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독립군의 국내작전과 그 활약의 양상"에서 중간 부분인 "(3) 독립군의 국내진격에 있어서의 항전형태"만 가져왔습니다.
 
(3) 독립군의 국내진격에 있어서의 항전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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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전후의 만주·노령에서 전개되는 항일무장독립군의 항전은 한말 의병항전의 전통을 이어받아 전개된 무력항전이다. 즉 상술한 1920년의 무장독립군의 항전은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의 항전으로 그것은 그 이전의 의병항전으로부터 10여년 후의 항전이었다. 항전의 대상과 항전의 주체는 변하지 않았으나 민족의 의식과 항전의 형태는 많이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독립군의 항전형태의 변화를 의병 항전 때와 비교하여 그 변화상을 살펴 보고자 한다.
 
한말 의병항전의 마지막을 장식한 1909년의 호남 의병들의 대항전(소위 일제가 말하는 ‘남한 대토벌’) 때의 의병부대는 30명 전후가 항전부대의 단위를 이루었고, 연령적으로는 30세 전후의 의병장과 의병들이 주동적 활약을 하였다. 또 의병장들의 사회신분도 다양한 양상을 띤 평민 의병장들이었고 그들의 전술도 야습 게릴라전이 대부분이었다. 이에 대하여는 필자가 이미 논문으로 학계에 발표한 바가 있다.註 076
 
그런데 독립군의 항전의 시기는 의병항전과는 그 항전의 형태에 있어서 양상이 달라진다. 먼저 항전에 있어서의 단위 규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1920년에서 1924년에 걸친 국경 3도(평북·함남·함북)에 있어서의 항일무장독립군의 활약 건수와 그 인원에 나타나는 독립항전의 형태(규모)를 보면 〈표 6〉과 같다.
 
〈표 6〉 국경 3도의 독립군활약 건수와 인원수표(1920~1924년)註 077

 

〈표 6〉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체 건수로 전체 인원수를 나누면 1건당 4.68인이 된다. 항일무장독립군이 활약한 5년간의 활약 단위는 5명 전후가 되는 것이다. 만주·노령에서 형성된 본부의 독립군단의 단위는 많은 것은 수천 명에서 수백 명, 적은 것은 수십 명의 인원이었으나 국내로 진격 활약한 단위는 5명 전후로, 이러한 형태와 규모로 게릴라전술로 활약한 것을 알 수 있다. 
 
1909년의 항일의병부대의 활약 단위였던 30명에 비하면 보다 축소된 단위였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는 국경지대에 있어서의 보다 조밀화한 일본 군경의 경비망·통신망에 대응하여 등장한 새로운 항전단위인 동시에 또한 독립군의 새로운 게릴라 전술의 등장과 그 성장을 말하여 준다.
 
항일무장독립군은 이러한 단위로 조밀한 경비망을 뚫고, 국내로 진격하여 활약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국내의 경찰주재소 등 기관을 기습공격할 때에는 이러한 단위로 비밀리에 지정된 장소에 모여 다시 30~40명의 단위를 이루어 기습공격하고, 항전이 끝나면 다시 5명 적후의단 위로 분산하여 활약하고, 또 국경선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다음은 이들 무장독립군의 연령을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군측이 1921년에 조사한「간도사건에 있어서의 사상자의 조사의 건」註 078을 보면 전체 270명 가운데 연령을 알 수 있는 202명의 독립군 사상자의 명단이 있고, 그들의 연령을 계산해 보면 평균 31.6세가 된다. 그리고『독립신문』에 기록되어 있는 용사. 즉 국내로 진격하여 활약하다가 전사한 용사의 약력에 기록된 연령을 보면 대부분이 20대이다. 항일무장독립군 전체의 연령은 30대이나 국내 진격을 담당하여 항전한 무장독립군의 연령은 20대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독립군의 연령의 하한은 훨씬 내려와 18·9세가 또한 많이 등장한다.
 
이를 의병 항전때와 비교해 보면 무장독립군의 연령은 약간 젊은 세대로 내려오고 있다. 특히 하한의 연령은 의병항전 때와는 달리 훨씬 내려와 있다. 결국 무장독립군의 항전의 주체가 과거에 비하여 보다 젊은 세대로 바뀌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항일 민족의식이 보다 강하게 젊은 세대로 이식되어 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독립군 항전의 주체를 사회신분 관계로 본다면 만주·노령에 있어서의 노령(老齡)의 지도층 사이에는 약간의 복구적인 경향도 엿보이나, 항전을 수행한 젊은 세대에 있어서는 민족주의 의식 아래 이러한 경향이 완전히 극복되어 항전이 민족적 대중성을 띠게 되었다. 이는 1920년대 국내 형평운동(衡平運動)에서와 같이 항일이라는 같은 민족적 측면에서 과거의 천민계급이 해소되는 시대성과 대응한 것이었다.
* 복구 : (낡은 관습이나 제도 따위로) 복귀
 
결국 1920년대는 일제의 한국강점이라는 쓰라린 민족적인 역경 속에서 과거의 의병항전의 전통을 이어 받아 국내외적으로 항일민족의식이 팽창되어 갔다. 3·1운동 후 독립군의 기지 만주·노령에서는 수많은 항일무장독립군단이 형성되어 이들 무장독립군단에 의해 국내 진격작전이 전개되어 갔다.
 
국내진격작전을 담당한 독립군은 모두가 투철한 항일민족의식을 가진 다양한 신분으로 구성된 20대의 대중청년들로 이들은 5명 전후의 게릴라대의 항전형태로 일제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국내로 진격하여 일제의 기관 파괴·주구배의 숙청·군자금 모금·독립군 모집 등 피눈물 나는 불굴의 항전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의 이같은 무장독립의 항전은 이후의 민족해방운동의 기반을 구축하고, 빛나는 전통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후 1945년까지의 민족해방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은 그 후 보다 험악해진 정세에도 불구하고 상술한 항일무장독립군의 빛나는 전통을 이어받아 끈기있게 지속되었다.

 

 
 
 
註 076 김의환(金義煥), 「1909년(年)의 항일의병부대(抗日義兵部隊)의 항전(抗戰)」, 『민족문화논총(民族文化論叢)』제(第)8집(輯)(영남대학교/嶺南大學校 민족문화연구소/民族文化硏究所, 1987).
 
註 077 주 23)과 같음. = 조선총독부경무국(朝鮮總督府警務局),『조선경찰지개요(朝鮮警察之概要)』(1925), p.123 에 있는 통계표에 의함.
 
註 078 김정명(金正明),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Ⅲ, pp.343~357.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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