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db.history.go.kr/diachronic/level.do?levelId=kn_044_0050_0010_0010
* "한국독립당"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2) 한족총연합회와 한국독립당의 결성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1.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 > 1) 만주에서의 정당발생
협의회측이 민족유일당조직동맹과 국민부를 결성하고 이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는 등의 발전을 기하고 있을 때, 촉성회측은 협의회측과 같은 명백한 조직적 발전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즉 촉성회측은 혁신의회와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를 구성하여 민족유일당을 조직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국민부가 정의부와 같은 중심조직을 가진 결사체임에 반해서 촉성회측은 비교적 다양한 세력의 결사체였던 까닭에 그 통일자체가 용이하지 않았다.
특히 1년을 기한으로 과도기적으로 구성된 혁신의회도 조직 직후에 위원장인 김동삼이 하르빈에서 왜경(倭警)에 의해 체포되었고 간부인 김승학·김소하·박창식(朴昌植) 등이 통화에서 중·일 양국 군경에 의해 체포되어註 034 그 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다. 게다가 혁신의회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주의자인 김좌진 계열과는 알력이 많았다. 결국 1929년 5월에 1년의 기한이 다해 혁신의회는 해체되고 여기에 참여했던 인사들은 각기 자신들의 예전의 기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註 035
신민부 군정파였던 김좌진은 정신(鄭信)·민무(閔武) 등과 함께 예전의 신민부 자리였던 중동선 일대에 근거지를 정하고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였으며 이들 단체들은 후에 한국독립당의 모체가 되었다.
* 중동선(中東線) = 중국동방철도 = 동청철도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한족총연합회는 김좌진·정신·민무·김종진(金宗鎭) 등이 1929년 7월에 조직한 단체로서 본부는 영안현 산시역전(山市驛前)에 있었으며 한인사회의 산업을 육성하고 자치를 도모하는 순수한 자치기관으로서 설립되었다. 실제로 한족총연합회는 항일무장단체의 유지·훈련과 같은 군사적 활동보다도 우선은 한인사회의 자치제 확립에 주력하였다.註 036 이는 오랜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독립운동 단체들 간의 대립과 파쟁으로 한국 교민들에게 막대한 손해만 끼쳤다고 하는 자성(自省) 속에서 한인사회의 편리와 한인에 대한 위로를 위해 우선적으로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註 037 그리고 한족총연합회는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색동맹회파(黑色同盟會派)의 남대관(南大觀)·전회관(田晦觀)·이강훈(李康勳)·이붕해(李鵬海) 등과 제휴한 단체註 038임을 생각할 때 김좌진은 이때 무정부주의자의 주장까지도 어느 정도 포용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던 중 1930년 1월에 한족총연합회의 주석 김좌진이 암살당함에 따라 연합회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김좌진의 암살은 공산주의자들이 한족총연합회를 장악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되며 이에 연합회의 간부 정신 등은 연합회의 명칭을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로 고쳐 조직을 정비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한편 생육사는 신민부의 군사위원장이던 황학수가 홍진·이청천(李靑天) 등과 함께 1929년 말에 우창/오상현(五常县/五常縣)에서 조직한 단체로 이것은 일종의 농업주식회사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註 039
김좌진의 사후, 이들 단체들을 기반으로 하여 홍진·이청천·민무·안훈(安勳)·황학수·신숙(申肅)·이장녕(李章寧) 등은 1930년 7월에 그들이 오랫동안 염원하던 유일당으로서 한국독립당과 그 소속 당군(黨軍)으로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조직하였다.註 040 이는 민족유일당의 조직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응하는 것이고, 남만주의 국민부 계열의 조선혁명당과 유사한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한국독립군도 역시 조선혁명군과 유사한 역할을 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은 자치기관으로서의 한국자치연합회와 군사기관으로서의 한국독립군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관계에 섰던 것이다.
한국독립당의 조직註 041을 살펴보면, 우선 중앙당부에 6개의 위원회를 두었으며 지당부(支黨部)와 구당부(區黨部)를 조직하여 동북 만주의 의병·유림·대종교(大倧敎) 등의 집단을 총망라하였다. 한국독립당 중앙위원장에는 홍진, 총무에는 신숙, 조직에는 남대관, 선전은 안훈, 군사는 이청천, 경리는 최호(崔灝), 감찰은 이장녕 등이 위원장을 맡았으며, 한국독립군의 총사령에는 이청천이 선임되었다.註 042
이러한 조직상황에 비하여 쯔보에 센지/평강산이(坪江汕二)의 기록은 상당히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3부통합운동 이후의 한국 독립운동 진영이 혁신의회와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한편으로 하고, 재만민족운동단체협의회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다른 한편으로 하여 이분화 되었다고 하면서, 한족총연합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정지(鄭之)는 1931년 2월 북만한족 자치연합회(北滿韓族自治聯合會)를 결성하였는데 파벌항쟁때문에 어느새 해소되고 말았다. 또 그 일파에 속하는 남대관·권수정(權秀貞)·백남준(白南俊) 등 수십 명은 권수정이 1930년 여름 이래 중국 길림성 군법처장 왕과장(王科長:공비토벌대장/共匪討伐隊長)의 비서가 된 것을 기화로 하여 길림 간도방면에 진출하여 선량한 조선인을 압박·체포·감금·약탈하는 횡포를 저질렀다. 또 한족총연합회의 무력파는 김좌진이 암살당한 뒤에는 탈퇴를 성명하고 1931년 2월에는 한족농무연합회(韓族農務聯合會)·한족 동맹회군사부(韓族同盟會軍事部) 등을 결성하여 북만 일대에서 폭위(暴威)를 떨쳤다.註 043
* 폭위(暴威) : 거칠고 사나운 위세
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는 협의회파가 조선혁명당으로 발전해 나갔음은 인정하고 있으면서도 한족총연합회가 한국독립당으로 발전하여 나간 사실은 부인한 채 한족총연합회가 곧 해소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註 044 한족자치연합회의 조직연도에 대해서는 한국측 기록이 없어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이 해소되었다고 하는 것은 단체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독립당으로 계승·발전하여 간 것을 소홀하게 본 것이 아닌가 한다. 즉 한족자치연합회는 한국독립당의 모체가 되었고, 남대관이 한국독립당 조직위원장임을 생각할 때 이들의 활동은 중국 당국과의 협력 하에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쯔보에 센지/평강산이가 말하는 ‘선량한 조선인’이란 일제의 주구배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족농무연합회와 한족동맹회는 한족총연합회를 탈퇴한 것이 아니라 각각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표현기관임註 045을 파악하지 못함에 따라 한족농무연합회와 한족동맹회의 활동이 곧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활동이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기록을 통해 만주사변(滿洲事變) 이전에 북만에서는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이 조직되어 중국 당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갔음을 반증할 수 있다고 하겠다.
註 034 애국동지원호회 편(愛國同志援護會編), 앞 책, p.275.
註 035 국사편찬위원회 편(國史編纂委員會編),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5(五), p.745.
註 03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운동사』제5권, pp.596~597.
註 037 蔡根植, 앞 책, p.156.
註 038 쯔보에 센지(坪江汕二), 『조선민족독립운동비사(朝鮮民族獨立運動秘史)』(도쿄/東京 : 간난도서점(암남당서점/巖南堂書店), 1966), p.401에서는 연합회가 1931년 2월에 결성되었으나 곧 해소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註 03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운동사』제5권, p.597.
註 040 채근식(蔡根植), 앞 책, pp.156~157 ;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602에서는 한국독립당이 1929년 겨울에 창당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시보(時報)』(상하이/上海, 1930. 2. 17),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561에서 당시의 신문은 하이린(海林) 등지에서 단결을 도모하고 있던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 수령(首領) 김좌진이 한인들에게 배일(排日)과 독립운동의 뜻을 고취시키고 있었는데 일인(日人)이 이를 알고 김좌진을 암살하였다고 하고 있다.
註 041 김학규(金學奎), 앞글 ;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602.
註 04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운동사』제5권, p.599.
註 043 쯔보에 센지(坪江汕二), 앞 책, p.104.
註 044 쯔보에 센지(坪江汕二), 앞 책, p.103.
註 045 김준엽(金俊燁)·김창순(金昌順), 앞 책, p.187. 당시 중국측의 신문에서도 한족총연합회 이외에 비밀조직의 자위단(自衛團)이 있었다고 한다(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561).
'근현대사 > 독립운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세봉 - 공훈전자사료관 (4) | 2024.10.04 |
---|---|
위험을 무릅쓰고 '대일 전단' 붙인 어린 소년들 - 오마이뉴스 (5) | 2024.10.03 |
(1) 조선혁명당의 결성 - 근대사료DB (3) | 2024.10.03 |
1)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정당발생 - 근대사료DB (5) | 2024.10.03 |
Ⅰ. 한국독립군의 연합항일술략서론 - 한국사총설DB (0) | 2024.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