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 

1)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정당발생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Ⅲ. 한중연합과 대일항전 > 1. 조선혁명당과 한국독립당의 활동 > 1) 만주에서의 정당발생
 
 
3·1운동 이후 만주(滿洲)의 독립운동 단체들은 통합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남만주의 한족회(韓族會)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북만주의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수많은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킴으로써 만주를 독립 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기지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註 001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군은 국경선을 넘어 만주에까지 출병하였으며, 봉오동(鳳梧洞) 전투와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대패하자 혼춘(琿春) 대학살 註 002이라는 만행을 자행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질수록 한민족은 더욱 더 독립의 열의를 불태우게 되었고, 독립운동 역량의 집결로써 이에 대응코자 하였다. 1923년 8월에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결성되었으며, 1925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펑텐/봉천성(奉天省)의 지안/즙안현(辑安/輯安縣)과 콴뎬/관전현(宽甸县/寬甸縣)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국경선 대안 일대에까지 세력권을 가진 참의부(參議府)와, 하르빈〔哈尔滨/哈爾濱〕이남 싱징/흥경(兴京/興京)·퉁화/통화(通化)를 중심으로 한 정의부(正義府), 그리고 북만 닝안/영안(宁安/寧安)을 중심으로 중동선(中東線) 일대에 걸치는 신민부(新民府)가 결성되었다. 새롭게 출범한 삼부(三府)는 각각의 세력권을 가지면서 그 곳의 한인 사회를 지도하고 군대를 양성하여 항일전에 임하는 등 독립군의 대본영(大本營)인 동시에 독립 정부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註 003
* 중동선(中東線) = 중국동방철도 = 동청철도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그러나 이때의 객관적인 국제정세는 한민족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즉 중국 국민당(國民黨) 정부는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여 동삼성(東三省)을 방임상태에 두었고, 일본 제국주의는 이 틈을 타서 중국의 동삼성당국과 소위 삼시협정(三矢協定) 註 004을 체결하는 등 한국 독립 운동을 압박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자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조직역량을 한층 더 강화함으로써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특히 1926년에 대한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大韓獨立黨組織北京促成會)가 조직되어 중국 관내(關內)에서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운동이 전개되었고 국내에서도 신간회(新幹會)를 중심으로 하여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이 전개되자, 만주에서도 전민족운동선의 통일을 위하여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유일당운동은 이당공작(以黨工作)으로 독립운동을 완성하자는 것으로서, “동일한 목적, 동일한 성공을 위하여 운동하고 투쟁하는 혁명자들이 반드시 하나의 기치(旗幟) 아래 모이고 하나의 호령(號令) 아래 모여야만 비로소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註 005는 인식하에서 시작되었다.
* 동삼성(東三省) : 만주
* 이당공작(以黨工作) : 민정이 군정보다 우위에 있는 체계 ?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이후 임정의 역할이 대폭 위축되자 주의(主義) 여하를 막론하고 단합된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해야 하며 그 구체적인 조직방식은 중국 국민당식의 대당(大黨)을 설립하여 이당치국(以黨治國)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안창호(安昌浩)의 주장 註 006이나 시정방침(施政方針)의 제시를 통해 유일대당의 결성을 촉구한 임정 국무령 홍진(洪震)의 주장 註 007도 모두 같은 인식하에서 유일당운동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개된 유일당운동에 대해 당시의 여론은, “산만하고 무통일(無統一)한 각 소단체의 군림으로부터 조직적이고 통일적이며 전민족적인 결합을 촉성하고 국부적 경제투쟁, ……자연발생적 운동, ……으로부터 전민족적 정치투쟁, ……목적의식적 운동”註 008으로 전환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즉 유일당운동은 단순한 민족역량의 총집결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독립운동 방략에 있어서의 새로운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이당치국(以黨治國) : 1920년대 중반 이후 민족유일당운동이 벌어지게 된 이론적 배경. 즉 소련의 공산당이나 중국의 국민당처럼 통일전선을 통해 유일한 정당으로서 나라를 다스리자는 주장.
* 시정방침(施政方針) : 정무 시행 방침
 
만주에서의 유일당운동의 움직임은 정의부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정의부는 1927년 8월의 제4회 중앙위원회 결의를 통해 만주지역의 운동선 통일을 위하여 신민부와 참의부와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도모할 것, 전 민족운동 통일을 위하여 유일당 촉성을 준비할 것을 밝히고 있다.註 009 유일당 촉성운동이 민족역량의 총 집중 방식으로 제시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이나 러시아의 경험을 받아 들여 유일대당(唯一大黨)을 통해 독립을 완성하겠다는 뜻으로, 이후의 독립운동의 전개가 이당공작註 010이라고 하는 정당 중심의 활동이 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후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정의부를 비롯한 18개 단체의 대표들이 지린/길림(吉林)과 판스/반석(磐石) 등지에서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全民族唯一黨組織會議)를 개최하였다. 18개 단체의 대표로서 김동삼(金東三)·현정경(玄正卿)·현익철(玄益哲)·지청천(池靑天)·이규동(李奎東) 등 39명과 상해(上海)에서 온 홍경희(洪景喜), 북경(北京)에서 온 박건병(朴建秉) 등이 참가하였다.
 
이들 각 단체의 대표자들은 효율적인 투쟁방법을 비롯하여 유일당 결성문제·군사·재정·정치·교육·노동·청년 등의 각종 문제들을 논의하였으나 불행히도 유일당 결성방안에서 서로 이견이 나타났다. 유일당 결성방안으로는 세 가지가 제시되었는데, 단체본위 조직론·단체중심 조직론·개인본위 조직론이 그것들이다.註 011 단체 본위 조직론은 해외운동자의 거의 대부분이 기성단체에 관계하고 있고 현재 다수의 소운동단체들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유일당은 이 다수의 소운동단체를 떠나서는 존재 불가능하며 유일당은 이 다수의 소단체를 기초로 하여 조직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단체중심 조직론은 단체본위론에 의하면 유일당이 아니며 각 단체연합회가 된다고 비판하고 유일당 조직은 반드시 기성단체 중 가장 혁명적이며 권위있고 또 많은 역사적 전적을 가진 유력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다른 소단체들을 이에 종속시켜 장차 그 세력을 확충함이 득책(得策)이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개인본위 조직론은 종래의 모든 운동단체가 대부분 지방적 파벌적 결합이라고 비판하면서 군소단체를 본위로 하여 당을 조직한다면 반드시 당파전(黨派戰)의 소굴이 될 것이고, 또 기성단체 중에는 남을 인솔할 실력과 권위를 갖고 중심적 역할을 할 만한 단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유일당은 개인본위로 조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득책(得策) : 훌륭한 계책
 
이러한 유일당 조직에 대한 근본 이론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함에 따라 전민족유일당조직회의는 두 파로 분열되었는데 단체본위 내지 단체중심 조직론을 지지하는 정의부 이하 11개 단체는 재만운동단체협의회(在滿運動團體協議會)를 조직하였으며, 지방적 파벌적 기성 단체를 해체하고 개인본위를 주장한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 이하 7개 단체는 민족유일당재만촉성회(民族唯一黨在滿促成會)를 조직하였다. 
 
협의회측은 
① 민족유일당 조직을 준비할 것, 
② 혁명선열의 유업인 조선혁명의 완성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분투·노력할 것, 
③ 전 민족·각 층에 공통된 정치적 불평을 추출하여 민족유일당으로 총 집중할 것 
등을 협의하여 민족적 해방을 최고 목표로 하는 단일전선의 전개를 역설하였다. 
 
한편 촉성회측은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고 정치적·경제적으로 일체의 생활이 평등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민족유일당을 결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양측의 주장은 각기 자단체(自團體)의 이익을 반영한 것으로 정의부와 같은 강력한 단체는 단체본위 내지, 단체중심 조직론을 지지하였으나 여타의 군소단체들은 자신의 존립기반 유지를 위해 개인본위론을 주장한 것이다. 특히 공산주의 계열에서는 민족주의 계열이 지배적이었던 1920년대 후반의 만주에서의 운동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단체본위론 보다는 개인본위론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전민족유일당 조직회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또 다시 정의부를 중심으로 하여 삼부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통합과정에서 의견대립이 매우 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장 결정적으로는 길림의 중·일 경찰의 습격에 의해 삼부통합운동은 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註 012
 
이때에 나타난 각자의 주장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첫째 상대적으로 조직역량이 약한 신민부와 참의부는 
① 신민부·참의부·정의부를 완전히 해체할 것 
② 과정조직으로써 잠시 그 잔무를 정리·청산할 것 
③ 촉성회 대 협의회의 분규를 타파하고 전 만주 일반의 대당주비(大黨籌備)를 실현할 것 
④ 이주민의 귀화를 장려하고 특수한 자치권을 획득할 것 
등을 주장한 데 반하여 
정의부는 현재의 각 단체를 그대로 두고 유일당 운동을 촉진하자는 단체중심 조직론을 주장하여 양보하지 않았다.
 
둘째, 신민부의 대표권 항쟁문제로서, 처음 신민부에서는 통일회의의 소집에 응하고 민정파 김돈(金墩)을 대표로 파견하였으나 군정파의 김좌진 등은 민정파 대표가 반동분자라고 하여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이의를 제기하여 회의를 차단하였던 것이다. 
이에 정의부는 
① 대표 문제를 무조건 타협할 것 
② 타협이 불능할 때에는 쌍방이 함께 출석할 것 
③ 위의 두 항목이 함께 실현되기 곤란할 때에는 심사기관에서 정할 것 
등의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나 군정파는 전부를 반대하여 해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세째, 참의부의 대표소환 문제였는데, 참의부 대표인 김소하에 대하여 참의부에서는 반동적탐(反動敵探)의 죄명으로 사형의 판결을 내려 정의부에 그 집행방법을 위탁하였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일본의 참의부 파괴공작에 의해 내분이 발생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실패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회의장을 중·일 경찰이 습격함에 따라 회의를 속개할 수 없어 더 이상 이견을 줄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삼부통합운동에서도 협의회와 촉성회로 분열·대립하여 양측은 각기 독자적인 유일당의 촉성과 군정부 수립의 계획을 추진해갔다.
 
우선 촉성회측은 1928년 12월 하순에 길림에서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신민부의 군정위원회 측과 참의부의 김희산(金希山)계, 그리고 삼부통합회의의 결렬을 계기로 정의부를 탈퇴한 김동삼·김상덕(金尙德)·김원식(金元植)·지청천 등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각자의 명의로 참의부와 신민부의 해체를 선언하였으며, 혁신의회의 존속기간을 1년 내로 한정하면서 주요 사업을 결정하였다.註 013
 
그리고는 지방 행정구역을 재편하여 종래 참의부 관할지대를 남일구(南一區)로, 김동삼이 정의부를 탈퇴하면서 그 지역에 조직한 재야혁명당(在野革命黨)의 소재지를 중일구(中一區)로, 신민부 관할지역을 북일구(北一區)로 하여 전동삼성(東三省)을 통할하였다.註 014
 
한편 혁신의회를 통한 민족운동 이외에, 유일당 결성을 위한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를 결성하였다.註 015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동삼, 위원에는 김좌진·김성호(金盛鎬) 등이 선임되어 표면기관인 혁신의회에 표리 호응하여 유일당의 촉성을 기하기로 의결하였다.
 
이상과 같은 촉성회측의 활동에 대하여 정의부와 신민부 민정위원회계열, 참의부의 심용준 계열 등이 연합한 협의회측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결성하여 나름의 자치정부 수립과 유일당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이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은 1929년 3월에 길림에서 다시 3부통합 회의를 개최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인사들은 정의부 대표 이동림(李東林)·현익철·고이허(高而虛)·고할신(高轄信)·최동욱(崔東旭)·이탁(李鐸) 참의부 대표 심용준·임병무·유광흘(劉光屹), 신민부 대표 이교원(李敎元) 등이었다.註 016 비록 촉성회 계열의 인사들은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 회합을 통해 국민부(國民府)라는 군정부(軍政府)를 수립하게 되었다.註 017
 
국민부는 3부 중 가장 강력한 단체였던 정의부를 기반으로 하였으며 혁신의회에 비해 공산주의자의 침투가 적었기 때문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註 018 우선 반일 자치운동에 역점을 두어 농민들의 권익옹호와 정치교육에 힘썼다.註 019 농민의 정치적 훈련과 조직을 통하여 혁명의식을 앙양하였으며 그들로 하여금 직접 전열(戰列)에 참가할 수 있도록 지도 육성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첫째로 재만동포의 생명선인 농지문제와 경작권에 대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지주들의 농단(壟斷)과 모리(謀利)를 방지하고 중국 당국의 조선농민에 대한 방책을 시정하게 하여 경작년한(耕作年限)의 확보, 소작료의 경감, 수리시설의 편의 등의 성과를 보았다. 
 
둘째로 농민운동을 지도하였는데, 농민의 독자적 발전 및 그들의 조직과 계몽을 촉진하여 장차 조선의 노동자와 함께 독립전선에 충분한 역할을 담당케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서 국민부의 법무위원장 현정경註 020은 손수 민족주의적 견지에서 『농민독본(農民讀本)』을 펴내기도 하였다. 
 
세째로는 정치교육을 실시하였는데 흥경현 왕청문(旺淸門)에 정치학교인 남만학원(南滿學院)을 설립하여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여기에서는 『봉화(峰火)』라는 학원동인지가 발간되었으며 현정경·박소심(朴素心)·김수산(金壽山)·이춘(李春) 등이 교사로 활동하였다. 
 
네째로는 통신교육과 순회문고(巡廻文庫) 활동으로 국민부의 교육부에서는 길림을 중심으로 전 만주 중요지역 15개 처에 총관소문교반(總管所文敎班)을 통하여 문고를 설치하고 일반 과학사상의 향상과 실제지식의 보급을 장려하였다. 또한 월 1회의 통신교육을 통하여 필요학문의 개발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를 조직하여 이를 직·간접으로 지도·협조하였다.
 
이외에도 국민부는 반일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일제의 주구기관인 선민부(鮮民府)와 조선인보민회(朝鮮人保民會)·조선인거류민회(朝鮮人居留民會) 등을 공격하였다.註 021 특히 선민부는 참의부와 통의부의 상쟁이 있을 때 투쟁의욕을 상실하고 변절한 참의부 간부 김선봉(金仙鳳)·이영재(李永哉)·송운봉(宋雲峯) 등이 조직한 반독립친일단체(反獨立親日團體)였다. 그들은 아직도 신망이 남아있는 점, 독립운동자와 면식이 있어 활동하기 용이한 점, 독립군 근거지를 잘 아는 점, 독립운동자의 심리를 잘 알아 반대공작을 하기 좋은 점 등을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압박하였다. 이에 국민부에서는 1929년 봄에 별도로 선민부토벌지휘부(鮮民府討伐指揮部)를 설치하고 총사령관에 사령관인 이웅을, 부사령관에 양서(세)봉을 임명하여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종래의 정의·신민·참의부는 유일당 운동과 삼부통합운동을 통하여 결국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나뉘어졌다. 혁신의회는 좌·우합작의 성격이 강하고 국민부는 민족진영 내부의 단결이라 할 수 있다.註 022 그러나 혁신의회는 좌·우합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끝내 분리하게 되어 민족 계열인 김좌진 계열은 다시 신민부의 지역으로 돌아가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여 다시 정당활동을 준비하게 되었으며 국민부도 그 발전 과정 속에서 정당 조직요인을 배태하여 정당활동을 실현하게 되었다.
 

 

 

 
註 001  강재언(姜在彥), 「조선독립운동의 근거지문제(朝鮮獨立運動の 根據地問題) : 1910년(年) 전후의 양쪽의 사상적대응(前後の 二つの 思想的對應)」, 『조선민족운동사연구(朝鮮民族運動史硏究)』, pp.11~12.
 
註 002 1920年 10月 2日 일제(日帝)는 만주출병의 구실을 찾기 위하여, 그들이 매수한 마적 창장하오(长江好/長江好/장강호)로 하여금 훈춘/혼춘성(珲春/琿春城)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성내(城內)의 일본 영사관이 피습을 당했다는 이유로 중국과 하등의 협의도 없이 만주에 출병하였다. 일본군은 만주출병 이후 한인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하였다. 중국측 기록에 의하면, 1921年 2月까지 일본군에 의한 한인과 중국인의 사상자는 허롱/화룡현(和龙县/和龍縣)에서만 남자 143명, 여자 41명에 이른다고 한다.
장빈(张斌/張斌), 「조사화룡현경내화간인민조일군손해실수선표정청제출교섭유(調査和龍縣境內華墾人民遭日軍損害實數繕表呈請提出交涉由)」,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한국독립운동(資料韓國獨立運動)』제4권(下)(연세대학교출판부/延世大學校出版部, 1975), pp.1686~1698 참조.
 
註 003  김학규(金學奎), 「이십년래한국혁명운동재중동북(二十年來韓國革命運動在中國東北)」, 『광복(光復)』제1권(第一卷) 제삼기(第三期)(서안/시안/西安 : 광복군사정훈처/光復軍司政訓處, 1941. 5. 20), 후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p.1600~1601.
 
註 004 추헌수(秋憲樹), 「1920년대(年代) 재만한인(在滿韓人)에 대한 중일(中·日)의 정책(政策)」, 동아일보사 편(東亞日報社編), 『삼일운동 50주년 기념논집(三·一運動 50周年紀念論集)』(1969), pp.589~590.
 
註 005 경상북도경찰부(慶尙北道警察部),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1934), pp.109~111.
 
註 006 대한민국국회도서관 편(大韓民國國會圖書館編), 『한국민족운동사료(韓國民族運動史料)』제2집(第二輯)(중국편/中國編)(대한민국국회도서관/大韓民國國會圖書館, 1976), pp.599~600.
 
註 007 「조선민족운동년감(朝鮮民族運動年鑑)」, 김정명 편(金正明編),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Ⅱ(동경/東京 : 원서방/原書房, 1976), p.323.
 
註 008 「중국 재류 조선인의 민족운동과 공산주의 운동과의 관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독립운동사 자료집』제10권(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6), p.404.
 
註 00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405.
 
한편 1927년 11월 상해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관내촉성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聯合會)에서는 다음의 강령을 결의하였다.
① 본회는 한국유일대독립당(韓國唯一大獨立黨) 성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각지 촉성회의 조직 확장 및 당조직 주비회 성립에 노력한다.
② 본회는 한국의 독립에 필요한 전 민족의 일체 혁명역량의 총 집중을 실현하는 선구자가 되도록 한다.
③ 본회는 우리의 실제 상황과 세계의 대세에 비추어 독립당 조직에 관한 계획을 연구 제공할 것을 도모한다.
 
註 010 채근식(蔡根植), 『무장독립운동비사(武裝獨立運動秘史)』(민족문화사/民族文化社, 1985年 影印), p.146.
 
註 01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403~404.
註 01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p.407~408.
註 013 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사(四), p.878.
註 014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51.
註 015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편, 앞 책, pp.409~410.
註 016 경상북도경찰부(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p.127~128.
註 017 채근식(蔡根植), 앞 책, p.149 ; 최형우(崔衡宇),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海外朝鮮革命運動小史)』제2집(第二輯)(동방문화사/東方文化社, 1946), p.16.
 
註 018 촉성회에는 ML파 공산당이 참여하였으며 협의회에는 서울·상해파 공산당이 참여하였다. ML파는 계급지상주의를 나타냈으나 서울·상해파는 민족문제가 계급 문제에 우선한다고 하여 협의회에 참가하여 초기에는 민족역량의 강화에 어느 정도 공헌한 것으로 보여진다. 김정명 편(金正明編), 앞 책, p.1088.
 
註 019 최형우(崔衡宇), 앞 책, pp.18~19 ; 애국동지원호회 편(愛國同志援護會編),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1956), p.280.
 
註 020 현정경은 만주 한인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일제 압박의 경감을 위해 1927년 4월 1일 김영풍(金榮豊) 등 30여명과 함께 農民互助社를 조직하였으며 이를 통해 만주 한인에 유익한 공작을 많이 한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국민정부군사위원회정치부/中國國民政府軍事委員會政治部, 「십년래의 조선반일운동/十年來的 朝鮮反日運動」(1938. 6), 추헌수 편(秋憲樹編), 『자료한국독립운동(資料韓國獨立運動)』제1권, p.70).
 
註 021 추헌수 편(秋憲樹編), 앞 책, p.1602.
註 022 김준엽(金俊燁)·김창순(金昌順) 공저(共著),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產主義運動史)』제4권(第四卷)(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高麗大學校亞細亞問題硏究所, 1974), pp.184~185.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