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에 숨긴 진짜 코드, 봉준호는 천재다!
[게릴라칼럼] 영화 <설국열차>를 통해 본 2012년 대선과 민주주의
13.08.13 20:24 l 최종 업데이트 13.08.14 21:42 l 이종필(ststnight)
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봉준호 감독의 신작 <설국열차>의 흥행몰이가 뜨겁다. <설국열차>는 천재감독으로 추앙받는 봉준호의 작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많은 주목을 받았다. 영화가 개봉한 뒤에는 그 내용과 결말을 놓고 무수한 갑론을박을 만들어 내면서 그것이 다시 영화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확실히 <설국열차>는 관객들이 뭔가 말을 뱉어내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람들이 영화를 본 뒤 하고 싶은 말이 많아지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영화에 투영된 현실이 그만큼 적나라했기 때문이다. 영화 <설국열차>에서는 꽁꽁 얼어붙은 지구에서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간들이 하나의 열차 안에서 생존과 번식을 이어가며 그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낸다. 이 열차는 말 그대로 지금 인류사회의 축소판이다. 열차의 앞칸과 뒷칸은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다.
신성불가침이 된 '성장 엔진'
▲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를 보는 내내 나의 심장을 파고 든 하나의 단어는 바로 '엔진'이었다. 앞칸의 지배자들은 엔진이 멈춘다면 모두들 얼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는 곧 멈추지 않는 엔진과 기차를 만들고 그것을 계속 돌아가게 하고 있는 윌포드에 대한 경의와 우상화로 이어진다. 지금의 지배체제를 거슬러 반란을 일으킨 7명은 열차를 탈출했다가 얼마 못 가서 곧바로 얼어 죽었다. 그 현장은 기차 속 학생들에게 산교육의 장이 되고 있었다.
"엔진이 멈추면 모두 죽는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영화에서 들려오는 이 외침마다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익숙한 구호 하나가 거의 본능적으로 떠오르지 않았을까 싶다.
"성장 엔진이 멈추면 모두 죽는다."
먹고 살 것이 없는 우리나라는 수출을 통해 성장을 해야 하고, 일단 그렇게 파이를 키워야 모두가 조금씩이라도 나눠 먹을 수 있다는 성장우선론은 박정희 시대 이후 아직까지도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설국열차 안에서는 멈추지 않는 엔진이 모든 가치에 우선한다. 다 얼어서 죽느니 차라리 이런 불공평하고 부당한 체제라도 받아들이는 게 낫지 않느냐, 지금의 질서가 무너지면 기차는 멈추고 모두 죽는다는 논리는 지금 한국사회의 지배논리와 너무나 닮았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쿠데타도 할 수 없고 긴급조치도 웬만큼은 참을 수 있는 것 아니냐, 민주주의라는 거 잠깐 좀 유보한다고 당장 죽는 건 아니지 않느냐, 체제가 불안정해지면 북한이 언제 우리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상황 논리는 박정희의 군사반란과 연이은 삼선개헌 및 유신개헌을 뒷받침해왔고 마침내 그의 딸까지 대통령의 권좌에 올려놓았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성장 엔진'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은 모두 부정한 것으로 간주해 왔다. 대기업이 잘 돼야 국민경제가 살아난다는 논리가 대표적이다. 그 덕에 대기업은 블랙아웃이 걱정되는 이 폭염 속에서도 여전히 헐값으로 공장을 돌리고 있다. 경제가 어려우면 경제가 어렵다고, 경제가 나아지면 지금일수록 경쟁력을 더 강화해야 한다며 언제나 '성장 엔진'은 신성불가침의 보호를 받아왔다. 호경기든 불경기든 일반 국민들의 경제상황이 정책의 우선순위에 오른 적인 한 번도 없었다.
이 모든 논의의 결론은 <설국열차>의 메이슨 총리가 내뱉는 하나의 구호로 모아진다.
"자기 자리를 지켜라."
언뜻 보기에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외침은 현실의 대한민국에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키려 했고 종국에는 죽음에까지 내몰았다. 한국의 보수 세력은 애초에 노무현과 권양숙을 대통령과 영부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릿속에서는 대통령과 영부인이라는 자리가 감히 상고 출신에게 허용되는 게 아니었다. 선거 관련 발언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보다 훨씬 더 창조적인 건수로 노무현을 탄핵하려 했을 것이다.
모두가 출신에 따른 자기 자리만 지키는 사회는 마치 혈액이 멈춘 몸과도 같아서 오래지 않아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도 제국 내 계층 간의 이동이 꽉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IMF 이후 한국사회는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며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지 않는 사회가 돼 버렸다. 2013년의 현실도 여기서 크게 나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주장은 거짓이었다.
'거짓'은 영화 <설국열차>를 본 뒤 내 가슴에 남은 유일한 단어였다. 열차의 보안설계자인 남궁민수(송강호)는 열차 바깥의 설국세상이 조금씩 녹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의 딸 요나(고아성)는 열차 밖에서 북극곰을 목격하게 된다. 북극곰이 살 수 있다면, 그 옛날 7인의 반란을 이끌었던 이누이트도 이제는 생존할 수 있지 않을까?
북극곰의 출현은 "엔진이 멈추면 모두 죽는다"는 주장이 공갈 협박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엔진이 멈춘다고, 열차 밖으로 나간다고 모두 죽는 게 아니었다! 현실에서는 과연 어떨까? "성장 엔진이 멈추면" 우리는 모두 죽는 것일까?
대기업이 잘 돼야 서민경제가 살아난다는 이른바 낙수효과론은 이미 현실에서 거짓임이 여러 차례 드러났다. MB 정부의 고환율·감세 정책으로 큰 이득을 본 재벌들은 오히려 골목상권까지 잡아먹는 한편 자기들끼리의 일감 몰아주기로 막대한 부를 챙겼다. 국민들의 혈세로 위기를 넘긴 대기업이 바로 그 국민들의 뒤통수에 칼을 꽂은 격이다.
또한 기존의 성장 엔진인 값싼 노동력은 더 이상 우리의 현실과 맞지 않는다. 싸구려 물건만 팔아서는 선진국이 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노동과 기술혁신의 정당한 대가를 인정하고 그에 맞는 가격을 지불해야만 고부가가치의 사회로 들어갈 수 있다. 고용과 기술혁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은 오래 전부터 새로운 생존의 엔진으로 주목받아왔다.
우리가 올라탄 현실의 설국열차를 움직이는 거짓말은 곳곳에 널려 있다. 원전을 더 짓지 않으면 전력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지만, 무려 5기의 원전이 멈춘 지금 우리는 사상 최대의 폭염을 그럭저럭 힘들게나마 버티고 있다. MB의 대운하는 4대강 사업으로 둔갑해 추진해 왔음이 드러났다. 이제는 거짓말의 수준도 상당히 과감해져서, 정상회담 대화록을 제 입맛대로 왜곡해서는 멀쩡한 북방한계선도 우리 스스로가 내다버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모든 것은 다 거짓이었다
▲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이틀 앞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2012년 12월 17일 오전 충남 천안 서북구 이마트 앞 유세에서 유권자와 지지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다. 이날 천안 유세에서 박근혜 후보는 전날 경찰의 '국정원 여직원 댓글의혹 사건'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언급하며 "그 불쌍한 여직원은 결국 무죄"라며 "그런데도 민주통합당은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인권 유린에는 말이 없다"고 공세를 취했다. ⓒ 유성호
그러나 지금의 정국을 움직이는 가장 큰 거짓말은 지난 대선 당시 국정원 여직원의 댓글 사건이 발생했을 때 박근혜 후보가 "그 불쌍한 여직원, 결국 무죄라는 것입니다"라며 섣불리 국정원을 두둔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수사기관이 밝힌 것만 해도 '그 불쌍한 여직원'은 '결국 유죄'일 뿐만 아니라 국정원의 선거개입이 국정원장의 지시 하에 일사불란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졌고, 이 사실은 당시 대통령의 인지 하에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경찰 수뇌부는 증거인멸과 축소수사를 획책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무슨 근거로 그 여직원의 무죄를 확신했을까? 국정원의 선거개입으로 공정성이 의심받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앞장서서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해야 하지 않았을까? 최근 논란이 일었던 세제 개편안은 불과 나흘 만에 원점에서 재검토하라고 지시했으면서 왜 국정원의 중대범죄사안에 대해서는 취임 6개월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우리가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사안은 지난 대통령 선거 자체가 아닐까?
영화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난 겨울 국정원의 농간 때문에 원하지 않는 열차에 올라탄 셈이다. 이것은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더욱 불행한 일은 그렇게 강제 탑승한 열차가 새로운 유신시대로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높았던 지난 5일 박근혜 대통령은 20년 전 노골적인 선거개입으로 물의를 일으켰던 김기춘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듯이 성공한 부정선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마치 항변이라도 하는 듯한 이번 인사는 유신 잔재들의 화려한 부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근혜가 당선되면 다시 유신시대로 돌아간다던 지난 선거철의 우스갯소리가 엄연한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2012년 겨울 대한민국은 '유신열차'에 강제 탑승되었다. 엔진을 멈추거나 열차를 벗어나면 모두가 죽는다는 협박이 다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나마 이렇게 일용할 양갱(단백질덩이)이라도 얻어먹는 것은 모두가 그 위대한 분과 지금의 질서 때문이라는 '세뇌'는 모든 언론매체를 타고 열차 안에 울려 퍼진다.
그러나 성장의 '엔진'이 멈추어도 우린 얼어 죽지도 굶어죽지도 않는다. 우리는 새로운 생존의 수단을 찾을 수 있다. 열차를 벗어나도 우리는 얼어 죽지 않는다. 지난 대선이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그냥 계속해서 이렇게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푸념들이 곳곳에서 들린다. 이것은 아마도 '앞칸 사람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대선불복은 결코 아니라는 야당 인사들의 주장 속에서, 윌포드와 밀거래를 하고 있었던 길리엄을 떠올리는 건 나뿐일까?
우리가 기만과 거짓과 압제로 가득한 '유신열차'를 계속 타고 가야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그것이 옳지 않은 길이라면, 과감하게 열차의 문을 부수고 탈출하든가 기차를 멈춰야 한다. 적어도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남궁민수의 판단과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설국열차>의 바깥에는 북극곰이 살고 있었다. 엔진이 멈추어도, 열차를 벗어나도 얼어 죽지 않을 수 있다. '유신열차'의 바깥에 무엇이 있을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를 위협해 온 대선불복이라든지, 정국혼란이라든지, 안보위기라든지 하는 틀에 박힌 클리셰(고정관념)는 모두 새빨간 거짓말임은 확신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해보는 '헌법정신'
▲ 촛불의 바다에 띄운 '민주주의' 10일 오후 서울시청앞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규탄 제6차 범국민대회가 열린 가운데 촛불을 든 수만명 시민들이 '민주주의'가 적힌 대형현수막을 펼쳐들고 있다. ⓒ 권우성
부정한 선거에 불복함은 현행 헌법정신이기도 하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분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으나 민주주의와 상식을 원하는 국민들에게는 오히려 혼란을 정리하고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안보위기를 초래한 당사자는 멀쩡한 북방한계선을 정략적인 이해 때문에 마치 포기된 것처럼 떠들고 다녔던 국정원과 일부 정치인들이었다.
우리는 영화 속 거짓말은 훤히 꿰뚫어보면서도 현실의 거짓말은 왜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거짓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면 그것이 거짓임을 인정하기가 두려울 때가 있다. 현실적으로 진실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공포심 때문이다. 지난 대선은 국가 정보기관이 정상회담 대화록을 왜곡하고 조직적인 전담팀을 꾸려 여론조작에 나서 선거에 개입한 불법관권선거였다.
이렇게 치러진 선거가 원천무효임을 우리 모두는 심정적으로 또 상식적으로 다 느끼고 있다. 그러다가도 현실로 고개를 돌리면 그래서 다시 선거를 하자는 것인가, 박근혜 대통령의 거취는 어떻게 하나 하는 문제들이 함께 얽혀들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감으로 우리를 짓누른다. 이왕지사 이렇게 탑승한 '유신열차'를 멈추거나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것은 어쩌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바로 그 공포심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현대사, 멀게는 기미 독립선언운동에서부터 4.19, 그리고 1980년 5월 광주와 1987년 6월이 이를 증명한다. 지금 우리 헌법이 이 정신을 헌법의 전문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012년 12월, 대한민국은 잘못된 열차에 강제로 탑승했다. 이제 그 열차를 멈출 때가 되었다.
ps. '유신열차'에 올라탄 덕분에, 문득 자기 손에 더 많은 양갱(단백질덩이)이 쥐어져 있다고 기뻐하는 분들은 영화를 보지 말기 바란다. 양갱의 원재료가 뭔지 알게 되면 아마도 그 기쁨은 분노로 바뀔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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