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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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첫 의병봉기와 시련
 
2. 단독 의병활동
 
류인석 의병부대에 합류하여 같이 싸우다가 패전하고 피신한 홍범도는 또 정처 없는 방랑의 신세가 되었다. 그는 생계유지를 하며 적당한 기회가 오면 의병활동을 계속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려고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만 다수의 대중들을 설득하여 의병봉기를 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1896년 후반기에 황해도 곡산군 하도면(당시에는 영풍으로 불리웠음)에 있는 널귀 금광으로 가서 자기 신분을 숨기고 광산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동쪽으로 박달재를 넘으면 함경도 문천과 원산이 바로 코앞이었다.
 
1896년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거처를 옮겨간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당시 조선의 주요 광산은 대부분 미국·러시아·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열강의 이권쟁탈전 결과에 따라 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은 그해 평안도의 운산(雲山) 금광을, 러시아는 함경도의 경원과 경성 일대의 광산채굴권을, 또 영국은 1900년에 평안도의 은산 금광을, 독일은 1896년에 강원도 금성의 당현(堂峴) 금광 채굴권을, 일본은 1900년 황해도 송화와 장연의 금광 및 은율·재령의 철광 채굴권을 조선정부로부터 획득했던 것이다. 특히 일본은 오래 전인 1882년부터 벌써 함경도 단천의 사금장 채굴권을 빼앗았으니 이러한 사례만 보더라도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이 얼마나 수탈에 열을 올렸던가 그리고 조선정부가 얼마나 무능했던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범도(홍범도)가 이때 일하게 된 금광은 워낙 산골에 있어 아직 일본의 침탈을 받지는 않았지만 원산이 가까웠으므로 일본인들의 주목을 받아 가끔 일본인들이 찾아와 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광산노동자들의 생활은 극도로 비참했으며 작업도구도 원시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작업환경도 매우 위험해서 일하면서 죽거나 다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들의 임금 또한 매우 낮아서 겨우 하루하루를 연명하기에 급급한 형편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노동자들이 가끔 휴식을 취할 때면 의병에 관해 이야기하였으며 은연중에 반일사상을 고취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홍범도가 이 금광에서 몇 달간 일했을 때 그의 신분은 결국 노출되고 말았다. 같이 일하던 광부가 그를 밀고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일본군에 붙잡힐 뻔했으나 가까스로 탈출하여 도망하였다. 기존의 논문이나 저서에 홍범도가 단천에서 광산노동자로 일했다고 적고 있으나 그의 일지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황해도 곡산의 한 금광에서 일했음이 확실하다고 하겠다. 단천에는 사금장(沙金場)이 있을 뿐이고 광산에서 산출되는 금은 없다는 점을 보아도 확실하다.
 
범도(홍범도)는 광산에서 도주하여 평안남도(1896년 8월 지방관제의 개혁으로 1년 전의 23부 체제가 다시 과거의 8도 중심으로 개편되었고, 경기·강원·황해도를 제외한 각도가 남도와 북도로 나뉨) 양덕 방면으로 가는 도중 지경령이라는 고개에서 일본군 병사 세 명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지경령은 높이 약 655미터의 꽤 험한 고개였고 옆에는 해발 1,486미터의 우람한 하람산이 곡산과 양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일병들은 방심하고 천천히 저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그 일본 병정 셋을 몽땅 화승총으로 사살하고 그들이 갖고 있던 총 세 자루와 약 300발의 탄환, 그리고 쌀 등을 노획했다. 그중 총 두 자루는 후일을 대비하여 부근의 알기 쉬운 지점에 표시를 해 놓고 묻어 놓았다. 그 뒤 범도(홍범도)는 총과 양식 등을 배낭에 휴대하고 바로 옆에 있는 지경산 꼭대기에 올라가 밤을 지샜다.
 
홍범도는 이튿날 지경산을 내려와 양덕을 거쳐서 며칠 후에는 함경남도 덕원의 ‘무달사’ 라는 절에 도착했다. 그는 무달사 근처의 산간에서 지내다가 얼마 뒤에는 무달사에 상당기간을 머물며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덕원읍의 사정을 정탐하였다.
 
당시 덕원읍에서는 좌수로 있는 전성준이란 자가 친일파로 악명이 높았다. 이에 홍범도는 전성준을 응징하여 반민족행위를 감행하는 민족반역자는 의병의 단죄를 받는다는 사실을 온 덕원고을에 알리기로 했다. 전성준은 덕원에서 바로 근처인 원산을 내왕하며 일본 침략세력의 주구가 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원래 원산은 조선 초기에 덕원도호부(德源都護府) 산하의 원산진(元山津)이라는 조그만 어항에 불과한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이래로 함경도 일대는 물론이고 강원·황해·평안도와 한양 등 각지에서 여러 물산이 집결되고 상인들이 모여들면서 일대 도회지가 된 곳이었다. 그런데 1880년 일본의 요구에 의해 개항된 뒤부터는 일본의 조선침략 교두보로서 주로 일본과의 무역항으로서 활기를 띠며 번성하였다. 따라서 그 곳에는 많은 일본인들이 조계지(租界地)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일본상인들도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일본군의 강력한 보호를 받으며 조선의 각지를 순회했고 기만적 상업행위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여서 자주 말썽을 일으키곤 하였다.
 
일본상인들이 개항 후부터 1880년대 전반기까지 우리나라에 가져온 상품은 약 88%가 영국산 면제품이었다. 개항 직후만 하더라도 일본제 상품은 보잘 것 없는 수공업 제품이 주종을 이루어서 자기·성냥·술 등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영국과 미국 등에서 수입된 공장제 제품을 조선에 비싸게 파는 대신 쌀과 콩, 가죽·생사·금 등의 1차 산품을 헐값으로 반출해갔다. 그러다가 일본의 공업이 발전하면서 조선의 수입상품은 점차 일본제품으로 바뀌어 갔다.
 
개항 이후부터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강화한 일본은 조선 수입액의 50%, 수출액의 90% 이상을 차지하게 되어 조선과의 무역활동에서 독점적 위치를 굳혔다.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피해를 가장 크게 입는 측은 말할 것도 없이 농민이었다. 농민들은 미곡을 싼값으로 팔아서 값비싼 생활필수품을 사야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부산과 원산·목포에는 일본인들의 곡물거래소가 생겼는데, 그들은 농민들의 어려움을 이용하여 입도선매(立稻先賣) 또는 고리대 형식이라는 약탈적 방법으로 곡물을 수매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의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졌고 농촌경제는 갈수록 어려워졌다. 바로 이 같은 상황이 간접적 배경이 되어 1894년 삼남 지방에서 농민을 중심으로 한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이 발발했던 것이다.
 
당시 관북지방에서 일본으로의 곡물 유출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반출되는 곡물의 양이 막대하여 국내가격이 폭등하였던 것이다. 함경도 지방에서 곡물유출을 막기 위해 1889년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대일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했다가 일본의 항의로 인하여 3개월 감봉처분과 전보발령의 징계를 받았고, 조선정부에서도 4년 뒤에 거액의 손해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사례가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고 하겠다.
 
머슴으로, 군인으로, 절의 중으로, 그리고 사냥꾼과 금광의 채전꾼으로 일하며 온갖 일을 안 해본 것이 없는 범도(홍범도)는 농민들의 고통을 어느 누구 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전성준은 이 무렵 원산에 있는 일본인 곡물수집상과 관리들의 손발이 되어 우리 농민의 피땀어린 농산물을 수집해서 일본으로 실어가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욱 한심스러운 일은 그동안 거액의 돈을 벌어서 그 위세로 덕원의 좌수까지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분개하였다.
 
홍범도는 달이 없는 캄캄한 밤에 대담무쌍하게도 혼자서 전성준의 집에 쳐들어갔다. 그는 전성준을 위협하여 그 사이에 모아놓은 돈을 다 꺼내라고 명령하였다. 전성준은 범도(홍범도)가 일본제 소총을 들이대자 깜짝 놀라며 허겁지겁 숨겨놓은 돈을 끄집어냈다. 전성준은 애지중지하며 모아놓은 돈을 강탈당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고 웬 시커먼 녀석이 갑자기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니 할 수 없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에서 총소리를 내면 자기가 위험할 것 같아서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납치해서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전성준은 될 수 있으면 집안에서 버틸려고 했지만 소리칠 수도 없었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데리고 무달사 어귀까지 왔다. 범도(홍범도)는 자기가 단순한 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성준에게 알렸다. 범도(홍범도)는 자신이 이미 을미년부터 의병활동을 계속해 왔다는 것과 일제의 앞잡이로서 힘없고 가난한 조선 농민들의 피땀을 착취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악인가를 단호하게 역설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빼앗은 돈은 의병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군자금으로 쓰일 것이라는 점도 상기시켰다.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한동안 주저하였다. 연방 굽신대며 생명을 보전코자 애쓰는 전성준을 보려니까 인간에 대한 연민의 정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을 처치함으로써 원산을 중심으로 한 이 지역에서 친일 민족반역자는 살아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의병의 항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점도 주민들에게 주지시킬 필요도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독한 마음을 품고 전성준을 처단하기로 결정했다. 마침내 그는 전성준을 사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이튿날부터 덕원의 좌수 전성준이 괴한에게 피살되었다는 소문이 온 덕원에 쫙 퍼졌다.
 
범도(홍범도)는 전성준에게서 뺏은 돈을 계산해 보고 조금 놀랐다. 일본돈 8,480원이라는 거액이었던 것이다. 그 돈으로 그는 이곳저곳 장마당으로 다니면서 장기간의 산중생활에 필요한 모든 도구들과 양식·신발·의복 등을 구입해서 평안도 동부의 산간지방인 양덕·성천·영원 등 깊은 산골의 숲 속과 바위틈 여러 곳에 숨겨 놓았다. 또 이전에 곡산의 지경령 근처에 숨겨놓은 무기도 찾아서 옮겨다 놨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곳을 주 무대로 거의 1년간을 혼자 떠돌아 다니면서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때가 1896년에서 1897년경이었다. 그의 나이 만 30이 되지 않았을 때인….
 
이무렵 국내 사정은 어떠하였던가? 단발령 이후 치열하게 벌어졌던 의병들의 항거는 1896년 아관파천으로 친일정권이 몰락한 다음 고종이 의병해산 조칙을 공포하고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 신기선(申箕善) 등을 파견해서 의병을 선유케한 결과 점차 의병들의 저항은 종식되었다. 그러나 류인석 등은 항거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다가 평안도를 거쳐 서간도 지방으로 건너갔음은 이미 앞에서 고찰하였다. 소위 을미의병(乙未義兵, 1895)이라고 하는 1895∼6년의 의병봉기는 이렇게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을미의병(1895)의 이러한 근왕적(勤王的)·보수적 성격은 이 무렵 의병투쟁의 한계로 지적되는 점이다.
 
그러므로 홍범도가 이 사이에 평안도 동북부에서 의병투쟁을 계속하면서도 소규모 부대를 조직하거나 다른 의병부대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을 하지 못하고 단독으로 행동해야 했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유생주도의 의병봉기는 이와 같이 1896년 10월경이 되면 거의 소멸되지만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과 의병항쟁에 참가하였던 일부 빈농민과 영세 수공업자·도시빈민·소상인 등은 그 이후에도 화적 집단이나 영학당(英學黨)·활빈당(活貧黨)·남대(南大)·북대(北大) 등의 소규모 민중운동 단체들을 조직하여 지방관아나 부호, 일본인들을 습격하는 등의 반침략·반봉건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활빈당은 양반 부호나 관아, 외국인을 습격하여 재물을 약탈하고 그것을 가난한 소농민이나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의 빈민구제 사업을 벌여서 억눌린 민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은 홍범도의 활동도 일종의 활빈당 활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홍범도가 혼자서 의병활동을 벌여 나가고 있을 때인 1897년 평안북도 운산 금광에서는 미국의 금광약탈에 대한 광산노동자들의 집단적인 반대투쟁이 전개되어 평안도 지방에서 매우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즉 외세의존적인 조선정부로부터 운산 금광의 채굴권을 빼앗은 미국은 먼저 그 곳에서 일하던 조선인 광산노동자들을 무력으로 몰아내고 중국인·일본인·조선인 노동자들을 새로 고용하였다. 생활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기존의 운산 금광 노동자들은 미국의 불법수탈에 대항하여 미국인에게 항의 통문을 보내는 한편, 인근주민의 동참을 호소하며 격렬히 투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약 300여 명에 이르는 광산노동자들의 드센 항쟁에도 불구하고 이 투쟁은 매판적인 조선정부와 미국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한편 1896년 7월에 서재필(徐載弼)·윤치호(尹致昊) 등은 독립협회를 결성하였고 이듬해 10월에 고종은 여러 대신들과 독립협회 회원 등 많은 사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원구단(園丘壇)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고 하여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국가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열어 외세의존적인 정부를 비판하고 헌의 6조(獻議 6條)를 결의하였으며 입헌의회의 설치를 주장하여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근대적 의회 민주주의 사상을 제창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깊은 산골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국내 정치상황의 변동을 잘 알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고군분투하며 외롭게 싸워야 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덕원의 전성준에게서 빼앗은 돈을 군자금 삼아서 몇년 간을 평안도 동북지역으로 떠돌아 다니며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동안 그는 약간의 일본군을 살상하였고 친일적인 관리들과 매판적 양반·부호들을 응징하였다. 그러나 끝내 그는 탄환과 식량·의복과 신발 등이 다 떨어지고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서 더 이상 의병항쟁을 계속할 수 없는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이제 의병활동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동안 그는 자기의 본명을 숨기고 가명을 써 왔으나 이제 굳이 이름을 속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이후 진짜 이름인 홍범도라는 이름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사진)
30세까지 홍범도의 행적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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