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712725 (중부)
http://www.namdo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31763 (남도)

고구려, 서부방어선 최전방..수.당 여섯번 침공
역사의 숨결어린 요동 - 고구려 유적 답사기행 <50>
중부일보 승인 2011.01.31  남도일보 승인 2012.12.30 15:32

서부 변강의 요충지 신성 ③

서기 613년 隋 대군이 신성 포위 공격하자 장기전으로 맞서
唐도 645년부터 5차례 쳐들어와…피비린내 나는 ‘대격전지’
이적이 667년 인근 16개 성 모두 빼앗고 고구려 668년 멸망

신성은 고구려 서부지역의 교통중추이자 중요한 전략거점으로 수·당으로부터 여섯번이나 침공을 받았다. 사진은 신성 북벽 바깥 전경.


신성은 고구려 서부지역의 교통중추이자 중요한 전략거점이다. 여기서 서쪽으로는 후성(侯城: 현재의 심양)이나 금산성(석대자산성)을 지나 요하 서쪽 기슭에 있는 고구려의 요서전초(遼西前哨) 무려라(수나라가 손에 넣은 후 통정진<通定鎭>이라고도 부름, 현재 신민시 요빈탑<新民市遼濱塔>지역)에 갈 수 있고, 남쪽으로는 개모성(蓋牟城: 현재 심양시 소가둔<蘇家屯>에 있는 탑산산성)을 거쳐 요동성과 그 동·남 양쪽에 있는 안시성, 건안성, 백암성 등 산성으로 갈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남소성(최진보산성), 연진성(청룡산산성)과 부여성(철령 성자산산성)으로, 동쪽으로는 목저성(신빈현 오룡산산성)을 거쳐 고구려의 남도(南道)나 북도(北道)를 통해 두 번째 도읍 집안(集安)의 국내성으로 갈 수도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신성은 서북쪽의 금산성과 남소성, 서남쪽의 개모성과 요동성과 서로 호응하고 지원할 수 있는 고구려 서부방어선을 이루고 있다. 신성의 이런 중요한 지리위치와 군사역할로 말미암아 고구려가 요서지방으로부터 요하를 건너 쳐들어오는 침공을 당할 때마다 신성은 가장 먼저 공격받는 목표물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신성은 피비린내 나는 세례를 겪어야 했다. 사서의 기록과 기타 역사자료에 의하면 신성은 수나라와 당나라의 공격을 선후로 여섯 번이나 받았다. 그중 수나라 때 한번이고 당나라 때 다섯 번이다.

제3차 여·수(麗隋)전쟁 시기 기원 613년 5월 중순, 사전에 만단의 준비를 거친 수나라군의 주공부대가 요동성에 이르러 포위태세를 갖추기 시작할 무렵에 수나라 장수 왕인공(王仁恭)이 거느린 전군(前軍)의 선두부대는 요하를 건너 혼하(渾河) 하곡을 따라 동북진하여 고구려의 신성을 공략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 당시 고구려의 신성은 제2차 여·수 전쟁 무렵에 무려라의 감시소를 폐쇄한 이후 서북변경의 가장 중요한 군사거점으로서 국경감시의 임무도 겸하고 있었다. 수나라의 재침략 가능성을 감안하여 고구려는 사전에 신성의 병력을 크게 강화하였고, 수나라는 이를 주목하여 선제공격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수나라는 주공부대가 요동성 공격에 주력하기 위해서는 신성의 고구려군을 제 곳에 고착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수양제는 왕인공의 군사들로 하여금 이를 먼저 포위 공격하도록 하였다. 왕인공의 군이 신성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는 첩보를 받은 고구려군 수뇌부는 성을 의지한 수세적인 작전보다는 출성하여 성을 등진 채 적과 일전을 치르는 공세적 작전이 더 효과적인 대응방법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이리하여 고구려군은 신성밖에 전투대형을 갖추고 쳐들어오는 적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치하여 결전의 시기만을 기다렸다. 왕인공 군사들의 선제공격으로 두 나라 군 사이에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왕인공은 정예 기병으로 전투부대를 새로 편성하여 보병이 위주로 된 고구려군의 진영(陣營)으로 마구 쳐들어갔다. 수나라 기병의 뛰어난 기동작전에 진지가 혼란해진 고구려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성 안으로 후퇴하였다. 신성 밖의 초전(初戰)에서 수나라군의 공세에 성 안으로 밀려간 고구려군은 그 후로 성문을 굳게 닫고 수나라군과의 정면대결을 회피하며 장기적인 수성작전으로 적군의 예기를 둔화시키려 하였다. 이러자 왕인공의 군사들은 신성을 포위하고 신성과 주변지역의 연락을 차단하였다. 이리하여 수나라군은 애초의 목표대로 신성의 고구려군을 고착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국의 강유동(姜維東)이 저술한 《당려전쟁사(唐麗戰爭史)》에 당나라가 신성을 선후로 다섯 번 공격한 데 대하여 서술해 놓았다. 그 중에 조금 구체적으로 기재된 것이 4차례다.

무순 옛 성 모습.

첫 번째는 제1차 당·여(唐麗)전쟁 시기 이적이 신성을 공격한 상황이다. “(기원 645년) 3월 24일, 태종은 주력군을 거느리고 정주(定州)를 출발했다. … 이때 이적은 선두부대를 거느리고 공세를 펼쳤다. 그의 임무는 요수(요하)를 건너 곧바로 신성으로 쳐들어가 신성과 요동성의 연계를 차단하고 요동성에 대한 동북쪽의 지원군을 막아내어 주력군이 요동성을 함락하는 데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이적이 유성(柳城: 지금의 조양<朝陽>)을 출발해 회원진(懷遠鎭, 즉 현재의 요중<遼中>)으로 해서 요수를 건널 듯한 자세를 취하다가 도중에 한 갈래의 소분대(小分隊)만 보내어 깃발을 많이 펼쳐들고 회원진으로 움직이게 하고 주력군은 깃발을 거두고 은밀히 소로(小路)로 더 나아가 요택(遼澤: 요하 하곡지대의 넓고 긴 습지) 북쪽지역에서 강을 건너려 했다. 이적의 기만전술은 과연 효력을 보았다. 적군(고구려군)은 소수의 군사로만 소로를 지키고 있었다. 4월 초하루, 이적은 통정진에서 순조롭게 요하를 건너 하루 동안 급행군을 해서 신성 근처의 현토성에 이르렀다. 당나라군이 뜻밖에 갑자기 나타나자 신성의 고구려군은 놀란 나머지 성문을 모두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다. 5일, 요동도 부대총관 이도종이 수천 기병을 거느리고 신성으로 달려왔는데 절충도위(折沖都尉) 조삼량(曺三良)이 기병 수십 명을 이끌고 성문 앞에서 싸움을 걸었다. 사실 이는 이적과 이도종의 책략일 뿐 그들의 진정한 목표는 개모성(蓋牟城, 즉 심양의 탑산산성)이었다. 왜냐면 신성은 고구려 서부 변강지역의 중요한 전략거점으로 군사들이 많고도 정예한데다 성곽도 난공이수할 뿐만 아니라 멀지 않은 곳에 개모성 등 위성 성들이 호위하고 있기 때문에 무작정 공격을 가한다면 자기네 군사들이 대량으로 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정말 그렇게 된다면 당 태종의 전반 전략에 어긋나게 된다. 신성과 가까이 있는 개모성은 성곽이 험요하다고는 하지만 당나라군을 놓고 말하면 개모성을 먼저 치는 것은 병력 손실이 훨씬 적을 수 있다. 게다가 개모성을 치는 데 주요한 애로는 신성에서 오는 지원병을 막는 것이지 개모성 자체의 수비군을 소멸하는 것이 아니므로 신성의 지원군만 제압하게 된다면 개모성은 쉽게 취할 수 있다. 일단 개모성이 함락되면 신성의 예기는 자연적으로 한풀 꺾이게 될 뿐만 아니라 신성에서 요동성을 지원하는 길도 차단할 수 있었다. 수나라군의 개모성 공격은 15일부터 시작되어 꼬박 열이틀이 걸려 26일에야 개모성을 취하게 되었다. 그동안 당나라군은 신성에서 줄지어 오는 지원병을 격퇴하는 동시에 개모성을 공격하느라 격전을 벌였는데 그 치열한 정도는 가히 상상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당나라군의 공성 무기를 제조한 이름난 장수 강행본(姜行本)도 전사했다…개모성 전투에서 당나라군은 2만여명을 포로로 잡고 식량 10여만 섬을 얻게 되었다.…개모성을 함락한 후 이적은 군사를 이끌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렀다.”

옛날 신성 주변의 모습

두 번째는 당 영휘(永徽) 5년(기원 654년) 가을에 당나라에 예속된 거란군이 신성 부근에서 벌인 싸움이다. 당나라가 요동성을 함락한 후 일부 한족군사들을 남겨 그곳을 수비하게 하는 외에 이미 손 안에 넣은 동북지역 소수민족의 무장역량을 이용하여 고구려가 제 땅을 찾는 반격에 대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연개소문이 잃어버린 요동지방을 수복하려고 파견한 장수 고고(高固)가 거느린 고구려와 말갈족 병사들이 신성에서 송막도독 이굴가(松漠都督 李窟哥)가 이끄는 거란군과 맞붙어 싸우게 되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활을 잘 쏘았고 거란군은 기마전에 뛰어났다. 이날 하늘이 고구려를 돕지 않았다. 세차게 불어제치는 서풍이 고구려군이 쏜 화살 비를 막아버려 고구려군사들은 당황해 났는데 바람을 타고 온 거란의 기병들이 사납게 덮쳐들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런데 거란군이 또 불을 놓아버렸다. 고구려군사들은 바람을 타고 번지는 불에 휩싸여 사상자가 수두룩했다. 이굴가는 고구려군의 시신으로 경관(京觀, 옛날에 승전을 경축하기 위해 사살된 적군의 시신으로 돈대처럼 쌓아올린 것)을 쌓고 첩보를 올려 당고종의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세 번째는 당 영휘(永徽) 6년(기원 655년), 영주도독이자 동이도호인 정명진(營州都督, 東夷都護程明振)과 좌중위중랑장 소정방(左中衛中郞將 蘇定方)이 신성을 친 사실이다. 이해 5월 13일, 정명진과 소정방이 1만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신성으로 달려왔다. 신성의 고구려군은 당나라 군사들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을 알고 성문을 열고 귀단수(혼하)를 넘어 맞받아 나갔다. 그 결과, 고구려군이 패하여 쫓기었다. 바싹 추격당해 성 안으로 도망가던 고구려의 일부 군사들은 신성의 천연해자인 귀단수도 건너지 못하였다. 이번 싸움에서 죽거나 포로가 된 고구려군은 1천여명이나 되었다. 정명진과 소정방의 군은 신성 외곽과 부근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돌아갔다.

봄이 찾아온 신성 옛터의 모습.

네 번째는 당 건봉(乾封) 2년(기원 667년), 고구려 때 신성에서의 마지막 전쟁이다. 그해 2월, 이적이 요하를 건너 신성에 이르자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방의 요지로서 만약 이 성을 먼저 함락하지 않는다면 다른 성은 취할 수 없소.” 이리하여 이적의 군은 주변의 산성을 하나하나 격파시키는 전략을 취하여 먼저 신성을 포위 공격하는 동시에 신성과 외부와의 연락을 모두 차단했다. 이렇게 2월부터 9월까지 시간을 끌게 되자 성 안에는 양식과 무기가 다 떨어지고 사상자가 많이 났다. 그리하여 9월 24일에 성 안에서 사부구(師夫仇)가 성주를 결박하고 성문을 열어 투항했다. 이적이 승세를 몰고 계속 진격하여 인근 16개 성을 모두 빼앗았다. 그 후 그는 곧바로 국내성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또 오골성으로 쳐들어갔다… 그 이듬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장광섭/중국문화전문기자  윤재윤/요령조선문보기자


관련글 

신성 목록  https://tadream.tistory.com/20296?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