파분서장발신길림삼강총영사대리완보고요지(昭和七年九月四日在敦宇波分署長發信吉林森岡總領事代理宛報告要旨)」,「일본 외무성, 육·해군성문서」 제책본(국회도서관) 2,302권 SP·205-4, 10449~10451쪽). 

* 중동선(中東線) = 중국동방철도 = 동청철도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 삼강성(三江省, 지금의 흑룡강성 합강지구)
 
15) 이상은 김학규(金學奎), 「삼십년래한국혁명운동재중국동북(三十年來韓國革命運動在中國東北」, 「光復」 1권 4기(1941년 6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7년 영인 ; 김학규, 「백파자白波自敍傳」,「한국독립운동사연구」 2(198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차오원치(曹文奇/조문기), 「압록강변적항일명장양세봉(鴨綠江邊的抗日名將梁世风/梁世鳳)」, 선양(沈阳/瀋陽) : 랴오닝인민출판사(遼寧人民出版社), 1990 ; 박창욱(朴昌昱),「조선혁명군과 요녕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의 연합작전」,「박영석(朴永錫)교수 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論叢)」 , 탐구당, 1992 ; 장세윤, 「만주지역 독립군의 무장투쟁」, 「신편 한국사」 50(전시체제와 민족운동), 국사편찬위원회, 2001 등을 참고로 작성.
 
16) 만주국군정부고문부 편(滿洲國軍政部顧問部 編, 「만주공산비의 연구(滿洲共産匪の硏究)」 1집(輯), 1937(1969년 영인), 415~417쪽 및 「만주에서 중국공산상과 공산비(滿洲こ於ける中國共産黨と共産匪)」, 「사상정세 시찰보고집(思想情勢 視察報告集)」 4(교토/京都, 동양문화사/東洋文化社, 1973), 85쪽.
 
17) (일본 야마구치현문서관 소장 임가문서/日本 山口縣文書館 所藏 林家文書)「조선혁명군의 상황에 관한 건(朝鮮革命軍ノ狀況ニ關スル件)」, 807쪽.
 
18) 만주국 삼강성공서 경무청 특무과(滿洲國 三江省公署 警務廳 特務科), 「만주 및 지나에관한 지하비밀단체에 대하여(滿洲及支那に於ける地下秘密團體に就いて)」 , 하얼빈(哈尔滨/哈爾濱),1936 ;  장세윤, 「재만(在滿) 조선혁명당의 민족해방운동 연구」 ,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7 ;  신주백,「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아세아문화사, 1999 등 참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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