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48562
▲ 혜경궁 홍씨의 모습을 형상화한 밀랍인형.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환갑잔치(진찬연·진찬례)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 김종성
▲ 창경궁의 자경전 터.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소재. ⓒ 김종성
▲ 자경전 터에 관한 설명문. ⓒ 김종성
▲ 경모궁 터.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 소재. 서울대 의과대와 서울대병원 사이에 있다. ⓒ 김종성
▲ 환갑잔치 때 어머니에게 절하는 정조의 모습. ⓒ 김종성
정조의 '어머니 사랑'은 불순했다
[사극이 못다 한 역사 이야기⑩] 긴장 관계에 놓여있던 정조-혜경궁 홍씨
13.03.29 18:46 l 최종 업데이트 13.03.29 18:46 l 김종성(qqqkim2000)
▲ 정조의 초상화. 사진 속의 모습이 실제 모습과 일치한지는 불확실하다.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 옆의 화령전에 보관되어 있다. ⓒ 김종성
정조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깊은 아들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효심 속에는 곱씹어볼 만한 구석이 있다. 정조의 가정환경을 살펴보면,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에 대한 감정이 복잡·미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조의 집에서 아버지 사도세자는 소위 '왕따'였다. 사도세자는 아들 정조와의 관계를 제외한 나머지 관계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 특히 집안의 가장이자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가 사도세자를 가장 못마땅해했다. 그것은 사도세자가 열 살 때부터 특권층과 외척 가문을 비판함으로써 정치적 고립을 자초했기 때문이다. 영조는 그런 사도세자를 못 미더워하며 들들 볶아댔다.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이영빈(영빈 이씨)은 출산 100일 뒤부터 사도세자와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아들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의 행위에 대해 이영빈이 지지를 표시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 이영빈과 사도세자는 정상적인 모자관계가 아니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아내로 살기보다는 홍봉한의 딸로 살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남편의 개혁 의지를 뒷받침하기는커녕 도리어 이것을 방해했다. 남편에 관한 정보를 친정집(남편과 적대적인)에 제공할 정도였다. 회고록인 <한중록>에서도 남편을 미치광이로 묘사하고 친정집을 열렬히 옹호한 점에서 알 수 있듯, 혜경궁에게는 남편과의 사랑보다 친정의 부귀영화가 훨씬 더 중요했다.
혜경궁은 자기 가문을 포함한 외척세력의 힘을 꺾으려는 사도세자가 싫었다. 그래서 그는 남편을 죽이는 일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친정인 홍씨 가문이 남편을 죽이는 데 앞장섰을 때 그도 암묵적으로 지원을 했던 것이다.
예컨대 세손인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에게 눈물의 탄원을 올리자, 혜경궁은 아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정조를 궁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영조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궁 안에서 제거한 셈이다. 정상적인 아내였다면 아들을 앞세워서라도 시아버지의 마음을 돌리려 했을 것이다. 이 정도로 부부간의 애정이 없었으니, 혜경궁은 평소 남편을 대할 때마다 서먹하고 불편했을 것이다.
'왕따' 사도세자를 기린 정조의 마음
▲ 혜경궁 홍씨의 모습을 형상화한 밀랍인형.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찍은 사진이다. 환갑잔치(진찬연·진찬례) 때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 김종성
이런 가정환경에서 잘 나타나듯이 정조의 아버지는 정서적으로 고립된 사람이었다. 정조는 그런 아버지를 동정하고 존경했다. 아버지가 고립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을 이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고 아버지의 정치적 꿈을 실현시키는 게 정조가 생애 내내 일관되게 추구한 목표였다.
즉위식 때 아버지를 죽인 정치세력 앞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한 사실, 기득권층의 따가운 시선을 무릅쓰고 아버지의 위상을 높여 나간 사실, 정치개혁의 거점이 될 수원 화성에 아버지의 무덤을 이장한 사실, 1804년에 상왕으로 물러나 아버지의 명예회복과 정치개혁을 완성하려 했다가 1800년에 갑자기 사망한 사실 등은 정조의 마음속에서 아버지가 얼마나 큰 존재였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점들을 보면, 아버지를 고립시키는 할머니·할아버지·어머니에 대해 정조가 어떤 마음을 품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그들에 대해서도 효심을 품었겠지만, 불편한 감정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매우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마음은 복잡·미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효심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머니에 대해 사랑을 느끼기도 하고 섭섭함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하길 바랐을 것이다.
정조가 어머니에 대해 그런 마음을 품었으리라는 점은, 이들 모자와 관련된 역사 유적들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서울시 종로구 창경궁의 자경전 터와 경기도 수원시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이를 알 수 있다.
혜경궁 거처가 언덕 위였던 이유
▲ 창경궁의 자경전 터.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소재. ⓒ 김종성
▲ 자경전 터에 관한 설명문. ⓒ 김종성
창경궁에는 좀 특이한 주거 공간이 있었다. 통명전 뒤편 언덕에 있었던 자경전이 바로 그것. 이곳은 사도세자가 죽은 지 15년 뒤이자 정조가 왕이 된 지 1년 뒤인 1777년에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건물이다. 자경전은 다른 주거 공간들과 달리 언덕 위에 조성됐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궁궐 밖을 쉽게 조망할 수 있다.
자경전 터에서는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서울대병원 옆) 부지가 특히 잘 보인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 내려서 이 의과대학에 가보면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널찍한 터를 발견할 수 있다. 예전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있었던 자리다.
자경전 터와 경모궁 터의 직경은 약 500미터. 지금은 의과대학 건물이 가로막고 있어서 자경전에서 경모궁을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오늘날처럼 고층 건물이 없었던 18세기에는 그게 어렵지 않았다.
이제, 정조가 자경전을 언덕 위에 지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머니가 자경전 방문을 열고서 나올 때마다 경모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고자 그렇게 했던 것이다. 그것이 계기가 돼 어머니가 마음속으로나마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고 아버지와 화해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에 대해 혜경궁이 어떤 마음을 품었을지는 뒤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아들 바람과 다른 엄마... "남편은 미치광이야"
▲ 경모궁 터. 서울시 종로구 연건동 소재. 서울대 의과대와 서울대병원 사이에 있다. ⓒ 김종성
정조는 죽기 5년 전인 1795년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의 환갑잔치(진찬연·진찬례)를 열었다. 한양에서 해도 될 환갑 잔치를 화성까지 가서 한 것은 이곳에 아버지의 무덤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가 있는 수원 화성에서 어머니의 진찬연을 엶으로써 두 사람의 화해를 상징적으로나마 연출하고 싶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조가 화성에서 진찬례를 연 것을 정조의 효심으로만 해석하는 관점이 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어머니를 심리적으로 압박해서 아버지와의 화해를 강요한 측면이 강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누구보다도, 혜경궁 본인이 이 잔치를 효심의 증거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 같다. 환갑잔치가 있었던 그해부터 혜경궁이 <한중록>을 의욕적으로 집필한 사실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한중록>이 전달하는 메시지 중 하나는 '사도세자는 미치광이라서 죽을 수밖에 없었고 홍씨 가문은 이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과 남편의 화해를 은근히 촉구하는 정조에 맞서, 혜경궁은 <한중록>을 통해 '나와 우리 집안은 네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는 메시지로 대응한 것이다.
사실, 사도세자의 정신 건강에 관한 <한중록>의 기록은 거짓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만약 사도세자가 정말로 미치광이였다면, 그가 1749~1762년 사이에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주상 권한대행)을 수행한 사실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미치광이가 13년이나 국정을 운영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사도세자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아주 심각한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은 영조 38년 5월 22일치(1762년 6월 14일) <영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죽기 전에 아버지 영조와 언쟁할 당시 사도세자가 "제게 본래 화증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영조는 "차라리 발광을 하지 그러느냐?"라고 대꾸했다.
이것은 화증을 앓은 것은 사실이지만, 미치광이인 발광 상태까지는 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만약 사도세자가 미치광이였다면 영조는 "네 상태가 화증 정도냐? 넌 이미 발광한 사람이야!"라고 응수했을 것이다. '차라리 발광을 하지 그러느냐'라는 말은 아직 발광을 하는 상태는 아님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도세자를 미치광이로 묘사한 <한중록>의 내용이 허위임을 반영하는 것이다. 남편의 정신병을 숨겨야 할 아내가 남편을 미치광이로 묘사한 것만 봐도, 혜경궁과 사도세자가 정상적인 부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는 화성이 혜경궁에게 어떤 느낌을 주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하필이면' 그런 곳에서 60세 생일 잔치를 열어주는 아들의 '얄미운 효심'을 혜경궁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때부터 열심히 <한중록>을 집필한 것을 보면 정조의 '얄미운 효심'에 대해 혜경궁은 반발심을 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들 효심이 불편한 혜경궁
▲ 환갑잔치 때 어머니에게 절하는 정조의 모습. ⓒ 김종성
혜경궁 홍씨에게 정조는 소중한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조가 자신과 남편의 화해를 은근히 강요하는 것만큼은 싫었다. 그는 아들이 화성행궁에서 환갑잔치를 열어준 의도를 간파했다. 그래서 미친 듯이 <한중록>을 집필함으로써 아들의 강요를 마음속에서 밀어내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정조가 창경궁 언덕에 자경전을 지었을 때도 혜경궁은 그렇게 불편했을 것이다. 그는 방문을 열 때마다 경모궁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애썼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조는 이따금씩 자경전을 방문해서 "바깥바람 좀 쐬시죠"라며 어머니 손을 잡고 경모궁 쪽을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려 했는지도 모른다.
정조는 효심이 남다른 왕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해서만큼은 그 효심이 순도 100%였다. 하지만,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좀 복잡·미묘했다. 어머니에 대한 마음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죄나 아버지와의 화해를 촉구하는 심리가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약간은 '불순물'이 섞인 효심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혜경궁과 정조는 겉으로는 절친한 모자관계였지만, 속으로는 긴장감이 감도는 모자관계였을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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