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04590
광해군은 왜 못난 '김개똥'을 사랑했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 세 번째 이야기
13.09.09 15:01 l 최종 업데이트 13.09.09 15:01 l 김종성(qqqkim2000)
▲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 ⓒ MBC
역사 기록에서 군주의 애정관계는 웬만해선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군주의 위상이 크게 격하된 경우는 다르다. 이런 경우에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군주의 애정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광해군의 사례도 그런 경우 중 하나다.
1623년에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쿠데타(소위 인조반정) 주역들은 광해군이 살아 있을 때인 1634년에 광해군 시대 역사서인 <광해군일기>를 완성했다. 참고로, 광해군은 1641년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사망했다. 쿠데타 주역들은 <광해군일기>를 통해 광해군의 여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이런 기록을 읽다 보면, 광해군의 이성관계가 국정 수행에 부정적 영향을 준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광해군과 그 여인들을 비난하는 기록들에서 우리는 되레 광해군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여성을 가까이할 때도 하나의 뚜렷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과 정치는 별개가 아니라 하나며, 필요하다면 사랑은 정치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는 MBC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 묘사된 광해군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불의 여신 정이>에서 광해군은 자기 일에 충실하고 성격적으로 당찬 유정을 좋아한다. 왕실 도자기를 제조하는 사옹원분원(아래 분원)의 하급 직원인 유정은 매우 불리하고 위험한 처지에서 도자기공의 꿈을 키워간다.
유정의 양아버지는 왕실에 죄를 지었다는 모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분원 실세의 미움을 받은 상태에서 죽었다. 그 분원 실세가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유정은 분원 내에서 살얼음을 디디는 것처럼 조심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광해군은 그런 유정을 헌신적으로 도와준다. 왕자의 신분으로 도자기공 지망생을 도와주는 일로 인해 간혹 곤경에 처하면서도 그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래서 드라마 속 광해군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주는 스타일로 그려진다. 그는 유치환 시인의 <행복>에 나오는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남자다.
우체국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행복> 속의 주인공은 시의 첫 구절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며 마지막 구절에서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라고 말했다.
시 속의 주인공은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라는 사랑의 철학을 갖고 있다. 그는 사랑 그 자체로써 자기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드라마 속의 광해군은 그런 남자다.
광해군의 사랑 스타일
▲ 작업실에서 대화하는 광해군(이상윤 분)과 유정(문근영 분). ⓒ MBC
하지만, 실제의 광해군은 드라마와 정반대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는 실리외교와 개혁정치라는 업적을 남겼지만, 사랑에서만큼은 꽤 이기적인 남자였다. 그의 사랑 철학은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점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두 여인을 위험한 정치문제에 끌어들여 반대파의 공세에 노출시킨 데서도 잘 드러난다.
광해군이 가장 사랑한 여인은 상궁 김개시(김개똥·김가회)였다. 광해군은 그를 권력 최고 실세의 위치에 올려놨다. 광해 5년 8월 11일 치(1613년 9월 24일 치)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의 킹메이커인 이이첨도 국정의 핵심 사안과 관련해서는 김개시를 통해 광해군의 재가를 얻어내야 했다. 이처럼 광해군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을 정치 현장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김개시 같은 여인을 떠올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대단히 예뻤나 보다'라는 생각을 품곤 한다. 하지만, 그는 상당히 못난 외모로 유명했다. 위 날짜의 <광해군일기>에서는 그를 두고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고 말했다. 외모가 상당히 못났던 것이다.
못생겼다고 쓰면 될 일이지, 왜 그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했을까. 사관들은 선비 출신의 관료들이었다. 여인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은 선비의 체면을 해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개시가 광해군의 관심을 끈 비결이 외모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음을 알려주고자 이런 식으로 외모 이야기를 한 것이다.
광해군이 김개시를 가까이한 것은 김개시의 두뇌와 업무 처리 능력 때문이었다. 김개시는 핵심적인 국정 현안에서 광해군에게 조언을 제공하고, 광해군을 대신해서 궐 밖에 나가 정치문제를 조율했다. 광해군이 수많은 궁녀 중에서 김개시에게 특히 주목한 것은 이런 능력 때문이었다.
그렇게 가까웠는데도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김개시에게 신체적 이유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친밀한 사이였는데도 자녀가 없었다는 데서 두 사람의 친밀성이 일반 연인 간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김개시는 후궁이나 왕비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광해군의 정치활동을 도우려면 후궁 신분보다는 궁녀 신분이 더 편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은 광해군이 자기를 왜 좋아하는지를 김개시가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김개시는 광해군이 정치적 필요 때문에 자기를 좋아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기적인 남자였던 광해군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에 있는 광해군묘. ⓒ 김종성
정치적 필요에 따라 여성을 가까이하는 광해군의 스타일은 또 다른 후궁인 정소용(소용 정씨)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광해 5년 12월 30일 치(1614년 2월 8일 치)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정소용은 애교를 잘 부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사무 처리에 매우 능숙했다.
그는 광해군을 대신해서 공문서를 처리하고 재가까지 대신 내릴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이 갑절로 신임했다"는 표현을 보면, 광해군이 이런 여성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광해군이 머리 좋고 유능한 여성들만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또 다른 후궁인 임소용(소용 임씨)은 외모와 애교를 바탕으로 광해군의 마음을 샀다. 광해군이 여성의 외모를 전혀 안 보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광해군이 여성의 두뇌와 능력을 중시한 것은 무엇보다도 '인력난' 때문이었다. 그는 세자 시절에도 소수파였고 왕이 돼서도 소수파였다. 그래서 그는 항상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것도, 머리 좋고 유능한 사람들이 필요했다.
더군다나 실리 외교와 개혁 정치라는 모험을 추구하는 입장이었으므로, 그는 더욱 더 인재에 대한 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유능한 남자뿐만 아니라 유능한 여자를 좋아했다. 그는 여자 친구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는 남자가 아니라, 공부 잘하는 여자 친구한테 도움을 받는 남자였다.
광해군은 사랑보다는 정치를 더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사랑을 선택했다. 그는 자기한테서 뭔가를 빼앗아가는 여자보다는 자기가 뭔가를 빼앗아올 수 있는 여자를 더 선호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김개시나 정소용 같은 여인들이 광해군 시대에 부각됐다. 결국 이로 인해 광해군의 여인들은 광해군과 함께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 자기의 정치가 위험한 정치라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여성들을 정치에 끌어들인 것을 보면, 광해군이 사랑 문제에서만큼은 매우 이기적인 남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에 성악가이자 연극배우였던 윤심덕은 모던걸(신여성)의 화려한 삶을 살다가 유부남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인생을 마감했다. 그에 관한 어느 평전에 따르면, 죽기 직전에 그는 동생에게 "나의 경험이 나에게 고하는 바에 의하면 사랑은 주는 본능이 아니라 빼앗는 본능이며, 방사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빨아들이는 에너지"라고 말했다. '사랑은 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는 것'이란 말을 남긴 뒤, 그는 독일 유학을 준비하던 김우진을 설득해서 현해탄에서 동반 자살을 단행했다.
개혁 군주 광해군도 애정 문제에서만큼은 윤심덕처럼 이기적인 삶을 살았다. 그렇다고 여성을 괴롭히거나 금전적으로 착취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정치에 도움이 될 만한 여성들을 특별히 가까이했다. 선의의 의미에서 그는 여성의 능력을 빼앗는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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