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kn_044_0050_0010_0010
[국문] 9·18사변후(事變後) 동북의용군과(東北義勇軍)과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의 연합항일술략(聯合抗日述略)
Ⅰ. 서론(序論)
한국사총설DB > 국사관논총 > 國史館論叢 第44輯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국문] 9·18事變後 東北義勇軍과 韓國獨立軍의 聯合抗日述略 > Ⅰ. 序論
* 술략(述略) : 간략한 설명
* 술략(述略) : 간략한 설명
1931년 9월 18일 밤, 일본관동군은 류탸오후/류조호사건(柳条湖/柳條湖事件)을 조작해 놓고는 그것을 구실로 삼아 판양 베이다잉(藩阳 北大营/藩陽 北大營/번양 북대영)을 진공하였다. 이로서 중외를 놀래운 9·18 사변이 폭발되었다.
* 중외 : 나라 안팎
9·18 사변을 일으키고 중국 동북을 삼키는 것은 일본제국주의가 ‘대륙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취한 관건성적(關鍵性的)인 절차였다. 이에 대하여 중외의 허다한 유지인사들은 미리 예견하였었다. 중국 동북지구에서 오랫동안 반일 구국운동에 종사해 온 조선 애국지사들은 일찍이 수차 중국 당국과 민중들에게 사변이 발생할 위험성을 환기시키면서 중조인민(中朝人民)이 연합하여 대적할 것을 호소하였었다. 그러나 당시 전국규모의 정권과 군대를 장악하고 있던 남경국민 정부의 주요 결책자(決策者) 장제스(蔣介石/장개석) 집단은 자기들의 협애한 이익으로부터 출발하여 ‘부저항주의(不抵抗主義)’를 취하면서 각 방면으로부터 들어오는 충고에 대해 아랑곳 않았다. 따라서 張學良의 동북 당국은 처지가 곤란한데다 시국에 대해 착오적인 판단을 하였기에 남경정부의 부저항 명령을 접수하였다 하여 일본군은 첫 싸움에서 순조롭게 이기고 뒤이어 며칠사이에 요녕·길림 양성의 대부분 지구를 점령하였다.
* 관건성적(關鍵性的) : 결정적
* 결책(決策) : 방법, 정책을 결정
* 협애하다 : 범위가 좁고 제한되어 있다
이리떼가 뛰어들고 나라는 궁지에 직면하였다. 전부터 반일항노(反日抗俄) 전통을 가진 동북인민은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길 원치 않았다. 11월 초, 일본군은 흑룡강성을 진공하였다. 마잔산(马占山/馬占山/마점산) 장군 註 001은 부대를 인솔하여 분연히 항전에 나섰다. 넌쟝차오(嫩江桥嫩江橋/눈강교) 일전(一戰)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각종 형식의 항일의용군은 동북의 도시와 농촌 각지에서 떨쳐나섰다. 1932년 상반년에 이르러 의용군 수는 30만명이 넘었다. 동북의용군의 항일투쟁은 국내로는 중국공산당과 중국국민당 중의 애국분자 및 각 당파 애국인사, 인민단체의 찬조, 참여와 지도를 받았고 국외로는 세계 각국의 정의를 주장하는 평화인사와 피침략(被侵略)·피압박(被壓迫) 민족(民族) 등 광대한 민중의 동정과 지지를 받았다. 그 중 특히 중국에 앞서 일본의 침략과 노예화의 봉변을 당한 위대한 조선인민은 동북의용군의 항일투쟁에 대해 성원을 해왔을 뿐 아니라 이번 투쟁의 승리를 쟁취하는 것을 민족해방의 전제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반침략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동북의용군과 연합작전을 함으로써 중조(中朝)인민이 연합하여 일본제국주의를 반격한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펼쳐 놓았다.
대량의 사료가 보여주는 바 1931년 9·18 사변으로부터 1945년 항일전쟁이 승리할 때까지 의 15년간 조선애국지사와 중국애국군민(中國愛國軍民)의 동북지구에서의 연합항일 작전은 줄곧 간단없이 진행되었다. ‘9.18 항전’註 002 기간에는 조선민족주의자가 조직, 영도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과 동북의용군과의 연합항일이 있었다. 註 003 조선공산주의와 중국공산당이 직접 영도한 항일무장 사이의 연합항일도 있었으며 또한 무당파(無黨派) 조선족 애국상중(愛國詳衆)과 중국 기타 항일무장과의 연합 작전도 있었다. 이러한 항일무장은 비록 정견(政見)이 부동(不同)하고 소속관계가 부동하기에 통일적인 지휘는 형성하지 못했지만 항일의 대방향은 일치하였고, 모두가 공동한 항일위업에 보귀(寶貴)한 공헌을 하였다.
* 애국상중(愛國詳衆) : ?
* 보귀(寶貴) : 귀중
1933년 이후 동북의용군은 좌절을 당하여 그 주요 영도자들은 관내(關內)로 넘어갔다. 그러나 한국독립군의 여부(餘部)와 조선공산주의자가 영도하는 반일유격대는 계속하여 중국항일군민과 연합하여 항일하다가 선후하여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서열에 가입하였다. 조선공산주의자와 중국항일군민이 연합하여 항일한 상황에 대해서는 필자가 참여하여 편집, 저술한 《동북항일연군투쟁사(東北抗日聯軍鬪爭史)》란 책에 이미 비교적 전면적으로 서술하였다. 본 논문은 다만 동북의용군 항일시기 동북의용군이 한국독립군 각 부(部)와 연합하여 항일한 상황에 대해 개략적인 서술을 함으로써 앞에서 말한 저서에서 서술하지 못한 부분을 보충할 따름이다.
註) 001 : 마잔산(马占山/馬占山/마점산)(1885∼1950), 자 수방(字秀芳), 지린성(吉林省) 화이더인(怀德/懷德人).
註) 002 : ‘9·18 항전(抗戰)’이란 1931년 9월부터 1933년 5월까지의 동북애국군민(東北愛國軍民)의 항전을 가리킨다. 이 개념의 내함(內凾)은 탄이(谭译/譚譯/담역)이 책임지고 편집한 《구일팔항전사(九一八抗戰史)》란 책을 참고하면 알 수 있다. 이 책은 중국 요녕인민출판사에서 1991년 8월에 출판하였다.
註) 003 : 여기서 ‘한국독립군’, ‘동북의용군’이라 함은 모두가 일정한 의의상(意義上)의 통칭으로서 실제상 이때의 중조항일부대는 군호(軍號)가 많았는바 모두 ‘독립군’, ‛의용군’이라고 부르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서 본문의 구체 장절의 서술을 보면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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