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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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어린 시절 및 청년기
3. 제지공장의 노동생활
범도(홍범도)는 병영으로부터 멀리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그의 이 같은 행동은 미리 주도면밀하게 계획을 짜서 단행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앞길이 순탄치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가 평양을 벗어나자 막상 갈 곳이 없었고 당장 먹고 자고할 것이 큰 문제가 되었다. 생활고는 더욱 심각해졌으며 당장의 일거리를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범도(홍범도)는 평양성을 빠져 나왔으나 앞으로 어디로 가야할 지 무척 막막하였다. 평양에 살고 계시는 작은 아버지가 얼핏 떠오르기도 했으나 어려운 형편을 뻔히 알고 있는 마당에 이제 성인이 다된 그가 몸을 의탁하기에는 어울리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얼마 동안을 주저앉아 심각하게 생각한 끝에 같은 부대에서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하던 말이 기억에 되살아났다.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황해도 수안군에 종이를 만드는 제지소(製紙所)가 있다는 것이었다. 범도(홍범도)는 마땅하게 의지할 곳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설은 수안까지 가기가 주저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제지소의 노동자로 일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수안은 황해도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높이 1,120미터의 언진산이 큰 산맥을 형성하고 있고 비교적 산이 많은 벽지였다. 하지만 평양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사람들의 이동이 많아 교통이 편리하였다. 또 이곳에는 금광이 있어 광산노동자들이 많았고 일거리를 얻기도 쉬울 것 같았다. 그리하여 범도(홍범도)는 1888년경부터 황해도 수안군 천곡의 총령(蔥嶺) 아래에 있는 제지소로 가서 종이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의 여기에서의 생활은 거의 머슴살이나 다름없는 비참한 것이었다.
총령은 수안에서 신계로 가는 요로에 있는 고개였다. 특히 이곳은 그 옆에 흐르고 있는 총령천이 유명하여 종이 산출지로 꽤 알려진 지역이었다. 총령천은 깊이 패어진 바위굴 속에서 흘러 내리는데, 장마나 가뭄에도 수량에 큰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 매일 조수 때를 따라 일정하게 늘었다 줄었다 한다. 바로 이러한 좋은 자연조건 때문에 이 총령천 옆에는 종이 만드는 제지소가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종이를 만드는 작업에는 항상 맑고 깨끗한 물이 많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지방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지소가 여러 군데 있어서 정부에 공납을 바치기도 한 유서 깊은 곳이었다. 여기에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종이를 만들고 있었지만 주로 서민들이 창문에 바르는 창호지를 많이 생산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제지소 노동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지소 주인은 19세기 후반에 창도되어 한창 맹렬히 퍼져나가던 동학의 수안군 주요 간부였다.
홍범도는 신변의 안전을 위해 자기의 본래 이름을 숨기고 가짜 이름을 쓰며 매사에 조심스럽게 행동하였다. 당시 종이를 만드는 일은 매우 힘든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거의 모든 공정을 사람의 힘으로 해야 했다. 당시 종이를 만드는 방법은 극히 수공업적인 것으로서 대체로 다섯 가지 과정을 거쳐야 했다.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기술자들을 도와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다. 이웃 대오면에서 나는 닥나무를 옮겨오는 일이라든가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고 힘이 많이 소요되는 작업, 즉 닥나무를 잘게 부수는 일이나 재지원료를 물에 씻는 일 등을 주로 하였던 것이다. 닥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작업은 손이 많이 가고 잔일이 많은 고된 과정이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온갖 잔일로 단련된 범도(홍범도)에게는 참고 견딜만한 것이었으며 나무를 재료로 하여 새하얀 종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대단히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열심히 일을 하였고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자 종이 만드는 기술을 어느 정도 익히게 되었다. 당시 숙련된 제지기술자는 하루에 약 500장 정도의 분량을 만들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그렇게까지 잘 하지는 못하였지만 조금 더 열심히 배우면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더욱 열심히 일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영세한 수공업체인 이곳 제지소에서 일한 지 약 1년 정도 되었을 때 평소에도 동학에 대하여 늘 말하곤 하던 주인은 범도(홍범도)를 정식으로 불러서 동학을 신봉하고 동학교문에 들라고 권유하였다. 주인은 동학당 지방 간부의 일원으로서 이 지방 사람들에게 동학을 포교하고 보급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공장의 노동자들을 동학에 가입시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가 일꾼들을 동학의 조직에 포섭하여 동학을 믿게 하려는 목적은 동학의 종교적 성격을 이용하여 노동자들의 사상을 순화시킴으로써 그들을 동학군이라는 무장 세력으로 동원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동학은 정부당국으로부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사교(邪敎)라고 낙인 찍혀 1세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당한 뒤 포교와 신봉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당국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동학은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 환영받아서 주로 경상·전라·충청도 등 삼남지방에 집중적으로 전파되었고 경기·강원·황해도 등 중부지방까지 널리 포교되어 많은 사람들이 동학에 입도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동학이라는 종교에 관하여 군대에 있을 때에 들어본 적이 있어서 대강 어떤 종교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동학에 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를 받았을 때는 저으기 당황하였다. 그것은 동학의 취지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자기생각으로는 도무지 허황되서 믿을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범도(홍범도)가 동학에 대해서 이렇게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된 데에는 군대에 있을 적에 받은 교육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때 그는 동학은 배척해야 할 이단적 사교라고 배웠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 요인은 범도(홍범도)가 어려서부터 거의 혼자서 자기문제를 해결해 왔고 어떤 일을 할 때에도 결코 다른 사람이나 기타 미신 혹은 종교의 힘에 의존하여 해결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그는 종교에 관해서는 대체로 잘 알지 못하였으며 또 보이지 않는 신이나 절대자의 권능에 의지한다는 것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동학이라는 종교는 미신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였기 때문에 그가 보기에는 도대체 미덥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범도(홍범도)는 주인에게 동학에 들 수 없고 또 믿을 수도 없다고 확실하게 거절하였다.
* 저으기 -> 적이 : 꽤 어지간한 정도로
그 후에도 주인은 여러 번 범도(홍범도)에게 동학을 믿고 그 조직에 참가할 것을 권하였고 점차 강제적으로 명령하다시피 하였다. 그렇지만 범도(홍범도)가 어떤 사람인가? 한번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 아니었던가? 범도(홍범도)는 처음에는 겸연쩍어 하며 조심스럽게 거절하였지만 누차 주인의 강요가 계속되자 아무리 강요하더라도 동학을 신봉할 수 없으며 그 관련조직에도 참여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범도(홍범도)가 제지소에 들어온 지 약 2년이 넘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동학에 들라고 협박하였으며 그 몇달 후부터는 아예 동학에 들지 않으면 임금도 주지 않겠다고 하면서 매월 주던 노임마저 주지 않았다. 범도(홍범도)는 화도 나고 기가 막혔지만 이곳마저 벗어나면 갈 곳도 없는 처지라 꾹 눌러 참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받지 못한 삯이 일곱 달이나 밀리게 되었다. 그동안 범도(홍범도)는 겨우 밥이나 얻어먹고 구차스럽게 하루하루를 연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제지소 주인은 자신이 범도(홍범도)를 고용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위세를 빌어 아무 거리낌없이 방자하게 말했다.
“네 고삯을 찾으려거든 동학에 참여하여라. 그러면 주고 그렇지 않으면 네 소원대로 할 데 있으면 하여 봐라.”
범도(홍범도)가 생각하기에 동학에 끌리는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주인의 강압적 태도가 비위에 거슬리고 또 노임도 받지 못한 처지에 자기의 고집이 있는지라 지지 않고 대꾸하였다.
“내가 죽어도 동학에 들어갈 생각은 없소.”
범도(홍범도)가 수안 총령의 제지공장에 들어와 일한 지 약 3년이 되었을까? 범도(홍범도)는 그동안 주인에게 밀린 삯을 달라고 여러 번 청하였다. 하지만 주인은 동학을 믿으면 밀린 노임을 모두 주겠다고 하면서 완강하게 버티었다. 그럴 때마다 범도(홍범도)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울분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참았다.
이렇게 주인과 범도(홍범도)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어 가던 어느날 주인과 범도(홍범도)는 마침내 동학에 관한 문제로 크게 다투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한 대가도 받지 못하고 일곱 달이나 거의 무료나 다름없이 일해주고 있는 범도(홍범도)에게 주인이 또 다시 동학에 들라고 위협하였던 것이다. 그는 하루 일과가 끝난 다음 저녁 무렵에 범도(홍범도)를 불러서 다시 동학에 가입하라고 독촉하였다. 그 동안 범도(홍범도)는 머슴이나 다름없이 허리가 휘도록 일하며 참을 만큼 참았는데 주인은 이제 범도(홍범도)한테 동학에 들지 않으려거든 제지공장을 아예 떠나라고 위협하는 것이 아닌가?
범도(홍범도)는 이렇게 되자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떠날 결심을 하고 밀린 임금을 달라고 주인에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파렴치한 주인은 범도(홍범도)가 동학에 들지 않으리라는 점을 잘 알고서 아예 떼먹으려고 하였다. 심지어 주인은 범도(홍범도)를 협박하며 폭력으로 쫓아 내려고 하였다. 범도(홍범도)는 그날 밤 주인과 말다툼 끝에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에게 주먹을 휘둘러 거꾸러 뜨리고 말았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삼년 가량이나 꽤 애착을 갖고 열성적으로 종이 뜨는 기술을 배웠지만 주인의 고집에 시달리며 쓰라린 고용노동자 생활을 청산해야 했다. 조금만 더 참으면 되지 않았을까 하고 반성해 보면 약간의 아쉬움이 남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인의 행패가 워낙 심하여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었으므로 차라리 그곳을 뛰쳐나오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마음을 달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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