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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중성(七重城 = 難隱別)은 난벌(난들)이요 넓은 들이다.
白首 2013.11.10 07:40 


백제초기영역도
 
칠중성(七重城)의 유래
 
-. 칠중성은 본래 백제땅이었다.
-. 백제에서 고구려로 패권이 넘어가던 시기(광개토왕 ∼ 장수왕 때)에 고구려의 七重縣(一云 難隱別)이 된다.
-. 신라 진평왕 51년(629년) 김서현외 2명에 의해 신라로 편입.
-.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년) 때 七重城축조 <출처 확인 필요>
-. 통일신라 경덕왕16년(757년) 重城縣(來蘇郡의 영현)으로 개칭
-. 고려태조23년(940년) 積城縣(장단군의 속현)으로 개칭
-. 고려 성종14년(995년) 개성부관할
-. 고려 현종 9년(1018년) 장단현 소속
-. 고려 문종 17년(1063년) 개성부 소속
-. 고려 예종 원년(1106년) 중앙정부에서 監務파견
-. 고려 공양왕2년(1390년) 경기좌도 소속
-.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현감을 둠
-. 조선 고종32년(1895년) 23부제의 실시와 함께 현(縣)이 폐지됨에 따라 한성부 관할 적성군이 되었다가
           13도제 실시로 경기도에 속하게 됨
-. 1895년 북면이 마전군(지금의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
-. 1914.  4. 1   행정구역통폐합으로 적성면과 南面이 연천군 관할이 됨.
-. 1945.11. 3   적성면과 남면이 파주군으로 편입
-. 1946. 2. 5   파주군 南面 양주군에 편입.(지금의 양주시 남면)
 
 
七重城, 難隱別에 대한 연구성과
 
1) 이병선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에서『七重縣 一云 難隱別』 곧 ‘七重 = 難隱別’의 관계를 통해「七과 難隱」이 대응하고 「重과 別」이 대응하는데, 七이 일본어 nana와 비교되니, ‘難隱은 이 nana의 표기로 생각되고,
 
重은「並 · 比 · 疊(거듭 첩) · 双」과 같은 뜻으로 「ᄀᆞᆲ-」의 어근 kͻrͻ의 표기이며, 別(가를 별)은 借訓에 의한 kͻrͻ(分)의 표기라고 하여 ‘難隱別’과 ‘七重’을 『나나골』쯤으로 보았다.
 
그리고 같은 책 삼국사기지명【高山縣 一云 難等良, 難珍阿縣 一云 月良】대응연구에서 '高山 = 難等良'의 대응을 통해, 難은 高를 뜻하는 말로 경남 고성지방의 방언으로 높은 산등성이를 난등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難을 날(高)의 표기로 본 것이다.
 
2) 임병준(2000)고구려말의 어휘일람에서 ‘別’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표기            발음         뜻            백제, 신라말        고려어       중세국어         현대국어
別, 平吏       pɐrɐ         平原         夫里, 火, 伐         ***            벌(野)             벌, 벌판
 
3) 최범영(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땅이름 / 임진강·적성」에서 임진강의 옛 이름인 七重河는 파주시 적성면(積城面)의 옛 이름 칠중현(七重縣)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지리지를 보면, 칠중현은 고구려 때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했으며, 신라 때 중성(重城), 고려 때부터 적성(積城)이라고 하였다.
 
難隱(난은)은 고대말 표기방식에서 ’난’일 수 있고, 難(난)의 새김에 ‘-ㄴ’이 붙는 말일 수도 있다.
‘일곱’이란 셈말을 몽골 · 만주 · 여진어 에서는 ‘나단’, 일본어에서 ‘나나’이므로 고구려 말은 ‘나단/나난’ 쯤으로 보인다.
 
방언에서 두 줄 벌. 세 줄 벌(2열 ·3 열) 따위의 말이 있는데 ‘벌’(列)이 ‘겹’(重)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벌’의 고구려 말은 ‘별’이다. 적성의 옛 이름은 ‘난별 / 나단별 / 나난별’ 가운데 하나다." 라고 하였다.
 
4) 『백제어 기본 수사(數詞) 중  ‘밀’(密=3), ‘우츠’(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은 고구려어와 똑같으면서 일본어에 그 흔적이 남아 있을 뿐 우리말에서는 사라졌다.<이재운>』
 
5) 고대한국어표기법에서 삼국사기의 '隱'은 (-ㄴ~ - / -는 ~ - -은)으로 읽고 '難隱'은 수사 '七'의 표기로 '나나, 나는, 나단'으로 본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칠중성(七重城 = 難隱別)은 난벌(난들), 넓은 들
 
이러한 先學들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七重城의 우리말이름은 찾자면 ‘나난벌’이나 ‘난벌’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난벌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1)」에서 難을 날(高)의 표기로 보았는데 난(難)은 높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멀고 크고 넓다’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우리말사전에『난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넓은 들』, 순우리말사전에 『난벌2: (이름) 탁 트인 벌판』이라고 나온다. 따라서 난(難)은 현재의 우리말 「난들, 난벌』의 용례대로 「 멀고, 크고, 넓고, 탁트임」을 뜻하는 "난-"을 표기한 것으로 보이고, 別은 「서라벌, 황산벌」에서  같이  "들"과 같은 의미의 "벌"을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정리를 하자면「難隱別 = 난은별 = 난은벌 = 나난벌 = 난벌」이 된다. ‘벌’과 ‘들’은 서로 통한다.
벌판이 들판이다. ‘난벌’은 ‘난들’이다. 임진강은 함남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산지의 좁은 계곡을 흐르다가 적성현에서 비로소 넓은 들을 만나 평야를 적시며 서해로 흘러가는 것이다.
 
七重城에서 바라다 보이는 가월리와 주월리, 임진강너머 장남면 원당리, 백학의 노곡리 학곡리, 객현리와 어유지리와 삼화리 까지 임진강을 따라 兩岸에 펼쳐진 황금들판이 ‘난들’이나 ‘난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옛 선조들은 이곳의 넓은 벌판(들판)을 ‘나는벌’이라 불렀으니, 한자로 음차표기를 하면 '難隱別'이 되고, 훈차표기로 ‘七重城’이라 적은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의 지명을 2자 이름으로 바꾸는 用例에 따라 七重城을 重城이라 개칭한 것이고, 조선시대의 적성(積城)은 중성(重城)과 같은 의미의 다른 표기일 뿐이다
 
 
칠중하는 호로하(瓠蘆河), 표하(瓢河)의 의역이 아니다
 
무릇 지명이란 산이나 강 이름에서 고을의 이름이 유래되기도 하고, 거꾸로 마을이나 고을이름에서 산이나 강 이름을 취하기도 한다. 임진강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七重河란 七重縣지역 즉 難隱別지역을 흐르는 강을 지칭하여 붙인 이름이다. 다만 강이름(七重河)이 지명(七重城)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기록되었으나 어떤 이름이 먼저 나왔는지 전말을 상고키 어렵다.
 
 
낭비성(娘臂城)과 난은별(難隱別)은 같은 城일까?
 
낭비성(娘臂城)은 629년 신라 진평왕 51년, 고구려 영류왕 12년 가을 8월에 신라 대장군 김용춘(金龍春)과 김서현(金舒玄), 부장군 김유신(金庾信)이 점령한 고구려의 성이다.
 
낭비성의 위치는 7세기 전반의 고구려와 신라의 영역과 경계를 반영하는 점에서 주목을 받아왔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해 일반적으로 지금의 청주시인 낭자곡성으로 비정되었지만 문제는 그 당시에 그 이북인 한강 유역이 신라의 영역이어서 청주가 고구려 땅이었다면 본국과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문제이다.
 
629년은 고구려 장수왕의 南征에서 이미 150년이 경과한 시점이고 그 이후로 100년 넘게 고구려군이 본국과 고립된 상태로 버티었다거나 신라나 백제가 그 기간 동안 청주를 그냥 두었다는 게 이해가 안가는 상황이다.
 
그런 이유로 낭비성은 청주에서보다 훨씬 북쪽으로 비정되는 견해가 있다. 가령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는 낭비성을 칠중성으로 비정하고 있다. 실제로 낭비(娘臂)라는 이름은 낭자곡(娘子谷)보다 칠중의 고구려어 이름인 난은별(難隱別)에 더 가깝다. <위키백과>
 
娘臂城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나온다.
1) 사기열전 김유신편에 건복46년(629년)고구려의 낭비성에 대한 공격기록
2) 신라본기 제4 진평왕 51년(629년) 8월에 왕이 대장군 용춘. 서현과 부장군 유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하매 여인(麗人)이 城에서 나와 陣을 벌이니... 아군이 진격하여 5000여명을 참살하니 그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 難隱別 」에서 隱에 대하여 [-ㄴ~ - / -는 ~ - -은]은 물론 [ -ㅇ] 으로도 읽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폭넓게 적용한다면『나는벌, 나난벌, 난벌』은 물론【나능벌, 나낭벌, 낭벌】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따라서「난들, 난벌」에서 -ㄴ에 가까운 소리로 적은 것이 난은(難隱)이고 -ㅇ에 가까운 소리로 적으면 낭(娘)이 된다고 본다.
 
고대에 읍(邑), 촌(村)을 이르는 ‘부리’는 ‘비리’와 통용되었다. 따라서 「비(臂)는 곧 벌(別, ᄇᆞᆯ)의 다른 표기」일 수도 있다. 따라서 難隱別(난은별)과 娘臂城(낭비성)은 같은 곳일 가능성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칠중성 위치 

 
중성산은 감악산에서 서북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로,  해발고도가 148m에 불과한 낮은 야산이지만 전면에 임진강줄기와 넓은 평야가 한눈에 조망되고 남동쪽으로는 감악산, 남서쪽으로는 파평산, 서북으로 호로고로성, 북으로 육계토성, 동으로 적암리의 아미성이 조망되는 등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칠중성은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의 중성산(重城山)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적성향교 서쪽 약500미터 지점에 위치한다. 칠중성은 국경분쟁이 심하던 삼국시대以來로 군사가 南下나 北上을 할 때 교두보 역할을 하던 요충지로서, 이곳을 빼앗기면 의정부까지 단숨에 함락될 정도로 매우 중요한 길목이다.
 
한국전쟁 때 중공군3만 여명이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 올 때, 영국군 1개 대대가 3일 동안 중성산에서 버텼으며, 중성산을 빼앗긴 뒤에는 설마리계곡에서 교전하면서 중공군의 서울 진입을 지연시켰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토탄고성(吐呑古城) 또는 성산(城山)으로 적성현의 서쪽3리에 있으며 석성의 주위가 1,937척인데 현재는 없어졌다고 하였다. 대동지지에는 적성현의 남쪽 2리에 옛 성이 있는데 토탄성 또는 중성(重城)이라 부르고 주위가 2256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깊이를 측정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칠중성의 둘레는 603m로 전체적인 형태는 북동 - 남서향을 장축으로 한 포곡형의 석축 산성이다. 정상부를 비롯한 성 내부의 상당부분이 군부대의 참호구축 등으로 훼손되었으나 성벽의 잔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고 우물지와 건물지등의 성내구조물이 상당부분 남아있다. 근래 문화재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성내에서 깊이 2.5미터의 주머니형 저장고를 발견하였고 회청색 경질토기편, 토제구슬, 방추차 등이 출토됨으로서 이곳이 삼국의 치열한 각축장 이였음을 확인하였다.

칠중성(七重城)을 둘러싼 삼국의 쟁패(爭霸)

[한국역사연표]
 
BC 57년 신라 건국
BC 37년 고구려 건국
BC 18년 백제 건국
AD 42년 가야 건국
371년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침공으로 고국원왕 전사
391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즉위
392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백제 침공, 백제 진사왕 사망.
427년 고구려 평양성으로 천도
433년 신라와 백제 나제동맹을 체결
475년 백제 웅진으로 천도
538년 백제 사비성으로 천도
554년 백제와 신라의 관산성 전투, 나제동맹이 결렬,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동맹을 체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676년 신라가 당나라군대를 몰아내고 한반도의 남부를 통일
 
-. 백제 온조왕 18년(AD1년) 10월에 말갈이 엄습하여 오니,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칠중하(七重河)에서 맞아 싸워 추장 소모(素牟)를 사로잡아 馬韓에 보내고 나머지 적들은 모두 坑殺(산 사람을 묻어 죽이는 것)하였다.
 
-. 고구려장수왕의 南進(475년경)으로 고구려가 차지했다.
 
-. 신라 진흥왕(재위 540년- 576년)이 553년 백제의 한강유역 요지를 攻取했을 때 신라의 영토가 된다.
 
-. 신라 선덕여왕 7년(638년) 10월에 고구려가 北邊 七重城을 침범하매 백성들이 놀라서 山谷으로 들어가니 왕이 대장군 알천(閼川)을 명하여 그들을 안돈케 하였으며11월에 알천(閼川)이 고구려병과 七重城밖에서 싸워 이겨 적을 죽이고 사로잡음이 매우 많았다.
 
-.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던 태종무열왕 7년(660년), 고구려 말갈연합군이 다시 쳐들어와 다시 칠중성을 포위했다. 성을 지키던 신라의 현령 필부는 20여 일 동안 성을 지켰다. 불리해진 고구려군은 퇴각을 결심한다. 하지만 고구려군과 내통한 신라군 대나마 비삽이“성안에는 양식과 군사의 사기도 떨어졌으니 공격하라”고 고자질했다. 사실을 알게 된 필부는 반역자 비삽의 목을 친 뒤 군사들을 독려했다. “충신과 의사는 죽어도 굴하지 아니한다. 힘써 싸우자! 이성의 존망은 실로 이 한 싸움에 달려있다!”고 주먹을 휘두르며 부르짖자 病者까지도 모두 일어나 싸웠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고 안으로 쳐들어왔다. 마침내 현령필부는 빗발 같은 화살에 맞아 온 몸에 구멍이 뚫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리면서 죽고 성은 함락 당했다. 그 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치고 신라군은 이 칠중성을 쳐서 진격로를 개척했다.
 
-. 문무왕 1년(661년)12월 10일에 유신은 副장군 仁問·眞服·良國 등 九장군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경내로 들어가게 되었다. 문무왕 2년(662년) 정월23일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배에 오르지 못했다. 유신이 말하기를 ‘제군이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여기에 왔겠는가’하고 자신이 먼저 배를 타고 건너니 여러 장졸들이 서로 따라 물을 건너 고구려땅에 들어갔다.
 
-. 문무왕 2년(662년) 정월에 ....아군이 호로하(瓠瀘河)에 다다랐을 때 고구려의 병마가 뒤를 쫓아와 岸上에 陳을 벌이었다.
 
-. 문무왕 7년(667년)에 대총관 이적(李勣)이 요동을 친다는 말을 듣고....大軍이 아직 평양에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을 쳐서 도로를 개통하고, 大軍이 오는 것을 기다렸다. 칠중성이 차차 함락되려 할 때....
 
-. 나당전쟁 때인 문무왕13년(673년) 고구려군이 당나라 이근행군에게 대패를 당해 고구려부흥운동이 와해되었고 고구려군은 신라군에 편입되었다.
 
-. 문무왕15년(675년) 그후 나당전쟁(羅唐戰爭; 670~676년)시기인 문무왕 15년(675) 당나라가 말갈과 연합해 신라를 침탈할 때, 이성은 잠시 당나라에 넘어갔으나 곧 도로 찾았다. 그해 당나라는 거란과 말갈연합까지 연합해 이성을 공격했지만 막강한 신라군에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가 신라에게는 삼국통일의 중요한 고비였다.
백제·고구려의 부흥운동과 나당전쟁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백제는 복신·흑치상지·도침 등을 주축으로, 고구려는 안승·검모잠·고연무 등을 주축으로 각각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 6년여의 나당전쟁(羅唐戰爭)기간 중 이곳 칠중성에서 18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였으며, 676년 마침내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나당전쟁[羅唐戰爭]
 
670~676년에 걸쳐 진행된 신라와 당나라 사이의 전쟁으로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옛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지역에는 9개 도독부를 설치하여 당나라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키려 하였다. 또한 663년(문무왕 3)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여 형식적이나마 신라를 당의 한 도독주로 삼았다.
 
특히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삼국을 총괄토록 함으로써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이에 신라는 삼국을 통합한 직후부터 당에 대한 항쟁을 시작하였다. 먼저 고구려의 옛땅을 되찾기 위하여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금마저(金馬渚:익산군 금마면)에 도읍을 정해줌으로써 고구려 부흥군과 유민들을 대당(對唐)항쟁에 이용하였다.
 
670년에 신라군이 당나라와 부여 융(扶餘隆:웅진도독)의 백제군대가 머무른 82개 성을 공격하였고, 671년에는 사비성(부여)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직속령으로 삼아 백제 옛 땅을 완전히 되찾았다.
 
그러나 이후 당군의 침략이 격화되어, 672년 당나라 고간(高侃)의 대군과 격돌하였다. 또한 당나라는 674년 신라 문무왕의 관작을 삭제하고 그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에 책봉하고서 다시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에 신라는 675년 당나라 설인귀(薛仁貴)의 침공을 격파하여 1,400명을 죽이고, 이근행(李謹行)이 이끈 20만 대군을 매소성(買肖城:대전리 일대)에서 크게 격멸하였으며, 676년에는 당의 수군을 금강 하류 기벌포(伎伐浦)에서 패퇴시켰다.
 
결국 신라군에게 대패한 당이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김으로써 신라는 대동강에서 함경남도 덕원을 연결하여 실질적으로 원산 이남의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당전쟁(羅唐戰爭)의 연도별 기록
 
신라·고구려·백제의 삼국은 7세기에 접어들면서 상호 항쟁이 격렬하였다. 특히,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을 자주 받고 있던 신라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당시 삼국은 각각 당나라와 외교관계를 가졌지만 신라와 당나라는 서로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더욱 접근할 수 있었다. 신라의 일차적 적대국은 고구려보다 백제였으며, 당나라의 적대국은 백제보다 강대한 고구려였다. 고구려와 싸우다 무너진 수나라를 계승한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당나라는 신라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고구려와 백제에 대해 외교공세를 폈다.
 
643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자, 신라는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였다. 이는 이미 이때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군사동맹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양국 간에 분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648년에 와서 동맹관계를 더욱 선명히 하였다.즉,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당나라 태종(太宗)을 만나 동맹국으로서의 상호입장을 담판하였다. 여기서 전쟁 후에 “백제의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은 신라에게 준다”는 것을 제시하자, 신라도 수락해 양국 사이의 영토분할약정(領土分割約定)이 이루어졌다.
 
나당군사동맹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일차적으로 실천되었다. 즉, 당나라 소정방(蘇定方) 등이 13만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산둥반도에서 출발해 서해를 건너서 덕물도(德勿島: 지금의 德積島)에 도착해 신라군 지휘자와 만나 작전계획을 의논하고 해안을 따라 바다로 남하하였다.한편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등이 거느린 5만명의 군사로 백제를 정벌, 황산(黃山: 지금의 連山)에서 백제 계백(階伯)의 5천명의 결사대를 섬멸하고, 탄현(炭峴: 지금의 大田 부근)을 넘어 백강(白江)의 기벌포(伎伐浦)에서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였다.
 
660년 7월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정벌에서 신라군의 활약이 전부였고, 당나라군은 겨우 사비성 함락에 참전했을 뿐이었다.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을 잘 격퇴시켰으나 독재자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자 분열이 극심했다.
 
이를 기회로 당나라는 666년부터 계속 침공하다가 668년에 나당군이 평양을 함락시킴으로써 고구려는 멸망되었다. 평양전투에 참가한 신라군이 20만이라 했으나 2만명 정도라고 추측되며, 고구려에서 7천명의 포로를 잡아 개선하였다. 이처럼 신라는 백제·고구려를 패망시키는 데 절대적 역할을 했지만 승전 대가는 아무 것도 없었다. 반면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1만명의 당군을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2만명의 당군을 주둔시켜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더욱이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아 신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가 멸망될 때까지 무력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고구려는 패망 후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일어나 669년 말에는 평양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점차 세력이 약화되면서 부흥군 일부가 신라지역으로 남하하였다. 이에 신라는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고 항당운동(抗唐運動)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이용해 동맹관계를 배반한 당나라에게 전쟁으로 응징하고 통일목적을 달성했으니 이것이 나당전쟁이다.
 
670년 3월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부흥군의 장군 고연무(高延武)가 각각 군사 1만명씩을 거느리고 압록강(대동강?)을 건너서 당나라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은 개전되었다. 신라는 670년 8월, 남래한 고구려 부흥군을 금마저(金馬渚: 지금의 益山)로 옮겨 소고구려국(小高句麗國: 뒤의 報德國)으로 인정, 보호함으로써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고자 하였다. 또 670년 7월부터 대병력을 동원해 백제지역을 정복하였다. 즉, 품일(品日)의 군대가 63성(城)을 공략해 그 곳 백성을 신라로 옮겼고, 천존(天存)·죽지(竹旨)의 군대가 7성, 군관(軍官)의 군대가 12성을 함락시켜 총 82성을 장악함으로써 백제의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671년 6월에는 죽지가 가림성(加林城:지금의 林川)을 거쳐 석성(石城)에서 당병 5,300명을 참살해 지금의 충청남도 일대를 장악하고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함으로써 백제 전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수군을 거느린 설인귀(薛仁貴)를 파견하였다. 설인귀는 신라왕에게 글을 보내어 신라가 당나라를 배반했다고 비난하면서 당나라의 대병력이 오고 있다고 위협하였다. 이에 맞서 문무왕은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를 보내어 항변하였다.그 내용에서 신라는 648년부터 670년까지 대당관계와 백제·고구려 정벌에 온 국력을 쏟았으나 끝내 당나라에 배신당한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 신라의 대당선전포고문(對唐宣戰布告文)이라 할 수 있다.
 
671년 10월 6일 급찬인 당천(當千) 등 신라 수군이 당나라 조선(漕船) 70여 척을 서해에서 격파하고, 무수한 당나라군을 죽이고 포로로 사로잡았다. 이 후 나당전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그러나 672년 9월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포로가 된 당나라 병 170명을 돌려주는 등 전쟁과 동시에 외교를 병행하였다. 한편, 고구려 부흥군을 진압하던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은 남하하고 있었다. 신라군은 한시성과 평양 근처로 추정되는 마읍성에서 당나라군을 크게 무찌르고 백수성까지 진격했으며, 후퇴하는 고간의 군사와 석문에서 싸우다가 대아찬 효천(曉川) 등 7명의 신라 장군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신라군은 우잠성(牛岑城:지금의 金川市)
을 거쳐 칠중하(七重河: 지금의 臨津江)에 이르고, 673년 윤5월 이 지역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와 같이 북방에서의 처절한 전투는 당나라의 주력부대가 요동(遼東)의 항당세력과 싸우는 동안 평양까지 확보하겠다는 신라의 의지의 표현이며, 백제 전역을 장악한 신라의 처지에서 당나라군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강력한 수단이기도 하였다.
 
673년 9월에는 2천여 명의 당나라 군사를 죽이는 전과를 올렸으나, 평양 근처의 우잠성이 당나라군에 함락되어 신라군은 후퇴하였다. 이 무렵 신라는 병선 1천척을 서해에 배치해 당나라 수군의 침략을 대비하는 동시에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대규모의 전쟁으로 확대되어 당나라에서는 더 많은 군대를 파병하였다.
 
674년 당나라는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는 한편 유인궤(劉仁軌)·이필·이근행에게 많은 군대를 주어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에 신라는 경주에서 대대적인 군사훈련을 전개하고, 설수진(薛秀眞)이 육진병법(六陣兵法)을 시험하는 등 전쟁을 승리로 이끌려는 전력과 전술을 강화하고 있었다.
 
또, 675년에 백제와 고구려 국경지방에 주군(州郡)을 설치했는데, 특히 고구려 남쪽경계지역의 주군배치는 당나라에 대해 영토분할약정을 고수하겠다는 신라의 의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나당전쟁은 675년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였다. 당나라의 대병력이 침입한다는 정보를 듣고 신라는 9개 군단을 배치, 대기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설인귀는 신라의 숙위학생이었던 풍훈(風訓)을 향도로 삼아 수군·육군을 거느리고 천성(泉城)으로 쳐들어왔다.그러나 신라 장군 문훈(文訓) 등이 반격해 당나라군 1,400명을 죽이고 병선 40척을 빼앗고 말 1천필을 노획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설인귀가 패퇴하자 유인궤 등은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積城)에서 돌아가고, 이근행이 당나라군을 총수했는데 20만명의 대군이었다.
 
이들이 남하해 같은 해 9월 29일에는 매초성(買肖城: 지금의 楊州)에 주둔하였다. 신라군이 이를 맹공하자 이근행은 달아나고, 신라는 전마 3만 680필을 빼앗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매초성 전투를 고비로 전세는 신라에 유리해 칠중성·적목성·석현성 등지에서 성주나 현령이 전사하기도 했으나 임진강 방면으로 북진하면서 18차의 전투에서 당나라군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빼앗았다. 그러나 676년 7월 당나라군이 도림성(道臨城)에 침입해 현령 거시지(居尸知)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최후의 대회전은 같은 해 11월 기벌포 앞바다에서 설인귀 수군과의 접전이었다. 처음은 사찬 시득(施得)이 패했으나, 22차의 접전 끝에 당나라군 4천여 명을 죽임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신라는 나당전쟁을 7년 만에 승리로 끝맺었다. 이로써 신라는 맹약을 배반한 당나라를 응징하고 자주권을 과시하게 되었다.
 
이에 당나라는 676년 안동도호부는 요동으로, 웅진도독부는 건안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때는 당나라에 대해 외족이 반기를 들어 더 이상 만주·한반도에서 전쟁할 형편도 못 되었다. 결국 신라는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德源)을 연결하는 선 이남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러다가 735년부터는 대동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칠중성 



칠중성은 해발148m인 중성산의 정상부와 남서쪽인 142m봉우리가 연결된 테뫼식산성이다. 테뫼식山城이란 봉우리들을 둘러쌓아 성을 축조한 것으로 산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7~8부 능선을 거의 수평으로 둘러싼 형태이며 산성 가운데 초기의 소규모산성이 주류를 이룬다.
 

山城의  정상부로 오르는 길, 길 왼쪽으로 142m봉우리가 있고, 오른쪽으로 꺾어 돌아 오르면 148m 정상이다.


산성정상부로 오르는 길의 바로 오른쪽 둔덕에 보이는 축성의 흔적



노란 낙엽송으로 둘러 쌓인 곳이 山城의 정상부다.
 


148m山城의 정상부를 둥글게 돌아가며 돌로 쌓았는데, 성의 초기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듯하다.
 

중성산 정상에서 본 남쪽의 감악산과 적성


북쪽으로 백학의 학곡리와 구미리가 보이고, 멀리 동쪽으로 새로 만들고 있는 마포리 꽃답벌의 교량이 보인다.


중성산 아랫마을이 '가월리', 비룡대교를 건너면 '백학면 노곡리'다.


서쪽으로 (신)장남교가 보인다. 파란강물을 따라 더 내려가면 호로고루다.
 
훼손된 城의 흔적들





142m봉우리에는 우리군의 시설이 없으나 148m정상부의 봉우리에는 군부대의 참호구축에 따라 
많이 훼손되었다. 석축에 사용된 돌은 모두 (옛)산성에서 나온 돌로 보인다.


 
142m 봉우리
 

142m봉우리에서 본 148m정상부의 모습
 

서쪽의 원당리와 호로고루, 고랑포 까지 제대로 조망된다.
 



142m봉우리에서 본 관골과 감악산


백당나무 열매


찔레열매


배추밭위에 142m봉우리가 있다.


구읍리 371번 도로에서 본 칠중성(가운데봉우리)


가월리에서 본 칠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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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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