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독립군의 1930년대 초 한·중 연대 실현과 공동 투쟁" 중 "한국독립군" 관련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3. 독립군의 1930년대 초 한·중 연대 실현과 공동 투쟁
항일전쟁 시기 한중 공동전선의 전개 - 민족문제연구소 >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만주)에서의 한·중 연대투쟁 - 장세윤 > 3. 독립군의 1930년대 초 한·중 연대 실현과 공동 투쟁
 
 
3) 북만주 한국독립군의 중한연합토일군(中韓聯合討日軍, 한중연합토일군) 활동
 
북만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이 1933년 1월 13일 중국의용군인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 제14사 차이스롱/시세영(柴世荣/柴世榮) 부대와 연합하여 결성한 한·중 양 민족의 연합항일부대로, 한국인들은 ‘한중연합토일군’이라고 불렀다. 1931년 9월 일제의 전면적 만주지방 침략 이후 항일무장투쟁을 모색하고 있던 한국독립당에서는 같은 해 11월부터 적극적으로 한중 양 민족의 연합투쟁을 도모하였다. 신숙(申肅) 등은 이 해 12월 중동철도호로군(中東鐵道護路軍) 사령관인 딩차오/정초(丁超) 등을 찾아가 이 문제를 상의하고 중국의용군과 공동작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1932년 1월 초부터 한국독립군의 조경한(趙擎韓)·권오진(權五鎭) 등이 편성한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은 길림자위군 제9사 시에푸청/사복성(谢复成/謝復成) 부대와 함께 슈량/서란현(舒兰县/舒蘭縣) 전투 등에서 공동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 중동철도 = 중동선 = 동청철도 = 북만주지역 만주횡단철도
 
이후 한국독립당은 1932년 11월 29일 중앙의회를 소집하였다. 여기에서 군사활동을 동만주 지방으로 한정하고 길림구국군 수뇌부에 특파원을 보내 한중합작을 추진키로 결의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국독립군은 1933년 1월 13일 길림구국군 시세영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연합토일군’을 결성하였다.
 
이 때 한국독립군은 수백 명 규모였고, 길림구국군은 2000여 명에 달했다. 중한연합토일군은 4월 중순부터 9월 초까지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스다오허즈/사도하자(四道河子)·동징청/동경성(东京城/東京城)·다뎬즈링/대전자령(大甸子岭/大甸子嶺)·동닝/동녕현(东宁县/東寧縣) 전투 등 대규모 항일전을 전개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33년 6월 30일 길림구국군 시세영(柴世榮) 부대와 연합, 간도(현재 중국 연변)의 루오즈고우/나자구(罗子沟/羅子溝)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수송대를 대전자령에서 습격하여 막대한 군수물자를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19)
 
 
4) 한국독립군의 대전자령전투
 
한국독립군(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은 1933년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에 500여 명의 군세로 2,000여 명의 시세영부대와 연합하여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수송부대를 매복 기습하여 많은 군수물자를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군수물자의 노획이라는 측면에서 이 전투는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전과라 할 수 있다. 1932년 4월 간도에 출동했다가 이듬해 6월 말 철수하는 일본군 75연대 등 보·포·기(騎)·공병 혼성 부대와 100여 대의 화물자동차, 500여 대의 우마차로 이루어진 수송부대를 대전자령(일명 타이핑링/太平岭/太平嶺/태평령)이라는 고개에서 기습하여 적을 섬멸했던 것이다. 20) 이 전투에서 빼앗은 물자는 다음과 같았다.
 
박격포 등 각종 포 8문
각종 기관총 110자루
소총 580자루, 탄약 300상자
수류탄 100상자
권총 200자루, 도검 40자루
군용지도 2,000여 매
각종 문서 300여 부
피복, 담요, 기타 군장비 2,000여 건
장갑차 2량
망원경 25개 및 약품 50상자 등 21)
 
한편 다른 기록에는 이 때의 전과가 군복 3,000여 착, 군량·문서·기타 군용품 200여 마차, 대포 3존(尊), 산포(山砲)·박격포 등 10여존(尊), 담요 3,000여장, 소총 1,500정 등으로 정리되기도 한다. 22) 
 
약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막대한 군수물자의 노획은 우리나라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전과라고 할 만 했다. 이 전투에서 입은 한국독립군의 피해는 별로 없어서 경상자 4·5인이 발생하였을 뿐이었다.
 
대전자령전투 관련 일본군의 주장을 보도한 국내 발행 3종 신문기사를 통해 당시 진상의 일부를 파악해보기로 한다.
 
 
① 동아일보 보도
 
동아일보는 조선군사령부 발표 내용을 가장 상세히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피란민 호송중의 대참사
천육백여명 거처 불명 사상자 30, 병사자도 40
금(今) 8일, 조선군사령부 발표
도중(途中)의 반만군(反滿軍) 습격으로
* 조선군사령부 발표=회령(會寧)
 
“6월 26일 백초구(百草溝)를 출발한 석정(石井) 조장(曹長) 지휘의 27명은 29일 루오즈고우/나자구(罗子沟/羅子溝)에 도착30일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오전 세시 화물차 백대로 백초구를 향하야 출발하였는데, 일행에는 나자구부터 피난한 우차(牛車) 오백대가 이에 따러 7월 1일에 국자가(局子街)에 도착- 동(同) 6일 오전 여섯시 삼십분에 회령에 귀환하엿는바 동대(同隊) 호송중의 전투상황은 6월 30일 오전 6시 태평구(太平溝) 부근에서 약 사천(四千)의 반만군과 교전하야 이를 격퇴-
이날 오후 세시 40분 파피전자(波皮甸子) 동방 약 10리 반쯤되는 지점에서 구국군(救國軍) 4백과 교전 격퇴시키고 동 열한시에 다시 동지(同地) 서편에서 약 60의 반만군과 교전후 격퇴-
7월 1일 오전 8시부터 오후 다섯시 반까지 장가점(張家店) 부근에서 우마차에 수송중이든 약 삼백의 구국군과 교전 한시간에 이를 격퇴 2일 오전 두시 노령(老嶺)부근에서 4, 50명의 반만군과 교전 후 격퇴-
4일 오후 다섯시 화가점(火家店) 부근에서 약 80명의 반만군과 격전 한시간에 격퇴
3일 오전 여섯시 화가점 서쪽에서 약 70명의 반만군과 교전 격퇴
이상 여러번 전투에서 반민군의 유기한 시체 백개, 일본군의 경상자 두명, 화물자동차 한 대를 태워버리고, 화차 십사대 행위불명과 피란민 삼십명이 사상(死傷), 경상이 두명에 행위불명이 약 오십명, 병사(病死)가 40명, 우마차 백대가 모두 행위불명이 되엇으며 백초구에 도착한 때에는 4천명의 피란민 중 천6백명의 피란민은 모두 흐터져버리고 또는 반만군에게 납치되엇다. 이어서 우마차대는 20리에 뻐치고 이들의 호송병은 27명으로 손해는 상당하나 어찌할 수 없다.” 23)
 

「동아일보」 석간(1933.7.9., 2면)
 
 
② 조선일보 보도
 
당시 조선일보(1933년 7월 9일자)는 「조선군사령부 발표」임을 밝히면서 「나자구(羅子溝) 피난민중일천륙백명 사산(四散), 토병(土兵)의 습격으로 30명 사상, 행방불명도 오십명」이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이 보도하였다. 다소 장황하지만 기사 전문을 예시해보기로 한다.
* 사산(四散) : 사방으로 흩어짐
 
“회녕(會寧)에서 간 라자구(羅子溝)수비대에서 환송하는 화물을 호송하기 위하야 륙월 이십륙일 백초구(百草溝)를 출발한 석정조장(石井曹長)이하 이십칠명은 이십구일 라자구에 도착하고 그 이튿날 새벽 세시에 하차(荷車) 백대를 가지고 다시 백초구를 향하야 출발하였는데, 그 일행중에는 라자구에서 피난민 사천여명과 피난민의 우마차(牛馬車) 오백여대가 뒤를 달려 칠월 일일에 국자가(局子街)에 도착한 후 륙일 오전 여섯시 삼십분에 회녕(會寧)에 돌아왔다. 이 호송대는 호송중 수차 반군(反軍)과 싸왓는대, 그 교전상태를 보면 륙월 삼십일 새벽에는 태평구(太平溝) 부근에서 약 사천명의 반군과 교전하고 칠월 일일에는 장가점(張家店) 부근에서 약 삼백의 구국군과 교전하고, 이일에는 새벽에 로령(老嶺)부근에서 사오십명의 반군과 교전하얏는데, 이상 수차의 싸움으로 말미암아 반군이 버린 시체가 일백, 일본군 이명 부상, 하차 십사대 행방불명, 피란민 사상 삼십명, 피란 민중 행방불명이 된자 오십명, 병으로 죽은자 사십명이며 그 밧계 우마차 백대가 행방불명이 되엿는데 백초구에 도착하야 조사한 결과 사천명 피란한 민중에서 일천륙백명은 사방으로 흐터지고 또는 반군에게 사로잡히어 행방이 불명된 것이 판명되여 잇다” 24)
 
약 1년 2개월간 주둔했던 일본군이 철수한다고 하여 과연 4천 내지 천육백여명에 달하는 많은 피난민과 500여대의 우마차가 일본군의 철수 행렬에 동행했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③ 조선중앙일보 보도
 
「조선중앙일보」 1933년 7월 9일자 기사에는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조선군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회령발 나자구(羅子溝) 수비대로부터 환송 화물 보호를 하려고 지난 6월 26일 백초구(百草溝)를 출발한 석정(石井) 조장 지휘의 27명은 29일 라자구에 도착 30일에 준비를 하야가지고 오전 3시에 하차 1백 대로 백초구를 출발하얏는데, 1행에는 라자구로부터 피난하는 피난민 약 4천과 피난민의 우마차 5백대와 가티 7월 1일 국자가(局子街)에 도착하고 동월 6일 오전 6시 30분에 회녕에 귀착하얏는데 동대(同隊) 호송 중 전투 상황은 6월 30일 오전 6시 태평구(太平溝) 부근에서 약 4천의 패잔병과 교전하야 이것을 퇴격하고 동일 오후 3시 40분경에 다시 구국군 4백과 교전하야 역시 퇴격하고 7월 1일 오전 8시에 장가점(張家店) 부근에서 약 3백의 구국군과 교전 1시간을 하여 퇴격하고 2일 오전 2시 로령(老嶺) 부근에서 4,5십 명의 패잔병과 교전하야 퇴격하고 4일 오후 5시 화가점(火家店)에서 약 8십명의 패잔병과 교전 격퇴하고 3일 오전 6시 화가점 서방에서 약 7십명의 패잔병과 교전 격퇴하얏다. 이 전투에 패잔병이 유기한 사체만 백, 일본 부상 병대 2명, 화물 자동차 1대를 소실, 하차 14대 행위불명, 속행 피난민 30명 사상하고 경상 2명, 행위불명 50명, 병사자 40명, 우마차 백대 행위불명으로 백초구에 도착할 때에는 4천 명의 피란민이 사산 또는 패잔병에게 납치되었다.“ 그리고 이 우마차대는 20리에 긍하야 호송병 27명으로는 도저히 어떠케 할 수 업섯다 한다. 25)

「조선중앙일보」 (1933.7.9, 2면)
 
이상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의 1933년 7월 9일자 보도기사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군사령부는 공식적으로 화물자동차 14대와 우마차 100대가 행방불명되었다고 발표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대전자령전투에서 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길림구국군) 연합부대가 위에서 서술한 것처럼 막대한 군수물자를 노획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전자령전투에서 대승한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과 협의하여 노획품을 분배한 후 약 40일간 대전자(羅子溝)에 주둔하였다. 이 기간을 통해 무장을 강화하고 훈련을 실시하는 등 부대의 재편성과 전력 강화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전자령전투 이후 일본군에게 노획한 전리품의 분배문제와 노선의 차이로 한·중 양군 사이에 갈등이 생겨 양측이 결별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동녕현전투 직후인 1933년 10월 초 길림구국군 사령관 우이청/오의성(吴义成/吳義成)은 한국독립군을 기습하여 무장해제를 단행하였다. 특히 길림구국군 참모장 저우바오종/주보중(周保中)은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공산당 계열의 왕청·훈춘유격대와 연계되어 있었다. 또 시세영은 한국독립군을 해체하고 중국군에 편입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배경에는 일제의 친일단체로 1932년 2월 출범한 ‘민생단(民生團)’의 영향도 있었다. 결국 한국독립군은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되고 다수의 대원들이 구금되는 큰 타격을 받고 해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청천(지청천) 등 다수의 한국독립군 장병들은 중국 관내 지방으로 이동하여 항일투쟁을 지속하였다. 26)
 
 
 
 
17) (일본 야마구치현문서관 소장 임가문서/日本 山口縣文書館 所藏 林家文書)「조선혁명군의 상황에 관한 건(朝鮮革命軍ノ狀況ニ關スル件)」, 807쪽.
 
18) 만주국 삼강성공서 경무청 특무과(滿洲國 三江省公署 警務廳 特務科), 「만주 및 지나에 대한 지하비밀단체에 관하여(滿洲支那にける地下秘密團體に就いて)」 , 하얼빈(哈尔滨/哈爾濱), 1936 ; 장세윤, 「재만(在滿) 조선혁명당의 민족해방운동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논문, 1997 ;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운동사(1920∼1945)」 ,아세아문화사, 1999 등 참조.
* 삼강성(三江省,지금의 흑룡강성 합강지구)
 
19) 다뎬즈링/대전자령전투에 대해서는 황민호, 「한국독립군의 성립과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과 대전자령전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76~78쪽 및 이준식, 「항일운동사에서 대전자령전투의 위상과 의의」, 「한국독립운동과 대전자령전투」 ; 황민호, 「백산 지청천의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 「군사연구」 138집, 2014 ; 이규채 지음(박경목 엮음), 「이규채 기억록」 , 일빛, 2019 등 참조.
 
20) 장세윤,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독립기념관, 1989, 353~355쪽.
 
21) (조경한/趙擎韓), 「한국독립군과 중국의군항일기실(韓國獨立軍與中國義軍抗日記實)」, 「혁명공론(革命公論)」 4호(號), 남경(南京) : 혁명공론사(革命公論社), 1934, 71-72쪽. 대전자령전투의 전과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없지 않다. 중국 연변대 박창욱 교수는 중국 측 자료를 토대로 대전자령 전투시 전과가 중국구국군 리옌루/이연록 부대의 관련 사실을 착각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박창욱, 「동북지역 한민족 독립운동사 관련 사료정황」,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8, 2002, 305~307쪽 참조).
 
22) 조경한, 「백강회고록」, 한국종교협의회, 1984, 131쪽 및 지헌모, 「청천장군의 혁명투쟁사」 , 삼성문화사, 1949, 145쪽.
이와 달리 채근식의 「무장독립운동 비사(秘史)」, 대한민국 공보처, 1949, 179쪽에는 군복이 3만착, 담요 300장이라 하였고, 애국동지원호회(편), 「독립운동사」 , 1956, 279쪽에는 박격포 5문, 군량·문서·군용품 등이 20여 마차, 평사포가 3문이라고 되어 있다.
 
23) 「피란민 호송중의 대참사 천육백여명 거처 불명 사상자 30, 병사자도 40」, 「동아일보」 1933.7.9.(석간). 2면.
 
24) 「라자구(羅子溝) 피난민중 일천륙백명 사산(四散), 토병(土兵)의 습격으로 30명 사상, 행방불명도 오십명」 조선일보(1933년 7월 9일자
 
25) 「라자구(羅子溝)의 피난민, 도중에 습격되여, 30명 사상, 1,600명 사산(四散)」,「조선중앙일보」 1933년 7월 9일자.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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