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너무 길어서 나눠서 올립니다.
홍범도 생애와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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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첫 의병봉기와 시련
1. 첫 의병봉기와 류인석 의병부대
범도(홍범도)는 절의 땔감을 구하기 위해 부근의 야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거나 지담 스님의 상좌승으로서 절의 여러 가지 심부름을 하기 위해 금강산에서 큰 절인 장안사나 유점사 등 다른 절로 자주 왕래하였다. 그런데 그가 신계사에 들어온 지 약 1년 가량 되었을 때 자기 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절의 여승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신계사 근처에는 비구니들만 수도하는 조그만 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 비구니의 속성은 단양(丹陽) 이씨였고 북청 출신이었다. 원래 불교교리 공부에 취미가 없던 데다가 조실부모한 탓으로 무척 외로움을 많이 느꼈던 범도(홍범도)는 비록 서로 승려의 신분이었으나 허심탄회한 우정을 나누고 싶었다. 나이 20이 넘도록 여자와 가까이 지내본 적이 별로 없는 범도(홍범도)는 그 여승과 점차 가까워지게 되었다. 결국 범도(홍범도)와 그 여승은 자기들이 중의 신분이라는 엄연한 한계도 잊고 서로 알고 정답게 지냈으며 처녀·총각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그러한 관계로 발전하였다.
범도(홍범도)는 자신이 신계사에 몸담고 있었지만 끝내는 자기가 불교계에 빠져들 수 없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뒤늦게 알게 된 이 여승에 대한 애정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선경이라고 일컬어지던 금강산의 뛰어난 경관 속에서 청춘남녀들이 향유하는 사랑을 속삭였으며 이성간에만 있을 수 있는 고귀한 정을 주고받곤 하면서 마침내는 승려로서의 한계를 넘는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범도(홍범도)가 신계사에 들어온 지 거의 일 년 반쯤 되었을 때 이제 그들 두 사람은 모두 절을 떠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처하였다. 범도(홍범도)와 사랑을 나누던 단양 이씨 비구니의 배가 불러와서 더 이상 절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92년 여름 무렵 범도(홍범도)는 이제 중이라는 굴레를 벗어 던진 속인의 신분으로서 자기와 마찬가지로 파계하고 평범한 아녀자의 처지로 돌아온 단양 이씨 처녀를 데리고 신계사를 떠났다. 두 사람은 금강산을 벗어나 원산 방면으로 향하였다. 정식으로 결혼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 처녀의 고향인 북청으로 가서 혼례를 올리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원산 근처에서 불의의 변을 당한 뒤 서로의 행방을 모른 채 헤어져 버리고 말았다. 홍범도는 이씨 처녀의 행방을 탐문하였으나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하였다. 그녀와 갑자기 생이별을 하게 된 현실이 너무 원통했다. 더구나 그녀가 혹시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에 범도(홍범도)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이 아팠다. 이제 또 다시 혼자 되었으니 어디로 간단 말인가? 그러나 범도(홍범도)가 그 때 알지는 못했지만 이씨는 그와 뜻하지 않게 헤어진 뒤 북청 친정에 가서 그의 아들을 낳아 기르게 된다.
범도(홍범도)는 또 정처 없는 발길을 옮겨야 했다. 그러다가 신계사에서 멀지 않은 강원도 회양군의 먹패장골이라는 곳이 문득 떠올랐다. 이곳은 금강산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깊은 산골이었는데 신계사에 있을 때 가끔 이야기를 듣던 고을이었다. 범도(홍범도)는 이곳의 깊숙한 골짜기에서 거의 세상과는 발길을 끊고 약 3년간 머무르면서 남의 땅을 빌어 농사를 짓기도 하고 군대에 있을 때 익혔던 사격솜씨를 발휘하여 사냥을 하기도 했다. 또 한편으로는 조용히 참선하며 수양도 하였다. 그리하여 절에 있을 때 깎았던 머리는 다시 자라서 상투를 틀어 올릴 수 있었으며 수염도 제법 자라서 완연한 성인으로서 손색이 없는 어엿한 청년의 풍채를 보이게 되었다.
홍범도가 먹패장골에 있던 동안 조선의 정세는 크게 변하였다. 갑오년인 1894년에 삼남지방은 물론 황해·강원·평안도의 일부 지방까지도 동학군이 주동이 되고, 봉건적 지배층의 부패와 착취에 반발하고 있던 농민들이 대거 가담한 농민들의 봉기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를 동학농민전쟁(1894) 또는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청나라와 일본이 국내에 진주하여 청일전쟁(1894)이 일어났다. 청일전쟁(1894)은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의 이듬해인 1895년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은 이후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몰아내고 청과 시모노세끼(下關)조약(1895)을 맺어 청으로부터 요동(遼東)반도와 대만(臺灣)을 할양받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변상받았다.
청일전쟁(1894) 이후 일본은 노골적인 침략의 손길을 조선에 뻗치기 시작했다. 일본은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등 친일적 인사들을 도와 정부의 내각을 구성케 했고 그들로 하여금 일시적으로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케 했다. 이 같은 일련의 개혁을 우리는 갑오경장 또는 갑오개혁(1895)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여러 가지 개혁조치들은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에 입각한 진보적 개화론자들이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조선의 부국강병을 목적으로 자주적으로 취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그들의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하여 무리하게 위협적으로 강요한 요소도 많이 내포되어 있었다. 때문에 당시의 민중들은 일본의 의도가 다분히 반영된 그 개혁조치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와 같은 조선 민중의 반일감정을 폭발적으로 격화시킨 사건이 바로 1895년 8월 20일(음력; 양력으로는 10월 8일)에 일제의 하수인들에 의해 야만적으로 자행된 민비(명성황후) 시해사건이었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의 간접적 배경이 된 것은 소위 ‘삼국간섭’을 계기로 하여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신이 떨어지고 러시아의 힘이 일본을 압도하자 그 기회를 틈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의 내정간섭을 물리치려던 조선정부의 배일친로(排日親露) 정책이었다. 즉 고종은 김홍집·박영효 등의 친일내각을 물리치고 이범진(李範晋)·이윤용(李允用)·이완용(李完用) 등으로 친러시아 내각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호시탐탐 조선침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일본은 크게 당황하여 자기세력의 만회책을 도모하게 되었다. 삼국간섭이란 1895년 5월경 러시아·독일·프랑스 등이 연합하여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일본을 위협한 결과 일본이 이에 굴복해서 요동반도를 청에 돌려준 일련의 국제적 사건을 말한다.
삼국간섭(1895) 이후 조선에서 세력만회에 부심하던 일본은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과 반목하며 배일친로의 핵심적 인물이라고 지목되어온 민비(명성황후)를 제거할 흉계를 꾸몄다. 그리하여 일본인 낭인(깡패)과 군대를 동원하여 민비(명성황후)를 무도하게도 시해(을미사변, 1895)하였고 조정의 친로파를 축출한 후 김홍집·유길준 등으로 하여금 다시 내각을 조직케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의 민족감정을 크게 자극 하였고 열강도 일본을 비난하였다.
을미사변(1895) 후에 수립된 김홍집 내각은 잠시 중단되었던 개혁을 더욱 급진적으로 강행하였다. 양력의 사용(건양: 建陽)을 비롯해서 지방 행정구역을 8도에서 23부(府)로 개편하며 군제의 개편 등을 단행하고, 급기야는 단발령을 내려 강제로 국민들의 머리를 잘라서 반일감정에 불을 붙였다. 특히 단발령의 강제적 실시는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라 하여 머리카락을 매우 소중히 여겨오던 유생들은 말할 것도 없이 온 국민들의 커다란 반발을 야기하였고 을미사변(1895) 때문에 극도로 날카로워진 국민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리하여 을미사변(1895) 이전에도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의병들의 봉기는 이제 을미사변(1895)과 단발령의 강행 이후 전국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범도(홍범도)가 있는 먹패장골은 깊은 산중이었으므로 서울 등 전국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소문이 한참 뒤늦게 전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사건 발생 후 한참 뒤에야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이라든가 청일전쟁(1894), 을미사변(1895) 그리고 각지에서의 의병봉기에 관한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그러한 소식을 전해 듣고 분개하였다. ‘왜놈’이 조선 땅을 짓밟고 있는 현실이 너무 원통했던 것이다. 자기가 신계사에 있을 때도 보았듯이 임진왜란(1592) 때 왜병에 의해 불타버린 절이 한두 군데였던가? 그래서 자기도 어떻게 해서든지 기회가 생기면 일본에 대하여 꼭 원수를 갚겠다고 벼르면서 그 골짜기를 나와 대처로 향하였다. 이때가 대략 을미(1895)년 8월 23일 경(음력)이었는데 범도(홍범도)의 나이는 만 27세로 훤칠한 헌헌장부로서 혈기왕성할 한창 때였다. 실제로 홍범도는 뒷날 “반일·반봉건(反封建)의식에 눈을 뜬 것은 갑오농민전쟁(동학농민전쟁, 1894) 때였다.”고 밝혔다.
* 헌헌장부 : 외모가 준수하고 풍채가 당당한 남자
먹패장골에서 나온 지 약 23일 뒤인 음력 9월 18일쯤(양력 11월 4일경) 범도(홍범도)는 장안사에서 회양읍과 철원의 금성(金城) 방면으로 넘어오는 길목인 단발령을 지나오다가 고개 정상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이의 이름은 김수협이었고 황해도 서흥 출신이었으며 연배가 범도(홍범도)와 비슷했다. 단발령은 높이 1,241미터의 험준한 고개로서 금강산 서쪽 천마산(天摩山) 중턱에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이곳을 지나다가 빼어난 금강산의 여러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출가를 다짐하는 뜻에서 삭발하였다 하여 단발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단발령 근처 남서쪽에는 오량동(五兩洞), 북동쪽에는 피목정(皮木亭)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오량동은 행인들이 단발령을 지날 때 산적을 막기 위해 안내인에게 다섯 냥의 돈을 주어 호송을 부탁한 데서 그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홍범도는 김수협과 함께 고개 위에서 쉬다가 통성명을 하며 서로 친하게 되었다. 김수협은 당시의 국내사정을 말하며 비분강개하였다. 범도(홍범도)도 그와 비슷한 시국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의 숨김없는 심정을 토로하며 의기투합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미약하나마 힘을 합쳐 의병투쟁을 벌이기로 약속하고 우선 의병의 모집과 무기의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두 사람은 당장은 아무것도 없으니 먼저 친일인사와 일본군이 있는 큰 도회지로 가서 그들을 처단하고 군자금과 무기를 빼앗기로 작정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오량동을 지나 금성읍에 이르렀는데, 그곳 장거리에 때마침 일본군의 한 부대 약 200여 명이 들어와 있었다. 두 의병은 일본군 병사가 어깨에 메고 있는 최신식 소총을 보니 무척 욕심이 났다. 당시 일본군은 ‘무라다(村田)’식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는데, 이 총은 공주 우금 고개 전투를 비롯한 동학농민군과의 각종전투와 청일전쟁(1894)에서 큰 위력을 떨쳤었다. 일본군은 이러한 최신식 무기로 농민군을 도처에서 학살하였던 것이다. 범도(홍범도)와 김수협은 일본군의 무기를 빼앗고 싶었지만 워낙 숫자가 많아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얼마 후에 두 사람은 금성 장거리에서의 낭패한 경험을 통하여 자신들과 같은 소수의 인원으로써 다수의 적을 상대로 싸울 수 있는 유리한 지형을 갖춘 지점을 물색하게 되었다. 이리저리 찾아다닌 결과 그들은 경기·강원 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길목으로서 천하의 험로로 알려진 철령(鐵嶺)을 찾아냈다. 철령은 높이 685미터의 고개로서 회양의 북쪽에 위치하여 강원도와 함경도를 구분하는 관문이었다. 우리는 지금도 이 고개의 북쪽인 함경도 지방을 관북지방, 동쪽인 강원도 동부지역을 관동지방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곳은 서쪽의 풍류산(風流山), 동편의 장수봉이 천하의 요새를 이루고 있었고 당시에도 수비하기에 매우 알맞은 석성이 남아 있었다. 이리하여 홍범도와 김수협 두 사람은 그들이 능히 수십 명을 대적할 수 있는 고개의 고지 한곳을 선정하여 견고한 진지를 만들고 일본군이 지나가는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일본군이 나타났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수백 명에 달하는 대부대였다. 두 사람은 이번에도 공격할 수 없었다.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는 일본군 병사들이 사용하고 있는 장총에 비하여 성능이 훨씬 떨어지는 화승총이었기 때문에 소수의 적이 아니고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두 사람이 무척 고생하며 기다린 보람도 없이 이날은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 이튿날 아침에는 약 10여 명의 일본군이 원산방면에서 서울로 가기 위해 별로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철령을 천천히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이야말로 천재일우의 좋은 기회였다. 범도(홍범도)와 김수협은 날랜 화승 놓는 솜씨로 화승총을 발사하여 순식간에 그들을 거의 궤멸시키고 말았다. 일본군은 이들을 향하여 총을 쏘아 댔으나 안전하게 엄폐된 고지의 요새에서 사격하는 정확한 사격솜씨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 전투가 바로 홍범도가 전개한 최초의 의병전투였다. 아직까지 남한의 학계에서는 1907년 11월의 후치령(厚峙嶺) 전투를 홍범도가 처음으로 전개한 의병전투라고 보고 있는데, 앞으로 면밀한 검증을 거친 뒤에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범도(홍범도)와 김수협은 철령전투에서 10여 명의 일병을 몰살시킨 후에 그들이 갖고 있던 소총과 탄약 등을 전리품으로 노획하여 함경도 안변의 학포(鶴浦)로 피신했다. 그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일병의 추격을 받아 견디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학포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여 가까스로 거기에서 뜻을 같이하는 약 12명의 의병을 모집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합계 14인의 소규모 의병부대가 결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가 바야흐로 범도(홍범도) 나이 만 28세인 1896년 여름이었다.
그런데 이무렵 전국각지에서는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을미사변(1895)과 단발령 이후 유생을 중심으로 한 의병봉기가 치열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물론 이때 함경도와 강원도 지방에서도 의병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강릉에서 봉기하여 함경도 남부지방까지 북상해서 크게 활약한 민용호(閔龍鎬) 부대, 춘천에서 약 1,000여 명의 대병력으로 기병한 이소응(李昭應) 부대, 그리고 단양·충주·제천 등지에서 관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강원도로 이동하여 싸움을 계속하던 류인석(柳麟錫) 부대, 안동의 김도화(金道和) 부대, 진주의 노응규(盧應奎) 부대, 광주의 기우만(奇宇萬) 부대 등은 대표적인 의병부대였던 것이다. 이외에도 함흥 지방에서는 민용호의 관동창의군과 밀접히 연관되어 활동하던 최문환(崔文煥) 의병부대가 함흥부의 관리들을 처단하는 등의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홍범도가 학포에서 모집한 의병들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이거나 떠돌이 또는 산간에서 사냥을 하던 포수들이었다. 범도(홍범도)는 군대경험과 산중에서의 사냥 경험을 되살려 얼마 동안 이들에게 훈련을 실시하여 전투요원으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적 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의병부대의 진용을 어느 정도 구비한 뒤에 이들은 안변군에 있는 석왕사(釋王寺)로 옮겨와서 봉기의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석왕사는 태조 이성계의 해몽과 관련된 전설이 유명한 절이었다. 이곳으로 온 이유는 바로 앞에 원산에서 서울로 가는 큰 길이 있어서 일본 상인들의 왕래가 잦았고 또 원산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원산 거류 일본인과 상인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이 부근에 자주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추가령(楸哥嶺)과 철령이 나오는 것이다.
최초의 홍범도 의병부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작은 부대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화승총으로 무장되었고 철령에서 빼앗은 소수의 신식 소총도 갖추고 있었다. 이들이 석왕사에 주둔하고 있을 때 충주와 제천에서 장기렴(張基濂)이 이끌던 관군 및 일본군과 싸우다가 패전한 류인석 부대가 가까운 안변의 영풍으로 옮겨와서 자기들과 같이 싸울 의병을 모집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홍범도와 김수협은 의논하여 류인석 의진에 합류하기로 했다. 소수의 부대로 활동하기보다는 류인석과 같은 명망있는 지도자가 인솔하는 대부대와 함께 싸우는 편이 낫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註2) 류인석은 헌종 8(1842)년 춘천 가정리(柯亭里)에서 출생했다. 이후 그는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와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에게 배워 화서학파의 맥을 계승하였다. 그의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이었다. 그는 1866년 병인양요와 1876년 강화도조약의 체결시에도 상소를 올려 내수자강론(內修自强論)과 개항 반대론을 극력 주장하며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에 앞장섰다. 이후에도 류인석은 화서학파의 학통과 정신을 이은 위정척사론자들의 핵심적 인물로서 충분한 힘을 갖추지 못한 개화는 국가와 민족을 파멸시킬 뿐이라는 강경한 척사론과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의 논리를 펴며 반개화(反開化) 및 반일운동을 이끌었다.
을미사변(1895) 후에 의병투쟁이 치열하게 전개될 당시에 그는 최익현 등과 함께 유림의 상징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그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의 논리를 전개하며 의병봉기에 적극 참가하였는데, 1896년 초에는 화서학파 계열의 유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호좌(湖左) 의병진영의 창의대장(倡義隊長)으로 추대되기에 이르른다. 류인석 의병부대는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기도 하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우세한 화력과 일본군의 후원을 받는 관군에 참패하고 소위 ‘북천지계(北遷之計)’의 방략에 의해 북상하게 되는 것이다.
* 거의소청(擧義掃淸) : 스스로 목숨을 끊어 욕을 당하지 않는다
* 화서학파 : 화서 이항로의 학설을 토대로 한 학파로 경기 지방을 기반
* 호좌(湖左) 의병 : 제천의병 / 호좌(湖左) : 충청좌도 = 충청북도
‘북천지계’란 호서·관동지방에서 민중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또 관군의 군세가 강하여 중부지방에서 싸우기가 불리하니 인민의 기질이 강건하고 용맹하며 무예에 능한 사람이 많은 서북지방으로 옮겨가서 의병운동을 계속하자는 임기응변적 전술을 말한다. 류인석의 이 같은 논리는 1907년 고종(광무)황제의 퇴위와 정미(丁未) 7조약(한일신협약, 1907)의 체결, 그리고 군대해산 이후에 나라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국외 기지건설론과 지구전의 논리로 발전하게 된다. 즉 류인석은 전국의 의병부대는 전투방법을 지구전으로 하되 무산·삼수·갑산 등 백두산 부근지역을 무대로 삼아 중국과 러시아에 기지를 두어 정예군을 양성, 운동을 펴나가야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함부로 국내에 진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류인석의 이러한 계책은 후일 홍범도의 항일무장투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류인석 의병부대는 한때 영남지방에 내려갔다가 1896년 6월 하순경부터 강원도 지역으로 북상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정선을 거쳐 대화(大和)에 이르른 동년 7월 11일(음력 6월 1일)에 포고문과 통문을 발송하여 그해 6월 4일 충청도 수산(壽山)에서 결정했던 서북지방으로의 행선지를 재확인했다. 그 후 류인석 의진은 청계·원당·인제·소현(蘇峴)·춘천을 거쳐 양구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후, 다시 금성·평강·소금강·안변·양덕·청간·영흥·맹산을 거쳐 8월 19일에는 평안도 덕천군의 덕천읍에 도착하였다. 그 뒤에도 영변·운산·초산을 거쳐 마침내 그해 8월 28일에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서간도 지방으로 망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류인석 등 약 240여 명의 의병들은 요녕성(遼寧省) 회인현(懷仁縣; 환런현/환인현/桓仁縣의 옛이름)에 이르렀을 때 중국관리로부터 의병의 해산을 요구받아 수 천리 장정 끝에 천신만고의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투쟁해 온 보람도 없이 눈물을 머금고 의진을 해산하게 된다. 이후 류인석을 비롯한 21명 등은 선양/심양(瀋陽)으로 가서 중국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그들 이외에 219명은 귀국하여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다.
* 의진(義陣) = 의병
홍범도와 김수협 등 의병들은 류인석 부대가 안변·양덕·영흥·맹산 등 평안도와 함경도 접경 지방을 경과하며 투쟁할 무렵 여기에 참가하여 이들과 같이 줄기찬 항쟁을 전개하였다. 홍범도 등은 류인석 부대와 함께 그동안 세 번의 큰 전투를 치렀다. 이 와중에 이들은 크게 패하여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김수협이 전사했고 다른 의병들도 하나 둘씩 전투 중에 전사하거나 도주하여 결국은 범도(홍범도) 혼자만 남게 되었다. 범도(홍범도)는 소수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어렵게 조직했던 의병조직이 무너지고 홀로 남게 되자 더 이상 의병활동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위정척사라는 보수적 이념과 반일·반개화의 의지는 철석같이 강했지만 실질적 전투력을 발휘하는 데서는 약간 문제가 있던 류인석 의진과 결별하고 거기에서 도망하여 다른 곳으로 피신하게 되었다註3) 한편 류인석 의병부대는 평안도의 북단인 초산에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들어갔다. 그런데 서북지방에서 이 부대에 참가했던 많은 사람들과 봉기 이래 류인석을 추종하여 그곳까지 종군했던 인사들 가운데 일부는 강을 건너지 않고 국내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몇 년 뒤에 일제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자 다시 의병투쟁을 위해 봉기하게 된다.
홍범도와 류인석은 서로의 출신성분과 지위가 달랐고 지향하는 바 그 이념은 비록 차이가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같이 투쟁하였다. 두 사람은 이 때 헤어지지만 1908년 7월경 류인석이 50∼60여 명의 추종인사와 더불어 러시아령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에 망명하고 홍범도 역시 의병활동이 여의치 않자 무기와 탄약을 구하기 위해 1909년 1월경 연해주 크라스키노(우리 동포들은 연추라고 부름)를 잠시 방문함으로써 다시 만나게 된다. 홍범도의 호(號)는 여천(汝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무렵 그가 류인석 의병부대에 참가했을 때 류인석이 자신의 자 여성(汝聖)과 비슷한 여천(홍범도)이라고 지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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