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6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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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위에 솟은 저 요새를 함락하라"
[역사기행 4] 오두산(烏頭山) 통일전망대 여행
03.07.30 06:30 l 최종 업데이트 03.07.30 11:35 l 노시경(prolsk)
▲ 자유로. 북쪽 동포들에게 ‘자유’를 전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는 길이다. ⓒ 노시경
자유로를 시원스럽게 달렸다. 차량지체가 없는 자유로 때문에 파주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길은 생각보다 매우 가깝다.
▲ 오두산 전경. 강변에 불쑥 솟아오른 요새이다. ⓒ 노시경
이 자유로의 중간 지점에 오두산(烏頭山)이 자라잡고 있다. 평탄하게 이어지던 자유로 넓은 길에 느닷없이 해발 119m 높이의 산 하나가 나타난다. 이 산을 왼쪽에 두고 차가 지나가는데, 무언가를 깊숙이 통과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 오두산 동쪽을 지나가는 자유로. 계속 간다면 임진강 너머 북한이다. ⓒ 노시경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성동리 산 86의 이 오두산에는 산 정상을 감싸 안은 오두산성과 함께 통일전망대가 자리잡고 있다. 이 산의 정상에는 통일전망대를 오르는 버스를 이용하게 된다. 아주 짧은 산행길이지만 이 셔틀버스는 산을 오르는 운치가 있다.
▲ 임진강 건너 북한 땅. 가장 뒤의 능선이 개성 송악산이다. ⓒ 노시경
나무가 우거진 산 사면의 비탈은 산의 높이에 비해서 가파르다. 주변에는 높은 산이 없고, 산의 북쪽은 능선으로 연결되다가 강속으로 들어간다. 산의 서쪽으로는 한강 너머 김포 평야가 펼쳐져 있다. 산의 동쪽은 한강변 제방으로 인해 농경지인 육지로 연결되어 있는데, 과거에는 이곳에 강물과 서해의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오두산은 예나 지금이나 사면이 강과 바다로 둘러싸인 군사상 요충지이다. 이 오두산은 지리적으로 남쪽에서 북쪽을 방어하는 중요한 길목에 자리를 잡았다.
▲ 오두산 남쪽의 북한산. 이 곳에 올라보면 한강 인근이 모두 지척이다. ⓒ 노시경
해발 140m의 높이에 자리한 원형 전망실에 들어섰다. 오늘은 해가 나오지 않았지만, 어제 비가 왔기 때문에 북한의 개풍군과 송악산, 그리고 남쪽의 북한산까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통유리를 통해 시원한 강변 풍경이 펼쳐지는데, 그 경치야말로 한강 제1경이다. 산 북쪽의 임진강 하류와 남쪽의 한강 하류가 바로 눈앞에서 합류하고 있으며, 이 물길은 바로 앞의 서해 바다로 흘러든다.
▲ 임진강과 한강의 합류지점. 물이 빠진 곳에는 모래톱이 드러나 있다. ⓒ 노시경
이 부근 한강 하구의 모습은 바닷물이 하루 두 번씩 드나들어 수위변화가 심하다. 그래서 갯벌과 모래톱이 발달해 있었다. 이 부근은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며, 강이기도 하고 바다이기도 한 것이다. 물이 빠지면 곳곳의 모래톱에 새들이 앉아 한가롭게 깃을 다듬는다.
전망대 내에서는 도우미가 임진강 너머의 북측 지역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눈앞에는 평화스러운 정경이 펼쳐지고 있지만, 귀로 들리는 내용들은 모두 분단의 아픔들을 담고 있다.
통일 전망대 밖으로 나왔다. 이 오두산의 정상부근 여기저기에는 성벽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 오두산에는 원래 백제시대부터의 산성인 오두산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이 산성은 원래 모습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훼손되었고, 오두산 정상에 통일전망대가 들어서면서 더욱 파괴되었다.
오두산성은 이 오두산 산사면의 정상에 테를 두르듯이 쌓은 산성으로서, 원래 둘레가 621m이다. 통일전망대가 설치되기 전에는 임진강과 한강 합류지점인 서안 쪽에 높이 1∼1.5m, 폭 6∼7m, 길이 약 30m의 당시 성벽이 정연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성을 축조할 때에 기초가 되는 석재 위에 길이 5∼15cm의 작은 석재를 들여 쌓고, 안쪽은 전부 큰 석재로 채웠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한강과 인접해 있는 가파른 절벽 위에 약 10여m의 성벽이 잔존할 뿐이다. 성벽을 훼손하지 않고도 통일전망대를 만들 수 있었을 것도 같은데…. 우리나라의 고대 문화유적 보호수준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 오두산성 석벽. 모두 파괴되고 길이 10m만 남아 있다. ⓒ 한국관광공사
이 오두산성은 조선시대까지 계속 수축되면서 사용되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거의 유실되었다. 1990년∼1991년의 발굴조사 결과, 한성백제에서 조선시대에 걸치는 토기ㆍ백자ㆍ청자ㆍ기와ㆍ철로 된 화살촉 등의 유물들이 나왔다. 또한 오두산성 부근 일대에는 상당히 많은 고분이 흩어져 있는데, 최근 이 고분들에서 삼국시대의 왕관과 목이 긴 항아리 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부터 이 곳이 중요한 유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현재 오두산성은 미개방 지역이며, 통일전망대를 통해 산성의 위치를 추정해볼 뿐이다. 이 성벽이라도 보려고 통일전망대 아래로 내려가려고 하였으나, 아예 접근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조망이 튼튼하게 쳐져 있다.
이곳은 개풍군과 맞닿은 접적 지역으로서 우리의 대한민국 국군이 지키고 있다. 이 인근에서는 밀물과 썰물이 수시로 교차하는데, 물이 가득 찰 때에는 북한군 침투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유적 답사시에 웬만한 담은 넘었지만, 이 철조망은 넘어서는 안될 것 같다.
최근 이 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그 성(관미성)은 사방이 험난하고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관미성은 천연의 험준한 지세 위에다 축조한 성이었고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곳에 있었다.
하지만 이 관미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그 위치를 놓고 조선 중기에서부터 현재까지 한창 논쟁 중이다. 이 관미성은 정말 어디에 있었을까? 그 위치를 한번 추적해 보자. 이 관미성의 후보지는 모두 5곳으로 교동도 화개산성, 강화도 북단의 별립산성 혹은 봉천산 토성, 예성강 남안, 그리고 오두산성이다.
이 고대사의 수수께끼를 풀어가 보자. 일단 교동도의 화개산성과 강화도의 별립산성 봉천동 토성은 그 지리적 위치가 서쪽 끝에 떨어져 있어서 한성백제의 위례성 방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낄 위치는 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지도를 펼쳐 놓고 한 번 보자. 이 성들에서 위례성을 가려면 강화도 큰 섬을 뚫고 나가야 하고, 강화도를 나오면 다시 바다를 건너야 한강 하구에 이른다. 그래서 이 성들은 관미성 후보에서 제외시켜야 될 것 같다.
그러면 <삼국사기>에서 관미성과 관련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지명들을 추적해보자. 서기전 9년(온조왕 10년), "왕이 말갈군을 곤미천(昆彌川)에서 방어하다 패한 백제군이 청목산(개성 송악산 추정)으로 후퇴하였다." 여기에서 물론 '곤미천'은 개성 부근에 있는 예성강일 것이다.
관미성과 관련된 이름의 2번째 기록. <삼국사기>에 의하면, "387년(진사왕 3년) 가을 9월에 말갈과 관미령(關彌嶺)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관미령' 역시 곤미천과 관련 있는 지명으로 보면 개성근처의 고개가 된다. 그 고개는 북한의 판문군에 자리한 진봉산(310m) 부근을 넘는 고개였을 것이다. 주지하듯이 요새도 이 판문군의 판문점은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요지이다.
예성강 하단과 판문군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제의 북변 요새인 관미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이 국내성에서 수군과 육군을 이끌고 왔고, 10개의 성을 함락시켰는데, 국경선 부근인 개성의 고개 아래에 위치한 한 성을 잃고 백제가 위협을 느꼈을까? 고구려군은 백제와 고구려의 주전선이었던 예성강을 넘어 그 동남쪽인 임진강과 한강의 입구까지 다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 한강의 입구에 관미성, 즉 현재의 오두산성이 있었다.
이 관미성은 광개토태왕의 비문에 '각미성(閣彌城)'으로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 말기 조선 답사의 슈퍼스타,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에서 이 오두산성이 백제의 관미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 오르는 길의 오두산성 사적비에도 이 곳이 관미성으로 추정된다고 되어 있다.
결국 이 고대사의 관미성이 어디인지는 유적과 문헌자료로 완벽하게 밝혀내기 힘들 수도 있다. '관(關)'자나 '미(彌)'자가 새겨진 명문 기와와 같이 '이 곳이 관미성이다'라는 결정적인 물증이 이 오두산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오두산을 답사해 보라. 오두산성이 관미성이라는 완벽한 심증이 생길 것이다.
1600년 전, 광개토대왕은 개성 지역을 통과하여 임진강을 도하하였고, 일부 수군은 서해 쪽에서 수군을 이끌고 이 한강하구 쪽으로 진격하였을 것이다. 백제군에게 있어서 위례성을 방어하는 가장 중요한 곳이 한강 입구였고, 고구려군은 한강의 이 통로를 지나지 않고는 하남 위례성을 침공할 수 없었다.
이 오두산성은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함락된다. 사실 광개토대왕 이전의 고구려는 백제의 진사왕과의 전투에서 꾸준히 판정패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민족의 역사적 정복왕, 광개토대왕이 즉위하자마자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어 버린다.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한 광개토대왕은 19세에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백제의 북쪽 국경을 거칠 것 없이 휘젓는다. 청년 광개토대왕의 탁월한 군사전술에 진사왕은 속수무책으로 계속 당하게 된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공격한 것은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의 한을 씻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요동지역에서 새롭게 일어난 선비족이 전연(前燕)을 세우자 고구려의 서북경계는 크게 위축되었고, 고국원왕 때인 342년에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된다.
이로 인해 고국원왕은 황해도 재령에 장수산성을 쌓고 남진을 하려다가 백제의 근초고왕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다. 고구려는 고국원왕의 아들들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나라의 기틀을 다시 다졌지만,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곧 백제의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392년(진사왕 8년) 가을 7월에 고구려 왕 담덕(談德,광개토대왕)이 군사 4만 명을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개풍군 북면 정석동 추정)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왕은 담덕이 군사를 부리는 데 능하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막지 못하니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다수 함락되었다.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같은 연도 내용을 보자.
"사면이 가파르고 해수에 둘러싸인 관미성은 왕이 일곱 길로 나누어 공격하여, 스무날만에 끝내 함락되었다."
평지에 솟은 119m의 높이의 관미성은 함락이 쉬운 곳이 아니었다. 현재의 오두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산 능선을 일곱 길로 나누어 보았다. 강과 바다에 둘러싸인 성을 7 곳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배를 타고 와서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7곳의 능선 중에서 한국군 초소가 자리한 북쪽 능선이 당시 고구려군이 기어올라오던 주 공격루트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전투 당시, 능선마다 세워진 목책을 사이에 두고 백제군과 고구려군의 무수한 화살과 돌들이 날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투가 2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하니 엄청난 지구전이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해서 죽기 살기로 이 성에 올랐을까? 분명, 이 산 능선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선봉에 섰던 고구려의 정예 병사들은 독심을 품었을 것이다. 이는 고대 국가에서 전공을 세운 병사들에게 확실한 포상을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이들은 자신의 가족들이 백제군에 의하여 무참한 죽음을 당했던 병사들이었을 것이다.
불현듯 베트남의 안케 고개에 올랐던 기억이 스쳐간다. 월남전 종전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전략요충인 안케를 점령하기 위해 맹호부대의 젊은이가 월맹군의 벙커진지에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돌격하다가 산화해 갔다. 그 행동의 가치판단 여부를 떠나서, 자신의 나라를 위해 산화해 가는 그 장면이 자꾸만 이 곳에서 오버랩 된다.
이러한 정예병들의 처절한 공격으로 백제의 관미성이 함락됨으로써, 임진강 유역도 점차 고구려의 세력으로 편제되고, 고구려군은 수군을 이용해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게 된다. 관미성 전투는 백제와 고구려의 힘의 추가 고구려 쪽으로 기울게 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 오두산성 남단. 이 한강변을 따라 광개토대왕은 위례성까지 진격한다. ⓒ 노시경
난공불락인 관미성의 함락은 백제에 큰 충격이었다. 그 여파인지 진사왕은 내부정변으로 사망하고 그 해에 아신왕이 즉위한다. 이 아신왕 2년인 393년에도 관미성은 다시 한강유역을 둘러싼 고구려·백제 패권다툼의 중요한 장이 된다.
393년 가을 8월에 아신왕은 무(武)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관미성은 우리 북쪽 변경의 중요한 성이다. 지금 고구려의 소유가 되었으니 이는 과인이 분하고 애석하게 여기는 바이다. 경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설욕하라."
무는 드디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칠 것을 도모하였다. 무가 몸소 사졸보다 앞장서서 화살과 돌을 무릅쓰면서 석현성 등 다섯 성을 회복하려고 먼저 관미성을 포위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무는 군량 수송이 이어지지 못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다.
백제는 이 이후로 다시는 관미성에 백제의 기를 꽂지 못하였다. 아신왕 재위 당시 백제는 고구려에 비해 현저한 열세에 있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아신왕은 재위기간 내내 고구려왕의 전쟁을 준비한다. 그러나 여러 기록에 의하면, 아신왕 재위기간 내내 백제는 한 번도 고구려를 이기지 못한다.
▲ 오두산 하산길. 조국의 평화를 염원하는 그림이 길바닥에 그려져 있다. ⓒ 노시경
이 역사를 뒤로 하고 오두산을 걸어서 내려왔다. 길 왼쪽에는 평화를 염원하는 걸개 그림이 걸려 있고, 길바닥에도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그림들이 이어진다. 이 그림들을 보면서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본다. 이 곳에서 보면 역사는 되풀이되고 허망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그러나 반복되는 역사 속에서 그때와 현재 사이에 명확히 다른 점을 알아야 한다. 삼국시대 당시의 전쟁은 작은 나라들이 팽창하면서 국경을 접하게 됨에 따라 발생한 것이었지만, 1300년 간이나 통일되었던 국가가 애석하게도 지금 다시 이 곳에서 분단과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외세를 탓하기 전에 우리의 힘을 반성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힘으로 한반도의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본질적으로는 조선 왕조가 중국의 속국으로 시작하면서 반도 내에서 발전이 정체되었고, 조선 후기에 부패한 양반들이 나라의 안위를 팽개쳤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정전협정 50주년,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전쟁과 분단을 뛰어 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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