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65863
귀양에 사약까지... 14살 숙종의 보수파 길들이기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 세 번째 이야기
13.05.18 15:08 l 최종 업데이트 13.05.18 15:08 l 김종성(qqqkim2000)
▲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숙종(유아인 분). ⓒ SBS
한국에서 보수파나 기득권층을 혼내준 대통령은 없었다. 보수파에 맞섰다고 볼 수 있는 대통령은 있었지만 말이다. 총칼을 든 박정희·전두환 정권도 결국 보수파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이 점에서, 조선 제19대 주상인 숙종을 따라갈 만한 통치자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조선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다. 물론 숙종이 혁명적인 군주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숙종처럼 통쾌하게 보수파를 혼내준 통치자는 드물 것이다. 광해군이나 정조도 그런 군주가 아니었나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두 군주는 보수파에 맞섰을 뿐 혼내주지는 못했다.
숙종은 임진왜란 62년 뒤인 1661년에 태어나서 1674년에 왕이 됐다. 우리 나이로 14세에 왕이 됐으니, 요즘 같으면 중학교 1학년 나이에 권좌에 오른 셈이다.
어린 왕이 즉위한 경우에는 수렴청정을 실시해야 했다. 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나 할머니가 왕권을 대신 행사하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숙종의 경우에도 당연히 수렴청정이 실시됐어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숙종 때는 그런 게 없었다. 숙종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직접 통치권을 행사한 것이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었다. 숙종이 서인당의 총재이자 기득권층의 구심점인 송시열을 '처리'한 방식을 보면, 그가 14세에 수렴청정도 없이 왕이 된 이유를 절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보수파의 상징인 송시열을 처리했을 때, 숙종은 14세였고 송시열은 68세였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이어지는 글을 읽어보면, <장옥정, 사랑에 살다> 속의 숙종이 멋진 남자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살얼음판 같은 정치상황에서 왕이 된 숙종
▲ <숙종실록>에 따르면, 숙종은 1674년 9월 22일 창덕궁 인정문에서 왕위에 올랐다. ⓒ 김종성
숙종의 아버지인 현종은, 50년간 서인당이 잡고 있던 정권이 남인당으로 넘어가는 와중에 갑자기 사망했다. 서인당과 남인당의 성향을 굳이 구분하자면, 서인당은 '더 보수파'이고 남인당은 '덜 보수파'였다. '더 보수파'에서 '덜 보수파'로 권력이 이행되는 시기에 왕권이 갑작스레 교체됐기에, 숙종은 '더 보수파'의 준동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살얼음 같은 위험한 상황에서 왕이 됐다.
물론 숙종이 즉위할 당시가 살얼음이 어는 계절은 아니었다. 숙종이 즉위한 날짜는 음력으로 갑인년 8월 23일, 양력으로는 1674년 9월 22일이었다. 추석 8일 뒤에 즉위했으니 살얼음이 얼 리는 없었지만, 숙종 앞에 놓인 정치 상황은 살얼음 못지않았던 것이었다.
현종이 죽은 지 사흘 뒤인 동시에, 숙종이 왕이 되기 2일 전이었다. 일반적으로, 왕이 죽으면 5일간은 왕위를 비워뒀다. 이때 숙종은 세자 신분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대통령 당선자' 같은 입장이었다.
'어린 왕' 숙종과 '보수파 총재' 송시열의 기 싸움
'대통령 당선자' 숙종은 국민화합을 위해 송시열에게 차기 정부의 원상(院相) 자리를 제안했다. 원상은 어린 왕을 보좌하는 재상급 벼슬이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고문 같은 것이다. 정권이 서인당에서 남인당으로 이행되는 혼란기였으므로, 안정적인 정권교체를 위해 서인당 총재인 송시열의 환심을 사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송시열은 숙종의 요청을 단칼에 거부했다. 권력에 욕심이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니다. 권력이 남인당으로 완전히 넘어가지 않도록, 이번 기회에 '애송이 임금'을 길들이자는 의도였다.
숙종은 즉위식 다음 날에도 송시열에게 사람을 보냈다. 송시열은 그럴 줄 알고 미리 한양을 떠나 버렸다. 어린 임금의 애를 좀 더 태울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숙종은 이번에는 현종의 지문(誌文)이라도 지어 달라고 부탁했다. 지문은 죽은 이의 신상 정보와 무덤의 위치 등을 담는 글이다.
송시열은 이것마저 거부했다. 어린 왕이 항복할 때까지 버티기로 작정한 것이다. 왕이 글 하나만 써달라고 부탁하는데도 이를 거부했으니, 송시열의 행동은 왕을 모독하는 처사였다. 68세 송시열은 14세 숙종과의 대결에 그런 식으로 자존심을 걸었다.
이쯤 되면 웬만한 왕들은 송시열의 희망사항을 들어줬을 것이다. 적어도 친(親)보수로 선회하는 시늉이라도 해서, 송시열의 비위를 맞춰줬을 것이다. 송시열도, 상대방이 열네 살밖에 안 되니 조만간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을 법하다.
'경천동지'라는 말은 이런 때 써야 할 것이다. 송시열은 숙종이 자기 비위를 맞춰줄 것이라고 예상했겠지만, 만약 그렇게 예상했다면 그것은 송시열의 오판이었다.
기득권층을 대하는 숙종의 자세
당시 조중동 같은 신문이 있었다면 "어린 왕이 환장했다"고 보도할 만한 일이 발생했다. 숙종이 송시열을 정1품에서 종1품으로 한 단계 강등시킨 것이다. 당신이 아무리 보수파의 총재이고 기득권층의 우상이라 해도 당신한테 비굴하게 굴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그렇게 천명한 것이다.
송시열은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없는 곳에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는 말처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른다"고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는 현종의 지문을 지으라는 숙종의 명령을 계속 거부했다. '너 같은 게 세게 나오면 나는 더 세게 나가겠다'는 식이었다.
숙종은 이번에는 새로운 방법으로 송시열을 골탕먹였다. 송시열의 제자인 이조참판(차관급) 이단하에게 현종의 행장(죽은 이의 행적을 정리한 글)을 짓도록 한 뒤, 거기에 송시열의 잘못을 기입하도록 한 것이다. 제자를 이용해서 그 스승을 난처하게 만든 것이다. 열네 살짜리의 공격이라고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숙종은 분명히 열네 살이었다.
왕명 때문에 스승의 잘못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이단하는 죄스러운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송시열을 비호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14세 숙종은 40세 이단하에게 "스승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모르는구나"라며 이단하의 감투를 벗겼다. 관직을 빼앗은 것이다. 뒤이어 보수파 선비들이 상소 등을 통해 송시열을 옹호하자, 숙종은 그들을 귀양 보내거나 꾸짖는 방법으로 억눌렀다.
기득권에게 사약 내린 왕이 무능하다고?
▲ 조광조와 함께 송시열을 추모하던 곳인 도봉서원. 서울시 도봉산에 있다. ⓒ 김종성
강공을 이어가던 숙종은 즉위 4개월 보름 뒤인 숙종 1년 1월 13일(양력 1675년 2월 7일)에 전보다 훨씬 더 경천동지할 만한 조치를 내놨다. 송시열을 귀양 보낸 것이다. 송시열 인생에서 이것은 최초의 귀양이었다. 보수파의 지지를 배경으로 오랫동안 왕들을 압박해온 송시열이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것'한테 말이다.
천주교 추기경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있던 송시열이 형벌을 받게 됐으니, 이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런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이 10대 중반의 신임 왕이었다는 것은 훨씬 더 충격적인 일이었다. 숙종을 어리다고 얕본 송시열로서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참담했을 것이다.
이로부터 15년 뒤, 송시열은 또 한 번 숙종에 맞섰다. 숙종이 장옥정(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것을 극력 반대했던 것이다. 그러자 숙종은 이번에는 가차 없이 사약을 내렸다. 보수파들이 하늘로 떠받드는 송시열의 입 안에 사약을 쏟아 부은 것이다. 기득권층이 존경하는 보수파 총재를 이렇게 함부로 다룬 왕은 찾기 힘들 것이다.
'아니, 숙종은 부인네들의 치마폭에 휩싸인 무능한 왕이었다고 하던데'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서인당 출신인 김만중이 지은 <사씨남정기>란 소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실제 숙종은 소설 속의 숙종과 정반대였다.
물론 숙종은 혁명적이거나 혁신적인 군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숙종처럼 기득권층을 혼내준 군주는 찾기 힘들다. 숙종이 그런 군주가 된 것은 그 개인의 역량뿐만 아니라 국내외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숙종처럼 보수파의 기를 단단히 꺾은 왕은 희귀했다.
숙종처럼 미친 척 하고 보수파에 맞설 대통령을 갖는 것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인 것일까.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수파의 수족이 돼 가는 듯한 62세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서, 즉위하자마자 보수파에 망신을 준 14세 숙종 임금을 그리워해 본다. 현실에서 그런 왕을 만나기 힘들다면, 사극에서라도 그런 왕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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