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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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어린 시절 및 청년기
2. 평양 친군서영의 병사생활
홍범도는 숙부댁으로 이사하여 작은 집 식구들과 함께 살게 되었지만 살림형편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작은 아버지도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매우 가난하게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농부인 숙부를 도와서 농사일을 같이 하였고 틈나는 대로 작은 집 일을 도와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였다. 어린 범도(홍범도)는 힘에 부치지만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였고 성심성의껏 작은 아버지와 작은 어머니를 도와 드렸던 것이다.
작은 아버지 댁에서 잔일을 하며 몇 년을 보낸 범도(홍범도)는 체격도 제법 커지고 일도 꽤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어엿한 소년으로 자란 범도(홍범도)는 가난한 숙부댁에서 지내며 신세를 지기보다는 약간 힘들지만 다른 사람의 집에 가서 일해 주며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숙부댁에서 멀지않은 부자집의 꼴머슴으로 가게 되었다. 범도(홍범도)에게 머슴살이는 무척이나 괴롭고 힘든 고통의 연속이었다.
* 꼴머슴 : 땔나무나 꼴을 베는 일을 하는 어린 머슴
어른이 되기도 전에 남의 집에서 머슴으로 생활해야 했던 홍범도는 동년배의 소년들 보다 훨씬 일찍부터 온갖 차별과 냉대를 경험했고 또 같은 마을의 다른 일꾼이나 머슴들과도 어울리며 지냈으므로 자기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나이에 비해서 매우 조숙한 소년이 되었다. 이제 범도(홍범도)는 자기 부모님들이 겪어야 했던 쓰라린 고역을 자신이 몸소 체험하면서 부모님들이 왜 그렇게 힘들어 했으며 그토록 열심히 일하는데도 집은 그렇게 가난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직 당시 조선사회에 만연하고 있던 지주·소작관계의 모순과 양반 관료사회의 부패 및 신분제의 한계가 갖는 의미는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자기는 뼈빠지게 일하면서도 항상 가난하고 주인네는 논밭을 소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하지 않으면서도 잘 사는 것이 불공평하게 여겨졌다. 범도(홍범도)는 그러면서도 자기가 나이 어리고 배운 것이 없으며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막일을 하며 머슴살이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주인집에 충실히 대했으며 맡은 일은 열심히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이러한 꼴머슴 생활을 하며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갖게 되었고 점차 사내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묵묵히 일하는 가운데 틈틈이 평양성 내외를 오가며 같은 연배의 상놈친구들과 어울렸고 유명한 평양 박치기·돌팔매질·씨름하는 법 등을 배워 꽤 할 줄 알게 되었다.
홍범도가 열네 살 때인 1882년 서울에서는 군인들의 폭동인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났다. 임오군란(1882)은 별기군(別技軍)이라는 신식군대를 우대하고 구식군대는 차별한 데 대한 반발로 구식군인들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었다. 별기군은 조선정부에서 추진하던 개화정책의 일환으로 1881년 설치한 신식군대였는데, 일본인 교관을 초빙하여 일본식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다. 임오군란(1882)에는 개항 이후 많은 쌀이 일본으로 반출되어 쌀값이 폭등하는 등의 이유로 직접 피해를 입고 있던 서울의 일부 시민들도 가세하였다. 군인들은 군기고(무기고)와 포도청을 습격하고 고관들을 살상하였으며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또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고 있던 상당수 시민들의 합세로 더욱 기세가 오른 군중들은 궁궐에도 침입하여 민비(閔妃; 뒤에 명성황후로 추존)를 살해하려 하였으나, 민비(명성황후)가 충주로 피난하여 실패하였다. 임오군란(1882)의 결과 한때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정권을 잡기도 했지만, 청군(淸軍)이 출동해서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청으로 압송해 갔기 때문에 다시 민씨(명성황후) 일파가 집권하게 되었다. 민씨(명성황후) 척족들은 그들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청정책을 실시하였다.
청은 이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였다. 임오군란(1882) 후 청의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凱)는 군대를 거느리고 조선에 주둔하였는데, 조선군대를 청나라 식으로 훈련시키게 하였고 군제도 청의 군제 대로 개편케 하였다. 임오군란(1882) 직전인 1881년 말까지 조선군은 기본적으로 5군영 체제를 유지해왔다. 5군영이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이후에 성립한 훈련도감(訓鍊都監)·어영청(御營廳)·총융청(摠戎廳)·금위영(禁衛營)·수어청(守禦廳) 등 서울 중심의 다섯 군영을 말한다. 그러나 수 백년간 지속되었던 5군영체제는 1881년 4월에 별기군이 창설된 뒤 같은 해 12월 말경 무위영(武衛營)과 장어영(壯禦營)이라는 양 군영체제로 개편되었다.
이 같은 양 군영체제는 임오군란(1882) 직후 잠시 5군영제로 환원되었지만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청군이 조선에 출동하여 주둔하면서 신건친군(新建親軍)이라는 새로운 청식 군제로 바뀌게 된다. 즉 1883년부터 1884년 11월 까지 약 2년간에 걸쳐 종래의 5군영은 신건친군 전·후·좌·우영과 친군 별영(別營)이라는 친군영제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이때 성립한 친군 각 영은 병력 수나 소속군의 내용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기본조직은 대체로 비슷했다.
또 각 군영은 청을 통해 수입한 영국제 소총과 청의 천진(天津) 기기국에서 만든 대포 등으로 무장하였다. 그런데 임오군란(1882) 직후에 이처럼 서울의 군대가 청군의 지도를 받아 신식으로 개편되고 있을 때 지방의 각 군영도 청의 영향력 하에서 새롭게 편제되고 있었다. 특히 평안감영군은 청군이 중국을 왕래하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다른 감영보다 더 빨랐고 북방의 방위와 관련하여 중앙정부의 관심도 컸다. 이리하여 평안감영에서는 1883년부터 감영군의 개편에 착수하였다. 그러다가 친군후영 감독(후에 營使로 개칭됨)과 좌영의 영사(營使)를 역임하였던 민응식(閔應植)이 1884년 평안감사로 부임하게 되자 평안감영의 군병은 서울의 친군영에 따라 전면적으로 개편되었고 청식으로 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 결과 종래의 평안감영은 1885년 친군서영(親軍西營)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평안감사가 서영사(西營使)를 겸하였다. 민응식은 당시 민씨(명성황후) 척족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민비(명성황후)가 임오군란(1882)으로 피난하였을 때 공을 세웠다고 하여 크게 혜택을 받고 있던 보수적 인물이었다.
이 무렵 각 지방의 병영은 새로 군병을 모집하여 경군(京軍)의 예에 따라서 훈련하며 가끔 상경하여 서울의 각 영군과 어울려 조련하는 것을 관례로 하였다. 이러한 친군영 군제는 1888년까지 유지되었다. 친군서영은 1895년 군제개편으로 다시 진위대(鎭衛隊)로 개편되어 비로소 근대적 군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제 관헌 측 자료나 국내 대부분의 서적에 홍범도가 평양의 진위대에서 병사로 복무하였다고 서술하고 있는 것은 잘못된 언급이다. 그는 친군서영에서 근무하였던 것이다.
홍범도가 만 15세가 되던 1883년 위와 같은 사정에 따라 평양의 감영에서는 병정을 모집하여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려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범도(홍범도)는 자기가 비록 나이 어리고 무식하지만 군대에 들어갈 수는 없을까 하고 궁리하게 되었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고 자질구레한 잔일을 하는 머슴보다는 군인이 되어 스스로의 앞길을 열어 나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다. 이번에 뽑는 병정은 의무병이 아니고 지원병이므로 자기 같이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이 아닌가? 군인이 되면 아주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럭저럭 남에게 아쉬운 부탁을 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범도(홍범도)는 비록 열다섯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고된 일을 하면서 열심히 활동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녔기 때문에 몸이 아주 튼튼했으며 체구가 나이에 비해서 좀 컸다. 그래서 그는 병영에 가서 입대할 수 있는 장정의 자격과 조건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았다. 그런데 범도(홍범도)에게 참으로 아쉬운 점은 군인이 되려면 최소한 만 17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자격조건이었다. 그는 그러한 제한조건을 알고 무척이나 실망하였다. 더욱이 또 그를 어렵게 한 점은 병사로 입대하려는 어중이떠중이 청년들이 너무 많았고 당시 유행하던 매관매직의 풍조로 뇌물을 바치고 군인이 되려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홍범도 같이 가난하고 힘이 없는 서민들이 돈을 받고 복무하는 고용병이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이런 현실을 깨달은 범도(홍범도)는 군인이 되기를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범도(홍범도)에게는 천우신조라고나 할까? 마침 평안감영에서는 신호병의 직책인 나팔수를 몇 명 뽑게 되었다. 다행히도 나팔수 지원자들은 얼마 안 되어서 범도(홍범도)는 자신의 나이를 17세라고 두 살 올려서 지원한 결과 가까스로 입대할 수 있었다. 결국 홍범도는 부모님을 다 여읜 뒤에 열다섯 살까지 숙부댁에서 지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집에서 머슴일도 하며 어린 시절을 매우 고생하며 보냈으나 이제 겨우 군인이 됨으로써 조금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홍범도는 당시 기영(箕營)으로 불리우기도 하던 평안감영의 우영 제1대에서 나팔수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임오군란(1882) 이듬해인 1883년 즉 계미(癸未)년이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사격술을 배웠다. 그는 총을 쏘는 훈련에 열성적으로 임하였으므로 얼마 되지 않아 사격에 꽤 익숙하게 되었다. 범도(홍범도)가 입대한 뒤에 평안감영은 친군서영으로 개편되었다. 조정에서는 평양에 있던 친군서영 병력의 일부를 차출하여 임오군란(1882) 직후에 어수선하던 서울의 치안과 관청의 수비를 담당하게 하였고, 또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무위영과 장어영 소속의 각 병영과 군사훈련을 실시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병력의 일부가 선발되어 교대로 서울에 와서 몇 달씩 근무하였는데, 범도(홍범도)도 이때 인물과 체격이 좋고 훈련을 잘 받는다고 하여 뽑혀서 서울에 파견되어 근무하기도 했다. 서울은 평양보다 훨씬 컸으며 상당히 많은 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에서 들어온 신기한 물건이나 장비가 많이 눈에 띄어 범도(홍범도)를 놀라게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평양의 친군서영에서 병졸로 약 4년간 복무하여 처음 입대할 당시보다 몇 계급 진급도 하여 직위가 높아졌고 또 병영생활에 차츰 익숙해졌다. 이제 그는 군대생활에 제법 흥취를 갖게 되었고 갈 곳 없는 그가 살아가기에는 군인노릇도 제법 괜찮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보수는 넉넉지 않지만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았던 것이다. 범도(홍범도)는 병사생활을 통하여 이전에 겪어보지 못했던 더 넓은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다. 그가 친군서영에 있던 시절은 한창 성장하는 시기였으므로 몸과 마음 모두 많이 자라고 성숙하였으며 이제 거의 어른다운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군대의 졸병생활도 쉬운 것이 아니었다. 조선 말기의 군대는 규율이 없고 부패하여 양반 출신인 군교(장교: 초관이나 별군관, 초장 등)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였고 병사들에 대한 급양이 형편없었다.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병정들을 학대하고 차별하기까지 했다. 1860년대 이후에는 거의 매년 농민들을 주축으로 한 민란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그러한 농민봉기는 조선왕조 말기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하였던가 하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범도(홍범도)가 군인으로 근무하고 있던 1883∼7년 사이에도 수많은 민란이 발생하였는데, 특히 1884년 12월에 함경도 안변·덕원 등지에서 농민들이 수세(收稅)문제로 일으킨 소요사건은 이북지방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군인들은 이러한 민란의 진압에 출동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농민들의 세금을 징수하여 오는 일에도 동원되었으므로 병사들은 어떤 의미에서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들을 억누르고 탄압하는 역할을 하는 집단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자기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업군인이 되기는 하였지만 이와 같은 모순된 현실을 목격하고 군대생활에 점차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친군서영은 그전의 평안감영이 개편된 군영이었으나 실질적으로 부대의 내용이 크게 혁신된 것은 아니었다. 즉 그 편제와 장비 등은 많이 바뀌었지만 조직을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은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으며 훈련내용도 종전과 비슷했고 군교들의 병정들에 대한 차별과 군내의 부패상도 여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전투력의 향상을 달성하기 위한 당초의 개혁목적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직 어렸던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며 군인의 의무를 다하고 박봉이나마 혼자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겠다고 여겼다. 그러나 시일이 지날수록 군대의 핵심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보위하여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진 군교들의 착취와 횡포가 날로 심해지고 또 훈련이 가혹하며 사병들에 대한 학대가 개선되지 않고 계속되자 군대생활에서 어떤 보람을 찾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때에 범도(홍범도)는 같은 부대 소속의 부패한 군교와 시비가 붙은 끝에 그 사람을 구타하고 말았다. 그는 이제 더 이상 군대생활을 할 수 없었다. 병영에 돌아가면 중형으로 처벌받을 게 너무나 확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약 4년간에 걸친 군인노릇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갈 곳 없는 그에게는 제법 할 만한 직업이었고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하여 범도(홍범도)는 안정된 직업이자 호구지책이었던 병졸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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