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봉오동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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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군부대들의 국내진입 유격전에서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수비대는 1920년 6월 초에는 불법으로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영토인 간도에까지 들어가서 독립군에 대한 추격을 시작하였다.
 
독립군 1개 소대가 허롱/화룡현(和龙县/和龍縣) 위에신/월신강(月新江) 산툰즈/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서 1920년 6월 4일 새벽 5시에 함경북도 종성군(鍾城郡)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하여 일본군 헌병(憲兵) 군조(軍曹) 복강(福江 ; 후꾸에)이 인솔한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하고 귀환한 소규모 유격전이 있었다. 이에 일본군 남양(南陽) 수비대장 신미(新美 ; 니이미)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 1개 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중국 간도에 철수한 독립군을 추격해서 삼둔자에 이르러 무고한 한국 이주민 민간인을 학살하고 계속 독립군을 추격 했으나, 독립 군은 일본군을 삼둔자 서남방에서 잠복하여 기다리고 있다가 이를 섬멸하여 버렸다.註 009 이것이 ‘삼둔자전투’로서, 일본군이 처음으로 두만강을 불법 월강하여 간도까지 독립군을 추격했다가 패전한 소규모 전투였다.
* 군조(軍曹) : 일본 육군 하사관 계급. (우리나라의 중사에 해당)
 
함경북도 나남(羅南)에 사단 본부을 두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이 패전에 크게 분개해서 안천(安川 ; 야스카와) 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대대(越江追撃大隊)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간도에까지 들어가서 독립군을 ‘섬멸’하고 돌아오도록 명령하였다. 일본군 제19사단 야스카와/안천 추격대대는 간도에 들어오자 안샨/안산(安山) 후방 고지에서 독립군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허롱/화룡현 펑우동/봉오동(鳳梧洞/凤梧洞)까지 독립군을 추격해 왔다.註 010
 
그러나 독립군측은 이에 바로 앞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라는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간도의 한국인 교민을 망라하여 조직한 강력한 교민단체인 대한국민회는 그 직속 독립군부대로서 안무(安武)가 지휘하는 국민회군(정식 명칭 대한국민회 국민군/大韓國民會 國民軍)을 편성하고 있다가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독립군과 연합하였다. 홍범도는 나아가서 최진동(崔振東)이 지휘하는 독립군부대인 군무도독부와의 군사통일도 강력히 주장하여 노력한 결과 그 연합이 가능하게 되었다. 일제의 정보자료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간도지방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수괴 홍범도는 일찌기 한족독립운동기관의 통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보고한 대로이나 그 후 일부의 요해가 있었을 뿐으로서 각 단체가 임의의 행동을 집행하고 있었는데, 최근에 홍범도를 수령으로 하는 의군단 및 최명록(崔明祿 ; 최진동/崔振東의 다른 이름-필자)을 수령으로 하는 도독부는 서로 합체하기로 하고 그 명칭을 군무도독부로 호칭하기로 했다고 한다.
* 요해 : 깨달아 알아냄?
 
그 결과 과반 온성군 국경 방면에 있어서도 의군단원 및 도독부 대원은 서로 함께 국경침입 행동을 하기에 이른 것 같다.註 011
 
이러한 군사통일의 노력에 의하여 1920년 5월 28일에는 대한독립군·국민회군·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고,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인 화룡현 봉오동에 병력을 집결시켰다. 대한북로독군부의 간부진은 다음과 같았다.註 012
 
대한북로독군부
부장(府長) : 최진동(崔振東)
부관(副官) : 안무(安武)
 
북로제일군사령부
부장(部長) : 홍범도(洪範圖)
부관(副官) : 주건(朱建)
참모(參謀) : 이병채(李秉埰)
향관(餉官) : 안위동(安危同)
군사국장(軍務局長) : 이원(李園)
군무과장(軍務課長) : 구자익(具滋益)
회계과장(會計課長) : 최종하(崔鍾夏)
검사과장(檢査課長) : 박시원(朴施源)
통신과장(通信課長) : 박영(朴英)
치중과장(輜重課長) : 이상수(李尙洙)
향무과장(餉務課長) : 최서일(崔端日)
피복과장(被服課長) : 임병극(林炳極)
제1중대장 : 이천오(李天五)
제2중대장 : 강상모(姜尙模)
제3중대장 : 강시범(姜時範)
제4중대장 : 조권식(曺權植)
제2중대 제3분대장 : 이화일(李化(花)日)
 
대한북로독군부의 성립에 있어서는 봉오동에 거대한 토지와 재산을 가지고 있던 최진동의 3형제가 가산을 모두 독립군에 헌납하여 막대한 군비를 조달한 것이 결정적인 기반이 되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간부 구성을 보면, 이것은 정치(행정·재정·군에 대한 감독 등)와 군사를 나누어, 북로독군부의 대표와 정치의 총책임자는 최진동이 맡고, 그 부책임자는 안무가 맡았으며, 군사의 책임자는 홍범도가 맡은 체제로 되어 있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성립으로 봉오동 골짜기와 그 주변 산에는 약 700~900명의 독립군이 집결하여 주둔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이흥수(李興秀)가 인솔하는 약 60명의 신민단 독립군도 합세하여 봉오동에 머물고 있었다.註 013
 
대한북로독군부가 이러한 통합독립군부대를 편성하여 봉오동 일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일본군 19사단의 야스카와/안천추격 대대가 독립군을 추격하여 봉오동 골짜기까지 찾아들어온 것이다. 대한북로독군부부장 최진동과 시령부장 홍범도는 일본군 1개 대대가 독립군 소부대를 추격하여 봉오골에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이를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봉오골의 주민들을 대피하도록 하여 빈 마을을 만든 후에 제1중대장 이천오는 중대원을 인솔하고 봉오골 윗마을 서북단에, 제2중대장 강상모는 동산(東山)에, 제3중대장 강시범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은 서산 남단에 매복하여 기다리게 하고, 사령부장 홍범도 자신은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북 북단에 매복하였다. 또한 홍범도는 군무국장 이원으로 하여금 본부 병력 및 잔여 중대를 인솔하고 서북 산지에서 탄약과 식료를 공급하면서 만일의 경우에 퇴로를 확보하도록 하였다.
 
사령부장 홍범도는 북로독군부의 전 독립군에게 일본군의 본대가 독립군의 포위망 안에 완전히 들어올 때까지 미동도 하지 말고 매복해 있다가 사령부장의 발포 신호에 따라 일제사격으로 총공격을 가해서 일본군을 섬멸해 버릴 것을 명령하였다.
 
또한 사령부장 홍범도는 제2중대 제3소대 제1분대장 이화일에게 약간의 병력을 주어 가오리링/고려령(高丽岭/高麗嶺) 북쪽 1,200미터 고지와 그 북쪽 마을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척 하면서 일본군을 포위망 안으로 유인해 오도록 하였다.註 014
 
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이 완벽한 포위망을 쳐놓고 기다리고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1920년 6월 7일 오전 6시 30분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 도착하여 전위중대(前衛中隊)를 내보내었다. 독립군 이화일분대는 이를 맞아 유인하기 위한 교전을 한다는 것이 너무 용감히 싸워서 일본군 전위중대가 참패를 하고 퇴각해 버렸다. 일본군 월강추격대대 본대가 여기서 돌아갔으면 봉오동전투는 없었을 것이나, 일본군은 북로독군부의 독립군 병력이 막강한 것을 알지 못하고 대오를 정돈하여 같은 날 11시 30분에 봉오동 골짜기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척후병이 오후 1시에 독립군의 포위망 안에 도착해도 이를 통과시켜 주자 일본군 본대는 안심하고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깊숙히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사령부장 홍범도는 공격 명령의 신호 총성을 울리었다.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3면에서 정확히 조준을 하고 있다가 맹렬한 집중사격을 가하니 일본군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신곡(神谷 ; 카미야)중대와 중서(中西 ; 나카니시)중대를 전면에 내세워 필사의 응전을 하고 기관총 중대까지 난사를 했으나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어서 정확한 조준을 할 수 없었으므로 막대한 희생자를 내었다. 일본군은 포위망 안에서 3시간을 응전하다가 사상자가 격증해 가자 더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강상모가 지휘하는 독립군 제2중대는 도주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또 다시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완전히 참패하여, 일본군측 자료에 의하면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봉오동에 남아있던 어린이 등 한국인 민간인 16명을 학살한 다음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갔다.註 015
 
이것이 독립군의 ‘봉오동전투’이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에 의하면, 이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을 내고 완전히 참패하였다.註 016 한편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의 경미한 것이었다.註 017 독립군은 봉오동전투에서 대승리를 쟁취 한 것이었다.
 
봉오동전투에 대하여 중국신문『상해신문보(上海新聞報)』는 일본군이 독립군에게 대패하여 150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독립군은 160정의 소총과 3정의 기관총을 노획했고, 일본군은 이 패전 후에 중국의 허롱/화룡현이 관할하는 치아/흡강(洽江)의 도구(渡口)의 통행을 금지하고 있다고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 도구(渡口) : 강이나 내, 또는 좁은 바닷목에서 배가 건너다니는 일정한 곳.
 
6월 6일 밤에 일본군 수 명이 강을 건넜다가 독립군에 체포되어 그 중 5명이 죽었다. 대안의(일본군) 대대는 이 전투의 소식을 듣고 모두 강을 건너 사격을 개시했으나 뜻밖에 독립군이 산길을 모두 잘 알고 4로에 잠복하여 기습공격을 했으므로 일본군은 대패하였으며, 당시 전사자가 150 명, 부상자가 수십 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강을 건너 도주하였다. 이번의 전쟁에서 소총 160정, 기관총 3정 수창(手鎗) 수 개를 노획하였다. 일본군은 이번의 실패 후에 장차 우리의 허롱/화룡현이 관할하는 치아/흡강의 도구의 통행을 모두 봉금(封禁)하고 교통을 끊을 것이라고 한다.註 018
* 봉금(封禁) : 일정한 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음
 
상해(上海) 임시정부의『독립신문(獨立新聞)』도 독립군의 봉오동전투에서의 대승을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註 019 간도의 대한국민회도 통고문 호외(號外)를 발행하여 각 지회를 통해서 이 지방 한국인들에게 한국 독립군이 봉오동전투에서 대승을 쟁취했음을 널리 알리고 이것이 독립전쟁의 본격적 시작이므로 그에 대한 준비를 강화할 것을 촉구하였다.註 020
 
 
 
 
註 009 『독립신문(獨立新聞)』(제88호/第88號), 1920년(年) 12월(月) 25일자(日字),「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참조.
 
註 010  「전보(電報)」제(第)166호(號)(발신/發信 사카이 총영사 대리/堺總領事代理, 수신/受信 우치다 외무대신/內田外務大臣), 1920년(年) 6월(月) 15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608 참조.
 
註 011  「의군단 및 도독부의 활동에 관한 건(義軍團及都督府ノ活動ニ關スル件)」, 1920년(年) 4월(月) 8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346.
 
註 012  「국민회제령(國民會制令)」국민 제37호(國民 第37號), 1920년(年) 5월(月) 28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p. 80~81 ;『독립신문(獨立新聞)』, 1920년(年) 12월(月) 25일자(日字),「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 참조.
 
註 013  「기밀 제59호(機密 第59號), 쥐즈지에/국자가분관주임부명서(局子街分館主任復命書)」, 1920년(年) 7월(月) 3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 pp. 636~639 참조.
 
註 014  『독립신문(獨立新聞)』, 1920년(年) 12월(月) 25일자(日字),「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 참조.
 
註 015  「전보 암호 제952호(電報 暗號 第952號)」, 1920년(年) 7월(月) 6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 p. 609 참조.
 
註 016  『독립신문(獨立新聞)』, 1920년(年) 12월(月) 25일자(日字),「북간도(北墾島)에 재(在)한 아독립군(我獨立軍)의 전투정보(戰鬪情報)」 참조.
 
註 017  주 16)과 같음
註 018  『상해신보(上海新聞報)』, 1920년(年) 6월(月) 27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 p.617.
 
註 019  『독립신문(獨立新聞)』(제85호/第85號), 1920년(年) 6월(月) 22일자(日字),「독립군승리(獨立軍勝利)」;『독립신문(獨立新聞)』(제86호/第86號), 1920년(年) 6월(月) 24일자(日字),「독립군연전연승(獨立軍連戰連勝)」참조.
 
註 020  「호외(號外)」, 1920년(年) 6월(月) 10일자(日字), 강덕상 편(姜德相編), 앞 책, pp. 615~616 참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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