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v.daum.net/v/20210429165117569
무너지는 고구려 (3) - 667년 마지막 겨울나기
고구려사 명장면 122
임기환 2021. 4. 29. 16:51
667년 9월 14일에 고구려 신성(新城)을 손에 넣은 이세적은 군대를 나누어 자신은 압록강 쪽으로 남하하고, 글필하력은 국내성으로 가서 남생군과 연합한 후 압록강 쪽으로 진군하도록 하였다. 이세적의 당군이 16성을 함락시키면서 평양성 북쪽 200리 지점까지 진군한 때가 10월 2일이었다. 이때 이세적은 당 군영에 머물고 있던 신라 대나마 강심(江深)과 거란 기병 80여 명을 보내어 한성에서 기다리고 있던 문무왕에게 서신을 전하였다. 신라군을 이끌고 북진하여 평양성에서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당시 강심과 거란 기병은 어떤 경로로 한성까지 이르렀을까? 압록강을 거쳐 한반도 서북부 일대 고구려 영역을 관통하는 길은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고구려의 방어체제가 흔들리고 있었다고 해도 고구려 중심 지역 한복판을 별다른 장애 없이 통과할 수는 없다. 당시 강심 등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교통로는 국내성[중국 집안시]에서 강계를 지나 개마고원을 넘어 함흥, 안변 일대를 거쳐 추가령지구곡을 지나 한성[서울]에 이르는 길이다.
국내성은 남생이 투항하여 이미 당군의 손에 들어갔고, 당시 안변에는 비열홀성이 있었는데 이 일대도 666년 12월에 연개소문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신라에 투항함으로써 신라의 영역 안에 들어가 있었다. 강심과 거란 병사는 아마 위에서 언급한 교통로를 이용하였을 것이고 마침내 아진함성[강원도 철원]을 거쳐 한성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강심 등이 이용한 교통로의 상황을 보면 신성[중국 무순]에서 비열홀까지 남북으로 관통하는 영역을 나당연합군이 확보했고, 다시 원산만 일대에서 북한강유역을 거쳐 임진강 일대까지 신라가 영역을 확보하여 고구려 남부전선을 압박하는 형세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세적의 요청을 받은 문무왕은 대군을 이끌고 11월 11일에 장새(獐塞·황해도 수안)에 도착하였으나 이세적의 당군이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신라군도 철군하였다. 이때 신라군의 주력은 이듬해 고구려 원정을 위해 한성에 계속 머물렀을 것이다. 이세적의 당군은 아마도 10월 말, 11월 초 무렵에 철군하여 이미 확보한 국내성과 신성 일대를 중심으로 두 지역을 잇는 영역을 확보하고 여기서 겨울을 지냈을 것이다.
신성 함락 이후 당군의 동향을 좀 더 살펴보자. 이세적의 당군은 16성을 공함시키면서 압록강 일대로 남하하였다. 그런데 이때에는 압록강을 건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자치통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전하고 있다. 즉 이세적 휘하에 통사사인(通事舍人)인 원만경(元萬頃)이 격고려문(檄高麗文)을 지었는데, 이 글에서 "압록강의 험한 곳을 지킬 줄 모른다"고 빈정거렸다. 이에 고구려군이 바로 군사를 옮겨서 압록진(鴨綠津)을 점거하니 당의 군사들이 건널 수가 없었다고 한다. 당 고종이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원만경을 영남(嶺南)으로 유배 보냈다고 한다.
한편 이세적은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평양성으로 직공하게 하였다. 관련 내용이 <<자치통감>>에 전하고 있다. 이세적의 부장인 곽대봉(郭待封)이 수군을 이끌었는데, 이세적이 별장 풍사본(馮師本)을 보내어 양식과 무기를 싣고 곽대봉 군에 전달케 하였다. 그러나 풍사본의 배가 깨지고 때를 놓치게 되어 곽대봉 군사들이 굶주리고 어려움에 처했다. 이에 이세적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만약 이 서신이 고구려군에 들어가 당군의 허실을 알아차릴까봐 이합시(離合詩)를 써서 보냈다. 이 서신을 받은 이세적이 "군사가 급한데 어찌 시를 썼는가. 반드시 그를 목 베리라"라고 화를 내었는데, 앞서 언급한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해석해서 다시 양식과 무기를 보내게 하였다고 한다.
* 이합시[離合詩] : 한자(漢字)의 자획을 서로 떼어 맞추어서 새로운 글자로 조합해 짓는 시를 말한다.
이러한 상황을 보면 당의 수군도 일단 평양 방면으로 진격하였으나 도중에 식량과 무기 부족 등으로 제대로 나아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역대 수군의 경로를 보면 이때 당의 수군 역시 산동반도 등주에서 출발하여 요동반도 남부 해안 일대를 거쳐 압록강 하구를 지나 평양 방면으로 진격하는 것이 보통이다. 당시 이세적은 신성 혹은 신성에서 압록강 방면으로 남하 중이었다. 그런데 곽대봉의 수군이 독자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이세적에게 보고하고 그로부터 군수물자 등을 지원받으면서 움직이는 상황을 보면 아마 요동반도 남단에서 압록강 하구 일대 어디쯤엔가 머물러 있다가 이세적의 육군과 행보를 같이하려는 전략이었던 듯하다. 그런데 육군이 압록강 전선에 막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였고, 수군마저 군량 부족 등으로 독자적인 군사행동이 어려운 상황이었던 듯하다.
한편 <자치통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도 전하고 있다.
즉 이세적의 부장인 학처준이 고구려 성 아래에서 아직 대열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는데, 고구려 군대가 갑자기 이르니 당군이 크게 놀랐지만 학처준이 호상(胡床)에서 마른 음식을 먹고 있다가 몰래 정예 군사를 뽑아 고구려 군사를 물리치니, 장군과 사졸 모두 학처준의 대담함과 지략에 복종하였다는 내용이다.
* 호상(胡床) : 북방민족식 접이 의자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같은 <<자치통감>> 기사를 인용하면서도 학처준이 안시성에 이르렀고 또 고구려 군사 3만이 당군을 공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마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별도의 독자적인 전승 기록을 참고하였던 듯하다. 당시 학처준이 이끄는 당군이 공격한 성이 안시성이냐 아니냐는 사실 매우 중요한 점이며, 이에 대응하는 고구려 군사가 3만이라는 점 역시 당시 요동 지역 방어체계에서 중요한 점이다.
만약에 학처준이 공격한 고구려 성이 안시성이라고 한다면, 전회에서 당 태종에 의해 요동성이 함락된 이후 요동 방어선의 중핵적 역할을 안시성이 맡았다고 하는 필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방증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안시성에서 3만 군사 이상이 당군과 대결하였다면 비록 신성이 무너졌다고 하더라도 안시성을 중심으로 하는 요동 방어의 최전선은 아직 그대로 건재하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만 안시성이 당시 당의 입장에서 매우 인상적인 성이었음을 고려하면 학처준 군의 공격 대상이 안시성이라는 점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그렇다고 고구려본기의 기사를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다. 어쨌든 안시성 기사의 진위를 확인할 다른 기록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당시 당군의 주력이 신성을 공략하는 동안에 별도의 당군이 요동 방어선의 다른 고구려 성(안시성을 포함)을 공격하여, 고구려 방어력을 분산시키는 전략을 수행하고 있음을 추정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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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골성 : 고구려 최대 산성으로 중국 요녕성 봉성시 봉황산성(鳳凰山城)에 비정된다. /사진=바이두
필자가 667년 9월 신성 함락 이후 당군의 움직임에 대해 부족한 자료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구체적으로 살펴보려는 이유 중 하나는 이때 고구려 요동 방어의 최후 요충지인 오골성(烏骨城)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지금 중국 요녕성 봉성시 봉황산성(鳳凰山城)에 비정되는 오골성은 성곽의 규모만 해도 고구려 성곽 중 최대 크기이며, 신성, 요동성, 안시성 등 요동반도 최전선의 성으로부터 압록강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합쳐지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수·당과의 전쟁에서 오골성이 항상 배후 진원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성을 장악한 이세적의 당군이 압록강 하류로 남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골성을 장악해야만 했다. 그런데 고구려 멸망 과정에서 오골성의 존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667년 10월까지 당군은 신성에서 국내성 그리고 여기서 원산만 일대로 이어지는 지역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신성에서 오골성과 압록강 하구로 이어지는 일부 지역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국내성 일대를 들어 당군에 항복한 남생의 배신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신라는 원산만 일대에서 북한강 유역을 거쳐 임진강 유역 일대를 차지하면서 고구려 남부를 압박해 들어갔다. 여기에는 연정토의 신라 투항이 결정적이었다. 따지고 보면 연개소문의 장남과 동생의 배신, 투항이 고구려 방어체계 전체를 뒤흔들어놓았던 것이다.
당군은 이렇게 고구려 영역 안에서 겨울을 지냈다. 645년 당 태종이 요동성을 함락시키고도 겨울을 앞두고 눈물을 머금고 퇴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전황이었다. 고구려 영토, 그것도 신성과 국내성을 포함하는 중요 지역을 당군이 차지하고 이곳에서 겨울을 넘겼다는 것은 이듬해 당군의 대공세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667년 이해 겨울은 고구려인들에게 유난히 춥고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돌아오는 새봄에 벌어질 격렬한 전쟁을 대비하여 평양성과 고구려인들은 무엇을 준비했을까?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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