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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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어린 시절 및 청년기
1. 어린 시절
홍범도는 1868년 8월 27일(음력) 평안도 평양의 외성(外城) 서문(보통문을 흔히 이렇게 불렀음) 안에 있는 문열사 앞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부친의 성함은 홍윤식(洪允植)이었다는 설이 있다. 또 그의 모친에 관해서도 거의 알려진 사실이 없다. 다만 홍범도의 일지를 통하여 그의 어머니가 해산 후 7일 만에 출산 후유증으로 타계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구소련(러시아) 측 자료에 의하면 홍범도의 아버지는 머슴이었다고 한다.
그의 출생연도에 대하여는 1869년설이 있으나, 지은이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1868년 출생한 것이 확실하다. 또 그의 출생지에 관해서도 평안북도 자성, 평안남도 양덕이라고 하는 등의 이설이 있었지만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홍범도의 가계도 자세히 알 수 없는데, 평안도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그의 고조부가 홍경래와 그리 멀지 않은 친척으로서 원래 평안도 용강군의 화장골에서 홍경래와 같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홍경래가 1811년 12월 농민봉기를 일으켜 5개월간 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자 홍경래 가문은 이에 연루되어 전부 화를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홍범도의 고조부는 약간의 재산을 갖고 평양으로 이주하여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 후 홍범도의 증조부 대에 와서는 더욱 몰락하여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으며 홍범도의 부친은 결국 지주의 머슴으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확실한 신빙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료로서 뒷받침이 되어야 할 것이지만, 현재 어떤 기록으로써 확인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전국 각지의 동족부락을 조사한 기록이 있는데, 이 조사에서 평남 용강군 금곡면 화도리에 상당한 규모의 남양 홍씨 동족부락이 있다고 밝혀진 사실은 있다. 홍경래가 용강 출신이기 때문에 위의 전설이 퍼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설은 홍범도의 비범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서북지방의 풍운아 홍경래를 의도적으로 끌어 들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 점은 홍범도 고조부와 홍경래의 생존연대를 유추해 보면 비슷한 시기로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홍범도와 홍경래 사이의 혈연적 연계가능성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현재 홍범도의 가문내력을 정밀하게 추적할 수는 없으나 홍범도의 본관이 남양이라는 사실은 대체로 알려져 있다. 홍씨는 조선시대에 10대 벌열(閥閱)의 하나인 명문 씨족으로 유명한데, 특히 남양 홍씨는 홍씨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남양은 현 경기도 수원과 화성 일대의 옛 지명으로 과거에는 당성(唐城)·당은(唐恩)으로 불리우기도 했고 고려시대에는 남양부, 조선시대에는 남양군으로 행정구역이 변경되기도 했다.
* 벌열(閥閱) : 나라에 공이 많고 벼슬 경력이 많음. 또는 그런 집안.
홍범도가 태어난 평양은 어떤 곳인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왕검이 기원전 2,333년 아사달에 도읍했다고 하는데, 아사달이 바로 평양이었다고 한다. 평양은 낙랑, 고구려의 수도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조선 전시대를 거쳐 서경(西京) 혹은 서북지방의 웅도로써 매우 중시되었고 경기 이북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회지이기도 하였다. 평양은 거의 2천년 이상을 북한 지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산업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로 역할하였던 곳이다. 홍범도가 태어날 때도 평양성 내에는 기자릉(箕子陵)과 단군의 사당인 숭령전(崇靈殿)이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평양에 살고 있던 시민들은 이 도시가 조선에서 가장 오래된 유서 깊은 고장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평양은 또한 매우 아름다운 풍류의 고도로서 수많은 시인 묵객과 재사들이 수려한 평양의 풍광을 읊으며 찬탄을 보내기도 했던 명승지였다. 맑고 정겨운 대동강이 평양성을 끼고 도는 가운데로 대동강의 푸른 물줄기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연광정과 부벽루·을밀대 등은 대표적인 명소들이다. 고려 때 김황원(金黃元)이 부벽루에 올라 자신이 회심의 명작시를 남기겠다고 시를 짓다가 ‘긴 성 한면은 도도히 넘쳐 흐르는 물이요, 넓은 들 동쪽머리는 점점이 산이로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하는 시구는 지었으나 다음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하루 종일 애쓰다가 울며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주위의 경승에 압도되어 버린 것이다.
한편 고려시대에 평양 출신의 뛰어난 문사 정지상(鄭知常)이 벗을 보내며 읊은 저명한 시 ‘송우인(送友人)’의 배경이 된 곳도 바로 대동강변이었다고 한다. 그는 친구를 보내며 다음과 같이 그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비 그친 긴 둑에 풀빛 한결 더한데
그대를 남포에 보내노니 슬픈 노래가 동하도다.
대동강물은 언제 다하려는가
이별의 눈물이 해마다 푸른 강물을 보태노니.
雨歇長堤草色多 送君南浦動悲歌
大同江水何時盡 別漏年年添錄波
이 시의 작자 정지상은 고려 인종 때인 1135년 당시 서경으로 불리우던 평양에서 일어난 묘청(妙淸)의 난에 연루되어 사대주의자 김부식 일파에게 피살되고 말았으니 위의 시와 같이 기구한 일생을 마쳤다고 하겠다.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지방은 1811년 말에서 1812년 4월까지 청천강 유역에서 전개된 홍경래의 난 때문에 세도정치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던 당시의 지배층에게는 반역의 고장이라는 달갑지 않은 누명이 씌워져 있었다. 이처럼 고려·조선 양 시대에 서북인들은 지배층에 영합하기보다는 그들에 저항하다가 필경은 실패하고 더 큰 불이익을 받아야 했던 쓰라린 경험을 지닌 지역이었다.
19세기 후반 무렵의 평양은 평안도 감영이 설치되어 있었고 평안도 관찰사가 평양 부윤을 겸하고 있었다. 조선왕조 말기에 평양부 관하의 인구는 약 2만 2천명이었는데, 이는 수도 서울인 한성과 개성에 뒤이어 전국에서 세번째로 많은 숫자이다. 조선왕조 후기에 와서 중국과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며 수공업 및 상품 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평양이 서북지방의 상공업 중심지로 크게 번성하였기 때문이다.
홍범도가 태어날 무렵의 나라 안팎 사정은 어떠하였는가? 19세기 전반기의 조선은 60여 년간에 걸친 세도정치로 정치체제가 극도로 문란해지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여 백성들은 큰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적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였고 상품시장과 원료공급지를 구하기 위해 아시아에 침략의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영국·프랑스·러시아·미국 등의 열강은 종교와 상품, 대포와 군함을 앞세우고 다투어 아시아 여러 나라로 침입해오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면 영국은 1840년 아편전쟁, 1856년 애로우(Arrow)호 사건을 일으켜 중국을 굴복시키고 홍콩(香港)을 할양받았으며 광동(廣東) 등을 개항시켰다. 한편 미국도 일본을 무력으로 위협하여 1854년 통상조약(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고 문호를 개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나라도 중국이나 일본보다 시기는 늦었으나 예외는 아니었다. 서양 선박은 이미 18세기부터 조선 연해에 나타났는데 당시 사람들은 이 배를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초기에는 측량과 탐사를 목적으로 조선 연안에 접근하였으나, 19세기 이후에는 직접 통상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해안지방에 불법으로 상륙하여 약탈행위를 자행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사회는 서양세력에 대한 공포와 의구심이 깊어졌고 안으로는 위기의식이 높아졌다.
이와 같이 서양세력의 침투와 내정의 문란이라는 내우외환으로 조선사회가 큰 시련에 직면하였을 무렵인 1863년 12세의 어린 나이에 고종(高宗)이 즉위하면서 고종의 아버지인 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쇄국정책을 취하여 밖으로부터의 위협을 막기 위해 외국의 통상요구를 거절하고 서양물품의 교역을 엄금하며, 외세를 안으로부터 맞아들이는 세력이라고 생각되는 천주교에 대하여 일대 탄압을 가하였다.
이에 프랑스는 천주교 탄압의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무력을 앞세워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1866년 9월 로즈(P. G. Roze)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케 하고 일부는 서울을 향하여 진격케 하는 침략전을 벌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침입은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 정권의 굳은 항전 의지와 유학자들의 적극적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에 뒷받침된 국민여론, 그리고 한성근(韓聖根)·양헌수(梁憲洙) 부대의 분전으로 격퇴되었다. 이 사건을 병인양요(1866)라 한다. 주목되는 사실은 이 때 서북지방의 포수들이 대거 동원되어 외세의 침략을 격퇴하였다는 점이다.
한편 같은 해 7월(음력)에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en)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까지 와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가 격분한 평양의 군민과 충돌하여 소각·침몰되는 사건(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註1)이 일어났다. 일설에 의하면 홍범도의 할아버지가 이때 제너럴셔먼호를 용맹하게 공격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고 하는데 확인할 수는 없다.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 때 평양 사람들은 용감히 싸웠다. 평양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서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후에 어떤 형태로든지 홍범도에게도 전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홍범도가 태어나던 해인 1868년 미국군함 쉐난도(Shenandoah)호가 셔먼호의 생존자 수색 차 대동강 하류유역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여 주민들을 놀라게 한 일도 있었다.
또 1868년 4월에 독일 상인 옵페르트(Ernst Oppert)는 조선에 불법 침입하여 천주교도의 안내로 충청도 덕산군에 있던 흥선대원군(이하응)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는 야만적 행위를 저질렀다. 이러한 만행은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한 집권층의 쇄국의지를 더욱 굳게 하였고 일반 국민들에게 서양인은 야만인이라는 인식을 확실케 하여 배척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임진왜란(1592) 이후 조선과 교린관계를 유지해 오던 이웃 일본은 1854년 개항된 직후에는 상당한 시행착오를 범했으나 미국 이외의 유럽 여러 나라와도 통상조약을 맺고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서서히 근대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1868년에 덕천막부(德川幕府)가 타도되고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정부가 성립한 명치유신(明治維新)이 단행되어 봉건적 신분제가 폐지되는 등 일대 혁신이 단행되었다. 그 후 일본에서는 조선을 무력으로 정벌하자는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났으나, 부국강병 정책을 실현한 뒤에 적당한 시기를 보아 조선을 정복하자는 의견으로 후퇴하였다. 이리하여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 침략의 기회를 노리며 끊임없이 침략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한 나라가 처한 내외상황은 그 나라에 사는 국민 개개인에게는 절대적인 관련을 갖고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홍범도가 나서 자라고 성인으로서 활동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기의 한국사회는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자주적이며 근대적인 사회로 발전하지 못하고 끝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홍범도는 자기 자신의 한 개인적 삶을 뛰어 넘어 제국주의 단계로 진입한 일본의 침략세력과 치열한 투쟁을 벌이며 자신의 생애를 민족적 차원으로 승화시키게 되는 것이다.
홍범도는 출생 직후 어머니를 여의고 홀로된 아버지의 품에서 이웃 동네 여인들로부터 젖을 얻어먹으며 자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지주의 집에서 머슴을 하고 있었지만 동네 사람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아서 동냥젖일망정 넉넉하게 얻어 먹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정성스런 양육과 이웃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홍범도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아무 탈이 없이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사내답게 생긴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이름을 ‘범도(홍범도)’라고 지었다. 한자로 풀이하자면 ‘모범 범(範)’자에 ‘그림 도’ 또는 ‘꾀할 도(圖)’자였다. 호랑이 같은 아이 또는 장수답게 생긴 애라는 뜻이 담겨 있었고 훌륭하게 자라서 타인의 모범이 되라는 간절한 소망도 들어 있었다. 이 이름은 물론 범도(홍범도)의 아버지가 지은 것이었으나 그는 무식했기 때문에 혼자 결정하지 못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제일 유식하다는 훈장 어른을 찾아뵙고 좋은 이름을 지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여 귀한 이름을 얻었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어머니를 일찍 잃어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받아 보지는 못했지만 자기를 끔찍히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있었으므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행복했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바로 집 앞에 있는 보통문에 올라가서 놀기도 하고 같은 동네의 어린 친구들과 같이 성 밖에 나가 푸른 대동강물을 바라보며 마냥 즐거운 한때를 갖기도 했다.
홍범도가 만 세 살 때인 1871년에는 5년 전에 평양에서 침몰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핑계로 조선을 무력으로 협박하여 개국시키고자 미국군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신미양요(1871)가 일어나서 온 나라가 떠들썩하였다. 이 사건은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미국군이 철수함으로써 일단락되었지만 이때 범도(홍범도)가 사는 평양에도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지시로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져서 온 평양사람들이 서양오랑캐의 침입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서양오랑캐가 침입하는 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오 만년자손 병인작 신미입)
범도(홍범도)의 아버지는 사건의 내용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주장과 같이 서양오랑캐들의 야만적 침략에는 오직 힘닿는 대로 싸워서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는 낮에는 집에서 혼자 놀기도 하고 주위의 동네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려 성 밖의 넓은 들판을 쏘다니며 뛰어 놀기도 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이렇게 튼튼하게 자라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고된 일에 시달리면서도 열심히 일하며 엄마도 없이 자라는 불쌍한 자기 아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도 무심한지 범도(홍범도)가 만 아홉 살 때인 1877년 홍윤식은 고역에 지친 나머지 병에 걸려 여러 달을 누워서 앓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린 범도(홍범도)의 정성스런 간호도 보람 없이 결국은 그 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범도(홍범도)의 슬픔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어머니도 없이 자란 그가 이제 아버지마저 없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범도(홍범도)는 아직 철모르는 어린이였지만 자신이 이제 홀로 되었으며, 양친도 없이 혼자서 살아야 한다는 뼈저린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에게는 험난한 앞길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범도(홍범도)는 고아일망정 꿋꿋하게 자기의 앞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에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어렸을 때에 가끔 집에 찾아와서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며 자신을 몹시 귀여워 해주던 작은 아버지가 살아 계신다는 사실이었다. 숙부는 아버지마저 여읜 범도(홍범도)를 자기 집에 데리고 가서 어른이 될 때까지 돌봐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홍범도는 평양 근처의 숙부댁에서 자라게 되었다.
범도(홍범도)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1877년은 쇄국정책으로 굳게 문을 닫았던 조선이 일본의 무력시위와 협박으로 강화도에서 조약을 맺고 개항을 한지 일 년 뒤였다. 쇄국정책을 주장하던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정권에서 물러나자 일본은 그 틈을 이용하여 그들이 미국에서 당한 전례를 모방한 운양호(雲揚號)사건(운요호 사건, 1875)을 일으키고, 이어서 강화도에 군함과 군인을 파견하여 위협적으로 조약체결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때 조선에서는 개항반대론이 거세었으나 개항을 주장하는 일부 인사들이 있어서 조선은 마침내 크게 불평등한 내용의 이 조약(강화도조약, 1876)을 체결하게 되었다. 일본은 이 조약(강화도조약, 1876)으로 정치·군사·경제적 침략의 거점을 마련하고 본격적인 조선 침투의 길에 나설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구미 열강과도 통상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하였으나, 열강의 침투가 심화됨에 따라 조선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시련을 겪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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