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혁명당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1) 조선혁명당의 결성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1.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 > 1) 만주에서의 정당발생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진영이 국민부와 혁신의회로 정립된 이후 국민부는 민족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해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유지하면서 한인사회의 자치활동과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오다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결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혁명당의 결성 시기에 관하여 약간의 이견(異見)이 있다. 최형우(崔衡宇)의 경우는,
 
1929년 3월 1일 만주 조선민족운동의 총본영 조선혁명당은 기미운동(己未運動)이 있은 지 만 10년 경술국치(庚戌國辱)를 당한 지 19년 이보다 더 소급하야 정미(丁未) 이래 21년간 남북만, 시베리아〔西北里亞〕 등지를 전전하며 민족자주의 숭고한 이념과 결심 밑에 살신성인(殺身成仁)의 대도를 걸어오던 의열지사(義烈志士)와 혁명동지들의 결속으로 사회의 진운에 발걸음을 맞추어 130만여 평방 키로란 만주의 광범한 지역 우에 100만의 내부내자(乃父乃子)를 포옹하고 무궁화(無窮花) 아름다운 삼천리고원(三千里故園)을 바라보며 역사적 거보(巨步)를 내여듸디였다.註 023
 
라고 하여 조선혁명당의 창립시기를 1929년 3월이라고 하고 있다. 이는 채근식 기록과 일치하고 있는데 채근식은 국민부의 창립 시기를 1928년 5월이라고 보고 있으며 조선혁명당에 대해서는,
 
민족혁명자들의 비원(悲願)인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1929년 3월 1일 혁명거두(革命巨頭)들은 길림시 우마행호동(牛馬行胡同)의 국민부 사무소에 모였다. 남만에 있어서는 대소독립단체가 대부분 국민부로 통일흡수되어 국민부는 유일한 혁명군정부로서 활약을 하고 있는데 이 혁명정부를 지지육성하는 유일당이 필요케 되었다. ……중앙당부에는 7부 3위원회를 설치하고 군사위원회하에 국민군부대를 당군으로 개편하여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라 칭하고 당의 명령을 받게 하였다.註 024
 
라고 하고 있다. 한편 홍영도(洪永道)의 기록에서는,
 
처음부터 민족운동에 헌신분투하던 많은 혁명동지들 중에는 민족단일의 총지휘기관인 중심조직의 필요를 느껴오던 바 4262년 기사(己巳:1929) 9월에 길림성 우마항 국민부 주길판사실(駐吉辦事室)에서 이탁(李沰) 이하 20여 명이 회집하여 엄숙한 맹서하에 새로 제정된 선언·강령을 발포함과 함께 한 개의 새로운 조직체가 결성되니 이것이 곧 조선혁명당이었다.註 025
 
라고 하여 9월 창당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928년 5월이라면 정의부의 주도에 의해 전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이므로 이때 국민부는 창립될 수 없는 시기였다.註 026 이때에는 정의부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으며 중앙의회를 통해 유일당 결성을 위해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유일당 결성방법으로 협의회안을 지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부는 협의회측의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에 의해 1929년 3월에 창설되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하여 창설된 조선혁명당은 1929년 3월에 만들어질 수는 없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조선혁명당이 1929년 9월에 창설되었다는 기록이 문제인데, 이는 국민부 중앙의회의 개최에 근거를 두는 것이다. 즉 1929년 9월에 제1회 국민부 중앙의회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유일당을 결성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일제측의 기록에 나타난 중앙의회 결의사항을 보면, “대체로 혁명과 자치를 분리하여 혁명사업은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에 위양(委讓)하고, 국민부는 재만조선인의 자치기관으로서 오로지 그 방면을 담당하기로 하고 강령 및 헌장을 개정하여 중앙기관 중 군사부를 폐지하고 종래의 조선혁명군은 유일당 조직동맹이 지도하게 하며 국민부의 중앙에 새로이 공안부를 설치하고 각지의 주요 지점에 경호국 또는 경호분국을 배치하기로 하였다, 군사행동은 분리시키기로 하였으나 사법 및 경찰에 관한 사무는 여전히 국민부에서 집행함에 따라 그 영향력이 약화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註 027라고 하여 9월에 유일당이 결성되었다고 보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혁명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 이양하여 창당을 위한 기반조성을 이룬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혁명당은 적어도 1929년 9월 이후에 창설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12월에 창당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이다. 12월에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개편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일체의 사무를 당에 위임하고 국민부의 무장조직인 조선혁명군을 조선혁명당 예하에 편성하였던 것이다.註 028 그러나 조선혁명당이 조직되기 이전에도 당의 활동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당조직 이전에 이미 당으로서의 활동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註 029
 
한편 조선혁명당의 진용에 대해서도 약간의 차이가 나타나며 창당 이후 임원의 변동과정을 추적하기가 상당히 어렵게 되어 있다. 그러나 초기의 진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았다고 짐작된다.
 
중앙위원 註 030
이탁·최동오·현익철·유동열(柳東悅)·이일세·고할신·김이대·이웅·이동산(李東山)·현정향·이동림·김돈·김탁(金澤)·고이허·이진탁(李辰卓)·문시영(文始榮)·김안보(金安保)·김진호·안홍·강제하(康濟河)·장승언·장세용(張世庸)·김석하(金錫河) 등 23명.
 
조선혁명당 중앙당부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53. 괄호 안은 최형우(崔衡宇), 앞 책, p.26. 최형우는 비서부위원장을 비서장으로, 경제부장을 재정부장으로, 국제부장을 외교부장으로, 민중부장을 노농부장(勞農部長)으로, 군사위원회와 선전위원회는 부(部)로 표기하고 있으며, 자치위원회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의 간부였던 김학규(金學奎)는 조선혁명당의 중앙에는 비서·조직·경제·국제·조사·민중 등의 7개 부처와 군사·자치·선전 등의 3개 위원회를 두어 당무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채근식의 주장을 취한다.註 031 

 

중앙집행위원장 : 현정향(경)
비서부위원장 : 현정향(겸임)
조직부장 : 고할신
교양부장 : 김보안
경제부장 : 장승언
국제부장 : 최동오
민중부장 : 고이허
군사위원회위원장 : 이웅
자치위원회위원장 : 현익철
선전위원회위원장 : 장철
 
이와 같이 조선혁명당은 7부, 3위원회를 두었으며 군사위원회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두어 당의 명령을 받게 하였다.
 
그리고 국민부 중앙집행 위원장인 현익철이 조선혁명당의 자치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바와 같이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은 조직상 분리되면서도 인맥상통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이러한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의 관계에 대해 채근식은,
 
양 단체는 표리일체의 단체이나 조선혁명당의 행정기관인 국민부에 대한 명령권은 지대(至大)하여 국민부는 조선혁명당이 지시하는 행정사항을 표면에 나타나 처리하는 데 불과하나 일당독재국인 소련이나 중국 국민정부에서만 그 예를 볼 수 있다.註 032
 
고 하였으며 홍영도는,
 
조선혁명당은 완전히 이당치국의 성격을 구비한 민족진영의 유일당으로서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부문을 지도통어하기로 되었다. 더우기 국민부와는 그 구성인물로든지 그 내용정신으로든지 완전히 표리일체의 자매기관으로서 조선혁명당의 지도에 의하여 국민부는 지방자치 행정에 전력하였던 것이다.註 033
 
라고 하고 있다.
 
결국 조선혁명당과 국민부의 관계는 이당치국의 원칙에 입각한 유일당과 행정부의 관계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조선혁명당은 남만주 일대의 유일당으로서 국민부는 동포사회의 자치행정 기관으로서 조선혁명군은 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임무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활동하면서 그 조직과 운영은 유일당인 조선혁명당의 정치적 지도 아래에 놓이게 되는 체제를 갖추었던 것이다.
 
 
 
註 023 최형우(崔衡宇), 앞 책, p.20.
註 024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52.
註 025 애국동지원호회 편(愛國同志援護會編), 앞 책, p.281.
註 02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398~399에서는 정의부 제5희 정기중앙의회가 1928년 2월 24일부터 3월 4일까지 12일간 지린/길림현(吉林县/縣) 동샹쉐이허즈/동상수하자(东垧水河子/東垧水河子)에서 개최되었다고 하고 있으며, pp.401~402에서는 “1928년 11월 20일경을 전후하여 지방부가 정의부로부터 이탈하여 별도로 자치제를 시행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으나 정의부는 신민부 및 참의부와는 달리 현금(現今)도 지반이 상당히 견고하므로 장래 여하한 정도까지 진전될 지는 불명하나 정의부는 자신의 상황을 소속군대를 통해 조사중”이라고 하여 1928년 11월말까지도 정의부는 건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 현금(現今) : 지금, 오늘날
 
註 02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444~45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제5권(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3), pp.583~588에서는 국민부가 1929년 3월 하순에 조직되었으며 조선혁명당은 12월에 결성되었다고 하고 있다.
 
註 028 국사편찬위원회 편(國史編纂委員會編),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5(五)(1969), p.736.
 
註 029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53 ; 최형우(崔衡宇), 앞 책, p.24. 1929년 6월 함경북도 혜산진(惠山鎭)의 무력독립시위가 조선혁명당 조직 부원의 공작 및 조직 지도에 기인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조선혁명당의 조직 시기를 생각할 때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의 운동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註 030 최형우(崔衡宇), 앞 책, p.21 ;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52에는 현정경(玄正卿)이 현정향(玄正鄕)으로 김탁(金鐸)이 김택(金澤)으로 문시영(文時映)이 문시영(文始榮)으로 되어 있다.
 
註 031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53. 괄호 안은 최형우(崔衡宇), 앞 책, p.26. 최형우는 비서부위원장을 비서장으로, 경제부장을 재정부장으로, 국제부장을 외교부장으로, 민중부장을 노농부장(勞農部長)으로, 군사위원회와 선전위원회는 부(部)로 표기하고 있으며, 자치위원회는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국독립당의 간부였던 김학규(金學奎)는 조선혁명당의 중앙에는 비서·조직·경제·국제·조사·민중 등의 7개 부처와 군사·자치·선전 등의 3개 위원회를 두어 당무를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채근식의 주장을 취한다. 김학규(金學奎), 앞 글 ;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601.
 
註 032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53.
註 033 애국동지원호회 편(愛國同志援護會編), 앞 책, p.281.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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