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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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어린 시절 및 청년기
 
4. 금강산 수도생활
 
범도(홍범도)는 군대생활과 제지소 고공(雇工: 품팔이) 생활 모두 상급자 및 주인과 싸우고 좋지 않게 결말을 보며 그 생활을 마감하였기 때문에 자기의 성격이 혹시 비뚤어지거나 잘못되지는 않았을까 하고 깊이 반성해 보았다. 생각해보면 참지 못하는 자신에게도 문제는 있었으나 더 큰 잘못은 대개 상대방에 있는 것 같았다. 자신도 남과 다투고 나면 속으로는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늘 다짐을 하고는 했다. 그러면서도 어떤 불공평한 일이나 억울한 사정을 당하면 그러한 사태를 수수방관하지 못하였고 도무지 가만 놓아둘 수 없었다. 이러한 성격은 그가 일면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가 자라온 성장과정을 눈여겨 살펴보면 이해할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원래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도 평안도 사람들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으며 용감하고 동작이 민첩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평안도인의 기질을 맹호가 산림 가운데서 뛰쳐나오는 것 같다(猛虎出林)고 비유하기도 했던 것이다. 평양 사람들이 싸울 때 곧잘 하는 박치기는 유명했다. 물론 홍범도의 인품이나 성격을 태어난 지방의 특색이나 기질에만 한정하여 논하는 시각은 대단히 지엽적이며 위험한 관점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거시적이며 포괄적인 넓은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는 자세가 요청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바와 같이 홍범도는 유년 시절부터 매우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간고한 환경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려는 강인한 의지와 끈질긴 인내심, 그리고 항상 부지런히 일하고 노력하는 적극적 자세가 몸에 배어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에 이와 같은 시련은 기존의 지배질서에 대한 강한 반발과 부정적 태도를 견지하게 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불의와 부정을 미워하며 항상 약자를 돕는 정의감을 드높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홍범도 청년기의 성격은 위에서 본 것처럼 불같이 급한 격정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다.
 
홍범도가 일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 초반까지의 시기를 병영과 제지공장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후일 그의 인생역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군대 경험은 그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데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제지소에서 노동자로 일한 체험은 노동의 소중함과 어려움, 그리고 가진 자들의 횡포를 직접 느끼게 하였을 것이다.
 
제지공장에서 나온 범도(홍범도)는 수안에서 가까운 신계를 거쳐 강원도 북부 지방으로 향하였다. 제지소 주인을 해쳤기 때문에 당분간 신변의 안전이 보장되는 산골에서 조용히 숨어서 지내고 싶었다. 그는 몇 달에 걸쳐 강원도 북부의 이천·평강·철원·김화·회양 등의 산골을 지나며 지주집에서 품을 팔아 약간의 돈을 벌어 노자를 삼기도 했고 어떤 마을을 지나다가는 웬 떠돌이가 마을에 들어오느냐고 쫓겨나기도 하였다. 이곳 마을들은 이천·철원의 일부 지방과 같이 평야지대인 곳을 제외하면 대개 깊은 산골이었으므로 쌀농사 보다는 옥수수나 감자 등을 재배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가난하고 궁색하게 살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는 떠돌이 생활의 서러움을 몸소 겪으며 자신의 신세를 여러 번 한탄하였다. 왜 자기는 이렇게 불행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하고….
 
범도(홍범도)는 이렇게 여러 곳을 유랑하던 끝에 그래도 다른 곳보다는 비교적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다는 동해안 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태백산맥에 연결되는 고산준령을 뒤로하고 망망한 동해를 앞으로 하여 산과 바다가 있고 또 마을 주위에는 농사짓기에 제법 부족하지 않은 평야도 있었다. 그래서 관동지방의 주민들은 빼어나고 아름다운 산과 바다 가운데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하며 때로는 산에서 임업에 종사하기도 하는 등 비교적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그 유명한 금강산을 지나 금강산이 바다에 연한 해금강 방면으로 향하여 회양군의 동해안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남쪽으로 가면 간성이 나오고 북쪽으로 가면 강원도의 최북단인 통천군에 이르게 된다.
 
범도(홍범도)는 천하제일의 명산 금강산을 지나오면서 생전 처음으로 자기의 조국에는 참으로 수려한 강산이 많으며 자랑할 만한 명산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내 곧 자신의 방랑의 처지를 돌이켜 보고는 우울한 심정이 되었다. 그는 온천으로 유명한 온정리를 지나 발길을 옮기다가 양진리라는 마을까지 오게 되었다. 이곳은 금강산의 한 줄기인 관음봉과 문필봉이 지척이어서 경치가 매우 좋았고 앞에 꽤 넓은 평야지대가 있어서 농사일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금강산 쪽으로 조금만 가면 신계사(神溪寺 또는 新鷄寺)라는 절이 있어서 가끔씩 찾아오는 절의 신도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여기에서 얼마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그날그날을 살았다. 하지만 이러한 생활은 결코 안정된 삶을 제공하지 못하였으며 자신의 앞날을 생각해 볼 때 여러 모로 불투명한 하루하루였고 어떤 보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 무렵 신계사에는 지담(止潭) 대사라는 고승이 있어서 불교신도들이 많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래서 범도(홍범도)는 남에게 구차스런 사정을 해가며 품팔이 생활을 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절의 중이 되어 불공평하고 어지러운 속세를 떠나 심신을 수양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되면 먹고 자고 입을 것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고 자신의 억울한 심정이 해소되며 자제력이 없는 급한 성격도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신계사의 지담 대사를 찾아가 저간의 자기사정을 고백하고 절에 머물며 수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지담 스님은 범도(홍범도)를 살펴보고 난 뒤에 우선 절의 잔일을 하며 수도를 하는 상좌(上佐)로서 절에 기숙하며 수도하도록 허락하였다. 상좌승이란 일명 행자(行者)라고도 하는데 절의 온갖 잔심부름이나 궂은 일을 하여야 하는 절의 일꾼이나 다름없는 수도과정의 승려를 말한다. 상좌는 절의 주지나 고승들의 시중에서부터 동네에 나가 시주를 받아오는 일이나 나무해오기·물 기르기·밥하기 등의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였던 것이다. 결국 범도(홍범도)는 하나의 도피처와 마음의 안식처로 절을 택했고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서 승려의 길을 걷게 되었다.
 
1890년경부터 그 이듬해까지 약 1년 반 가량 범도(홍범도)는 신계사에서 삭발하고 중이 되어 지담 스님의 상좌노릇을 하였다. 지담 스님은 범도(홍범도)에게 그럴 듯한 법명을 지어 주었다. 이제 신계사에서 그는 더 이상 ‘홍범도’가 아니었다. 신계사는 아름다운 외금강의 한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바로 옆에는 금강산에서 발원하는 신계천이 흐르고 멀리는 짙푸른 동해바다가 아스라히 보이는 명승지에 위치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양하기에는 매우 알맞은 절이었다. 신계사는 불교계의 31본산시대 때는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말사(末寺)였다.
 
신계사는 신라 법흥왕 6(519)년 보운조사(普雲祖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옛부터 이 절의 옆에 있는 신계천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사람들이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이러한 살생으로 성역의 참된 뜻을 더럽힌다고 하여 보운조사가 용왕에게 부탁하여 고기를 다른 곳에서 놀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하천에는 고기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절 이름에 ‘신 신(神)’자를 넣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왔다. 신계사는 특히 법관 출신의 고승 학눌(學訥: 호 曉峰)이 1925년 입문 수도한 절로서도 유명했는데, 학눌 대사는 1958년에 조계종의 종정(宗正)이 되었고 1962년에는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취임하는 등 한국 불교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분이었다.
 
신계사 승려생활은 범도(홍범도)에게는 아직까지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별천지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고초를 겪으며 절의 어려운 수도 생활에 적응하였다. 그러나 절의 상좌노릇을 하면서 바쁜 가운데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서 지담 스님의 가르침을 받기는 했지만 절에 들어올 때부터 심오한 불교교리를 깊이 이해하고 이곳에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또 자신이 불도를 깊이 깨달아 고승이 되겠다는 철저한 각오도 없었기 때문에 그의 수도생활은 투철한 승려로서의 길도 아니었다. 나이 20이 넘어서 뒤늦게 시작한 불교공부가 잘될리도 없었거니와 범도(홍범도) 자신도 불법의 공부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이 무렵 한글은 깨우쳐서 약간 알고 있는 그였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한문 투성이의 경전은 너무 어렵게 느껴졌으며 머리가 아프기만 하였다. 하지만 그는 지담 스님이나 다른 중들이 하는 설법을 많이 듣다 보니까 대충 불교가 어떤 종교라는 것만은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절에서의 체류기간을 통하여 간단한 한글 문장이나 편지 따위를 이전보다 더 능숙하게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종교나 사상·학문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졌다고나 할까?
 
지담 스님은 원래 수원출신으로 속성은 덕수(德水) 이씨였다. 덕수 이씨는 조선조에서 문무 양 부문에 걸쳐 저 유명한 이율곡(李珥, 율곡 이이)과 이충무공(李舜臣, 충무공 이순신)을 배출하여 명문 씨족으로 알려진 가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임진왜란(1592) 때에 나라와 민족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투철한 애국애족 정신과 백전백승의 뛰어난 전술에 관하여 가끔 이야기 하였으며 비록 산간에 있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는 몸을 아끼지 말고 구국항쟁의 대열에 참가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곤 하였다. 이러한 지담 스님의 수도승답지 않은 현실적 국가관은 그의 가문전통과도 연계되어 있었지만 임진왜란(1592)이 일어나자 승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운 서산 대사(휴정: 休靜)와 그의 제자들인 사명당(유정: 惟政)·처영(處英) 등의 승군 전통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었다. 즉 묘향산 보현사에서 서산 대사가 승군을 조직해서 의병을 일으키자 금강산에서 수도하고 있던 사명 대사도 절의 승려들을 주축으로 의병을 조직하여 평안도 지방으로 이동, 그의 스승인 서산 대사의 휘하에서 크게 활약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이유로 금강산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유점사에는 임진왜란(1592) 때 승군장으로서 크게 활약한 사명당의 유품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었고 또한 사명당의 스승인 서산 대사의 부도(浮圖)도 세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유점사 이외에도 금강산에 있는 장안사·표훈사·원통사·고승사·신계사 등의 각 절에는 임진왜란(1592) 때의 승군조직에 관련된 이야기나 서산 대사 및 사명당에 관한 무수한 일화와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러한 애국 전통이 그곳에서 수도하고 있는 승려들에게도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범도(홍범도)는 이와 같이 신계사의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훈도를 받아 점차 정신적으로 성숙하였고 종래의 무계획적이며 방만하던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절에 있으면서 끈기 있게 참으며 은인자중 할 줄 아는 사려 깊은 사람으로 차츰 성장하였다. 나라가 어지럽고 혼란에 처해있을 때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많은 가련한 중생과 민족, 그리고 국가를 위해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구도자가 아니었던가? 신계사에서 알게 된 김유신이나 이순신·사명당과 같은 그러한 인물들처럼…. 범도(홍범도)에게는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산속에서 혼자만 해탈하겠다고 참선하며 면벽하고 앉아있는 답답한 중들보다는 실제로 도탄에 빠진 중생을 염두에 두고 구제하는 문제에 관심을 갖는 지담 대사의 말씀이 깊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는 가끔 지난날의 행적을 되돌아 보면서 깊이 뉘우쳤다. 과거의 감정에 치우친 과격한 행동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몇 번이었던가 하고….
 
홍범도의 생애에서 이 무렵은 그의 앞날에 자못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아마도 그는 금강산 신계사에서의 은둔과 수도를 통하여 이순신이나 서산대사·사명당과 같은 뛰어난 인물들의 훌륭한 행적과 임진왜란(1592) 당시의 대일항전에 관하여 일상적으로 전해 들으면서 반일감정이 누적되었고 의병 전통이 우리나라에는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사실을 머리 속 깊이 새겼을 것이기 때문이다. 절에서의 상좌생활은 고달픈 것이었고 별로 깊이 있는 사상이나 학문에 접해보지 못했던 그였기에 불교철학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 추측컨대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조그만 이익에 급급하며 감정적인 폭력이나 휘두르고 물질적 부를 축적하는 것보다는 냉철하며 합리적인 통찰력과 장기적 전망에 입각한 올바른 실천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것이다. 또 어떤 일을 도모할 때에는 체계적이며 조직적인 방법을 취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끼기도 하였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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