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dailian.co.kr/news/newsprint/151988

성벽시설물 멸실된 파주 ´칠중성´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삼국시대 쟁탈의 역사 짙게 배어있는 곳
최진연 기자(cnnphoto@naver.com) | 등록 : 2009-04-02 11:07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서 371번 도로를 따라 구읍삼거리 방향으로 가다가 왼쪽 적성향교가 있는 뒷산에 위치한 칠중성은 파주 연천지역에서 문헌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터도 없다. 성벽과 기타 시설은 멸실됐지만 기록이 남긴 역사성 때문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됐을 정도이다. 


▲ 산성 북쪽 군사시설물

칠중성은 초기에 백제성이었다. 삼국시대 때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에서 5세기에 고구려가 차지하다가 6세기 후에는 신라의 영토가 된다. 신라는 다시 당나라와 이곳에서 18차례나 살육전을 펼치면서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역사를 남기면서 삼국통일을 이룬다.

산성은 나지막한 야산(해발150m)에 퇴뫼식으로 쌓았다. 전체둘레 680m. 남북의 길이 198m. 동서는 168m이다. 현재 칠중성 성벽은 한국전쟁 후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모두 멸실됐고 문지 3곳과 건물터 5곳, 1곳에 우물터의 흔적만 남기고 있지만 일반사람들에게는 이곳이 삼국시대 쟁탈의 역사현장으로 보기에는 초라한 모습일 뿐이다.


▲ 남쪽 성문지의 석축

산을 중심으로 해 서쪽으로는 자장리, 동쪽은 율포리, 북쪽에는 주월리가 자리 잡았고 산성 앞으로는 임진강의 물줄기가 한눈에 조망된다. 또한 적성의 감악산, 파평산과 맑은 날에는 개성의 송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백제는 이곳을 난은별로 불렸다. 그리고 고구려와 신라는 칠중성으로 개칭했다. 삼국사기에 기록을 보면 신라 선덕여왕 7년(638)에 고구려군이 진격해오자 주민들은 칠중성으로 피했다. 왕은 알천을 보내 산성 밖에서 싸워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고구려군이 다시 쳐들어와 칠중성을 포위했다. 성을 지키던 신라의 현령필부는 20여일동안 성을 지켰다. 전세가 불리해진 고구려군은 퇴각을 결심한다. 


▲ 산성 정상의 영국군 참전비

하지만 고구려군과 내통한 신라 간부인 대나마 비삽이 “성안에는 양식과 군사들 사기도 떨어졌으니” 공격하라고 고자질했다. 사실을 알게 된 필부는 반역자 비삽의 목을 친 뒤 군사들을 독려했다.“충신과 의사는 죽어도 굴하지 아니한다. 힘써 싸우자! 이 성의 존망은 실로 이 한 싸움에 달려 있다”고 주먹을 휘두르며 부르짖자 병자(病者)까지도 모두 일어나 싸웠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바람을 이용해 성에 불을 지르고 안으로 쳐들어왔다. 마침내 현령필부는 빗발 같은 화살에 맞아 온몸에 구멍이 둟리고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리면서 죽고 성은 함락 당했다. 그 후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치고. 신라군은 이 칠중성을 쳐서 진격로를 개척했다. 


▲ 적성면 방향의 성벽

문무왕 15년(675) 당나라가 신라를 침탈할 때, 이 성은 잠시 당의 수중에 넘어갔으나 곧 도로 찾았다. 그 해 당나라는 거란과 말갈세력까지 연합해 이 성을 공격했지만 막강한 신라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가 신라에게는 삼국통일의 중요한 한 고비였다.

임진강 중류 남쪽 연안에 위치한 칠중성은 관서지방과 한강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아득한 부족국가에서부터 6.25동란 때 영국군의 참전까지 이 산성이 빼앗길 경우 의정부까지 단숨에 함락될 정도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전략 요충지다.


▲ 산성 남문지

칠중성은 현재 온전한 곳은 어디서도 볼 수 없다 간혹 석축의 사이에서 토기 또는 기와 조각이 출토되지만 대부분 삼국시대 유물이다. 수많은 기록을 간직한 칠중성은 우리나라 고대사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역사적. 학술적으로 중요한 성터이다. 

위치 -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지정 - 사적 제437호 

글·사진 / 최진연 기자(cnn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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