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r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02
반달모양을 하고 있어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1995년의 5차 발굴조사 때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온 것으로 보아 마홀은 고구려 때의 포천 지명인 관계로 고구려가 축조한 성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 성의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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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반월성(抱川 半月城)에 대한 고찰 - 고려신문 http://tadream.tistory.com/7777
포천 반월성(抱川 半月城)에 대한 고찰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舊邑里)산 5-1번지 반월성지
성기철 편집자문위원 | ipcm@paran.com 승인 2012.07.15
포천의 유일한 국가 사적지 포천반월성(抱川半月城)에 대한 고찰
포천 반월성의 위치는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舊邑里)산 5-1번지 이며 원래는 반월성지라고 불렸으나 1998년2월20일 국가 사적 제403호로 지정된 이후 2011년 7월부터 반월성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청성산(일명 반월산 283M)을 올라가는 길은 청성공원 쪽과 군내면사무소 쪽에서 올라가는 길 두개의 코스가 있습니다.
군내면 쪽은 구읍이라 하여 옛 포천현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삼국시대 때부터 군내면 가산면 지역에 옛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옛 포천의 중심지입니다.
반월성에서 반월의 뜻은?
반달모양을 하고 있어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언제 누가 세운 성인가?
1995년의 5차 발굴조사 때 마홀수해공구단(馬忽受解空口單)이란 글씨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온 것으로 보아 마홀은 고구려 때의 포천 지명인 관계로 고구려가 축조한 성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그러나 2001년 6차 발굴조사 때는 백제와 신라의 토기가 다량으로 발굴이 되어 이성의 축조는 백제가 먼저 세워 4세기 후반까지 차지하고 있다가 고구려의 장수왕 또는 광개토왕 때 넘어갔으며 이후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 신라 진흥왕 이후 북방진출의 전초기지로 사용되었다고 최근 주장하는 설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하여 추측해 볼 수 있는 본 기자의 견해로는 고구려의 기와와 신라와 백제의 토기가 발굴된 자료만 가지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백제가 먼저 세웠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백제의 토기가 대량으로 발굴되었다는 것은 백제가 먼저 진출하여 청성산을 사용했다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성터의 모양으로 봐서는 장대(장수들이 지휘하는 본부)의 흔적과 고구려의 대표적인 축조방식인 테뫼식 축조방법, L자형 편축법과 협축법의 혼용 등에 있어서 고구려의 형태에 가깝다고 봅니다. 결론으로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백제가 세운 성터에 이후 고구려가 재축을 하여 사용하지 않았나(장대의 예)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예로 서울 아차산성은 고구려가 지었다는 설이 대부분의 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인데 아차산성에는 장대와 내성의 흔적이 있기 때문에 반월성에도 보면 그와 같은 흔적이 있다는 것을 통해 추측해 봅니다. 반월성에는 현재 남문쪽 성벽에 내성을 별도로 쌓아 지킨 형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한편 반월성은 반월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이 청성산인것과 신라의 토기가 무더기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신라가 진흥왕 이후 북방전초 기지로 가장 오랫동안 사용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라의 북진정책이 활발히 이루어진 전성기 즉 진흥왕 이후에는 포천현이 청성현으로 불렸습니다. 지금 산 아래 청성공원의 이름이 생기게 된 연유가 되겠습니다.
반월성의 가치는 ?
삼국시대에는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가 먼저 차지하였고 그 다음엔 고구려 장수왕, 광개토왕의 남하정책과 신라 진흥왕의 북진정책이 맞물려 있던 시기라서 청성산의 반월성은 군사적 전략 요충지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모든 곳이 한눈에 바라보여 적군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난공불락의 테뫼식 축조방식을 띠는 형태의 성입니다.
반월성은 지금으로 부터 약 1,700여년 전에 세워진 역사적 가치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오래된 사적지입니다. 그 가치는 훌륭하지만 그 가치만큼이나 알려진 것은 최근이었기 때문에 그 가치가 가려져 있을 뿐입니다.
성에서 서쪽으로는 포천시내와 왕방산(旺方山, 737m)이, 북쪽으로는 신 북과 영중면, 남쪽으로는 군내와 가산면, 소흘읍이 훤히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산성을 에워싼 주변의 형세도 가파른지라 적군이 쉽게 공략하기가 어려운 형태를 보이고 있고,
산성은 사방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인근에 구읍천,포천천이 천연적인 방벽을 형성하고 있어서 반월성이 왜 중요한 가치가 있는지를 실감하기에 충분합니다.
반월성의 전략적 가치로 귀중히 쓰이던 시기는 ?
삼국시대에 백제 고구려 신라가 반월성을 순차적으로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후삼국 시대에는 궁예가 반월성을 이용하여 왕건에게 저항 하던 곳으로 쓰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전략의 요충지이면서 궁예와 관련된 지형과 지명으로 봐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궁예 이후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는 개성으로 도읍지가 북쪽으로 옮겨지면서 전략적 가치가 있는 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결과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폐성이되기 시작했습니다.
폐성으로 방치되던 반월성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광해군 때 후금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수축했다는 기록과 광해군 10년 1,618년에 영평현에 감영을 두고 이성을 다시 개축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조반정이후 서인 세력이 득세를 하여 광해군이 내쳐진 이후인 1,623년부터는 폐성이 되었습니다. 한편 군내면사무소 쪽 방향으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400년 된 느티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아마도 광해군이 재축조할 당시 기념으로 나라에서 심은 것이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이후 반월성은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그대로 방치되어 수풀만 무성히 묻혀오다가 1994년부터 지표조사(조사기관 : 강남대 한국학연구소 및 단국대 사학과)로 시작된 발굴조사에 의해 1995년부터 1997년 까지 발굴조사를 실시(단국대학교 박물관)하여 고구려가 쌓은 성으로 잠정 결론을 내린 가운데 1998년에 국가 사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2001년 이후 반월성은 어느 나라가 쌓은 것인가 발굴단에 의한 재조사에 의하여 신라와 백제의 토기 유물이 발견된 결과 백제가 먼저 점유한 성지임이 확실해 졌습니다.
반월성에 대한 역사기록과 그 형태는?
반월성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대동지지(大東地志),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 견성지(堅城誌) 등의 옛 기록에 의하면 고성(古城), 산성(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나와 있습니다.
둘레는 1,930~1,937척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현재 성의 길이는 1,080m로 지형은 북과 서쪽이 높고, 남과 동쪽이 낮으며, 성의 입구인 남문과 북문이 있고, 성벽 바깥으로 사각형 모양으로 쌓은 치성(雉城) 4개, 건물터 6개, 우물터, 배수시설인 수구(水口)터, 장수들이 지휘하던 장대(將臺)터, 적군의 동향을 살피는 망대(望臺)등이 있습니다.
역사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대동지지에는 성지(고성)(城池(古城))이 현의 북쪽 1리에 있고, 성산은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여기에 옛성이 있고, 둘레가 1930척이며, 우물이 2개소이고, 광해군 10년(1618)에 영평에 감영을 두고 이 성을 수축하였으며, 중군을 설치하였고, 인조 원년(1623)에 혁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려실기술, 별집 17권, 변어전고에는 성산 고성이 현 북쪽1리에 있고, 돌로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천군읍지에는 반월산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937척이고, 가운데 우물이 2개소 있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광해군 무오년(1618)에 산성을 개축, 계해년(1623)에 혁파하였으며 지금은 폐해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견성지(堅城誌)의 기록을 보면 고성(古城)은 관아 뒤의 반월산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37척이다. 언제 처음 축성하였는지 알 수 없다. 가운데 세 개의 큰 우물이 있다. 사방으로 갈라져 있으며 가파른데, 천여 명을 충분히 수용할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북문 성터 쪽에는 건물지와 그 아래로 약수터 등이 발견되어 역사적 기록이 사실임을 뒷받침 해 주고 있습니다. 광해군 무오년에 판관 이성구(判官 李聖求)가 옛 터를 개축하였을 때 구리 숟가락과 쇠솥이 발굴되었다. 숟가락은 자루가 길고 굽으며, 솥은 형체가 좁고 길었는데, 몇 천 년이 되었는지 알 수 없고 그 빛깔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폐해졌으나 개수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월성 입구의 느티나무에 대한 궁금증?
군내면 사무소 쪽에서 성으로 올라가는 길은 널따란 마차도 올라갈 수 있는 넓이의 길이 있는데 그 길 올라가는 곳에는 약 400년 된 느티나무(높이26미터)가 5그루나 한 군데 모여 있습니다.
본인의 견해로는 광해군이(1,618년) 반월성을 수축하면서 기념으로 그때 느티나무를 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조선 광해군 이후에 그 느티나무들은 버려진 반월성을 지켜온 역사의 산 증목들입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보면
▲ 지정번호 : 사적 제403호
▲ 지정연도 : 1998년 2월 20일
▲ 조사과정
1994년에 지표조사, 1995~1997년에 발굴조사실시 2001년 실시 석축(石築) 300m만 남아 있다.
1995년 5차 조사 - 마홀수해공구단 고구려 기와 발굴
2001년 6차 조사 - 신라 백제 유물 토기 발굴
▲ 성의 형태
해발고도 283m의 청성산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아서 만든 테뫼식 반월형(半月形) 산성 터, 북고남저(北高南低), 서고동저(西高東低) 전체 길이는 1,080m이다. 자연지세 이용하여 축조. 꼭대기 중앙에는 200여 평의 분지(盆地) 형성- 장대. 문지 2개소, 치성 4개소, 건물지 6개소, 우물지, 수구지, 장대지, 망대지 2개소가 발굴되었고, 마홀(馬忽:고구려 때 포천시의 지명)이라고 적힌 명문기와 등 각종 유물이 출토되었다. 각종 지지(地誌)서에 고성(古城), 산성(山城), 반월산성(半月山城), 청성(靑城) 등으로 기록, [포천군읍지(抱川郡邑誌)]에는 ‘고성 반월산성은 돌로 쌓은 것으로, 둘레가 1937자[尺]이고, 가운데에 우물이 2개소 있고, 사방으로 갈라지고 가파르며 지금은 폐(閉)하여졌으나 수축(修築)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되고 있다.(실제로 우물 2개 발견)
▲시 대 : 삼국시대 초기 백제가 성을 쌓은 것으로 확정할 수는 없으나 유물 토기가 발견된 점으로 초기 먼저 백제가 점령한 것으로 추정 - 이후 고구려 신라 순으로 반월성이 삼국시대 전쟁의 중요 전략 요충지가 된 것이다.
▲위 치 :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 5-1
▲고찰
첫 번째로 고구려가 쌓은 것인지 백제가 쌓은 것인지는 반월성뿐만 아니라 국내 남부 지역의 일부 성들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유물이나 기와의 발견 흔적으로 누가 쌓았는지 추정해 볼 수 있지만 삼국 시대 동시에 이 지역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유물의 발굴만으로 섣불리 어느 나라가 반월성을 세웠다고 추측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첫 번째로 고구려가 쌓은 것인지 백제가 쌓은 것인지는 반월성뿐만 아니라 국내 남부 지역의 일부 성들도 많은 논란이 있습니다. 유물이나 기와의 발견 흔적으로 누가 쌓았는지 추정해 볼 수 있지만 삼국 시대 동시에 이 지역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유물의 발굴만으로 섣불리 어느 나라가 반월성을 세웠다고 추측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꾸준한 연구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마홀수해공구단을 새긴 기와장과 성의 축조 형태(각도를 기울여 쌓는 방식)와 장대터 만을 가지고 짐작하며 고구려의 성터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은 부분적으로 수축이 가미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 현재 동문에서 서문으로 이어지는 남쪽 성벽은 1차 안쪽 성벽과 2차 외벽이 허물어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동문 주변 성벽이 복원이 안 되어 방치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포천의 유일한 국가 사적지 403호로 등재되어 있는 포천의 문화유산, 하루 빨리 완전한 복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곳에는 아직 깨진 토기와 기와장등의 발견 가능성이 있는 곳이므로 충분한 사전 재 발굴 조사가 다시 진행이 된 이후에 복구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입니다.
마차가 올라 갈 만한 시멘 포장도로 - 정상까지 이어진다.
올라가는 중턱엔 4백년된 느티나무가 서있다.
광해군 반월성 재 축조시 기념으로 식재된듯 보이는 느티나무
포천시에서는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느티나무 보호수 지정 설명 입간판
정상에 다다르면 등산객이 쌓아 놓은 돌탑이 보인다.
반월성에 도달하면 길 언덕에 깨진 기와장들이 보인다- 고구려 시대 추정.
남문 입구
서치성 측면
남문 옆 성벽도 둥글게 처리한 축조 방식이 돋보인다.
남문 측면 성벽과 서치성 측면 벽이 뒤로 보인다.
삼국시대 모양 그대로 보존된 남문 측면 성벽
남문 측면 성벽 전체 모습
서치성 밑 쪽에는 아주 거대한 돌들로 쌓고 그 위에 잔돌을 깔아 2단 배치
서치성에서 포천시를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다.
서치성에서 내려다 보이는 포천시내
장대 - 장수들이 지휘하던 곳
서치성에서 바라본 포천시내 전경
북문 쪽에 있는 성벽 - 둘레길이 1080미터나 이어진다
북문 쪽에 있는 성벽 - 서쪽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모습
북문 쪽에 있는 성벽 - 북쪽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모습
북문 - 폭이좁다(적군의 침입이 예상되어 입구를 좁게 만들었다)
북쪽 성벽위는 공원을 연상케 한다.
회곽도의 모습 - 군사이동을 위해 협측식 구조로 쌓은 성곽
동문과 치성
동치성
건물지- 주춧돌은 수풀에 가려 조금 보일 뿐이다.
동문과 성벽- 광해군 때 재 축조된 것으로 추정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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