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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5·18 기획-“명령에 복종했을 뿐”…‘충성’으로 뭉쳐 처벌 대비한 계엄군

강현석 기자 kaja@kyunghyang.com 입력 : 2020.05.17 20:10 수정 : 2020.05.17 21:03 



1994년 11월28일 점심 무렵 서울 여의도 한정식집 ‘녹원’. 현역과 예비역 고위 군인 8명이 모였다. 현역 장군 2명과 대령 2명, 예비역 장군 3명과 중령 1명 이었다. 모임 주최자는 정호용 당시 민주자유당 의원이었다.


정 의원은 5·18민주화운동 때 공수부대를 지휘한 특전사령관이었다. 참석자들 모두 5·18 때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여단장과 대대장들이다. 이들은 2시간여 동안 점심을 함께 했는데 외부인의 접근을 일체 통제했다고 한다. 이 자리는 5·18에 대한 검찰 수사를 앞두고 대응책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17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옛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예(비역)대장 정호용, 5·18당시 특전부대장 초청 오찬’ 문건 내용이다. 문건에는 “고소·고발된 (5·18 당시)특전사 대대장 9명 중 3명(예비역 소장 1명·예비역 준장 1명·예비역 대령 1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참석했다”면서 “오찬 참석자들을 대상으로 추가 동정을 파악하겠다”는 내용이 있다.


이 문건이 시사하는 점은 두 가지다. 5·18당시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 지휘관들이 승승장구해 대부분 장군으로 승진했으며 15년 전 사령관의 요청에 대부분이 한자리에 모일 정도로 ‘결속력’이 여전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들이 검찰 수사에 대비해 모임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들은 5·18과 관련한 검찰 수사에 상당한 불안감을 느끼고 대응책을 숙의했다.


■‘성공한 쿠데타’서 5·18특별법 제정…기소는 6명뿐


5·18에 대한 검찰수사는 1994년 5월13일 정동년 광주민주운동연합 상임의장 등 322명이 전두환씨 등을 내란죄와 내란목적 살인죄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씨를 포함해 5·18당시 광주에 투입된 대대장급 이상 계엄군 지휘관 35명이 고발 대상이었다. 검찰은 이 고발장을 바탕으로 5·18에 대한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했다.


하지만 검찰은 같은해 7월18일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해 큰 논란을 불렀다. 국민 반발이 거세게 일자 김영삼 정부는 그해 12월21일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 재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다음해인 1996년 1월23일 12·12와 5·18내란 사건 핵심 관련자 16명을 기소했다. 5·18학살과 관련해 고발된 35명 중 기소된 사람은 전두환·노태우·이희성·정호용·최세창·박준병 등 6명에 불과했다. 29명은 기소되지 않았다.


5·18 때 20사단 사단장이던 박준병은 주요 인사들 중 유일하게 무죄판결을 받았다. 실형이 선고된 전두환(무기징역)·노태우(징역 17년)·정호용(징역 7년)·최세창(징역 5년) 등도 1997년 12월22일 모두 사면복권 돼 석방됐다. 이들은 구속기간도 2년여에 불과했다.


당시 고발된 계엄군 지휘관들은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처벌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상당수 5·18지휘관들은 군내 요직에 있었다. 기무사는 검찰의 수사가 본격화 되면서 군 내부가 동요하자 1994년부터 1996년까지 당시 군에있던 5·18지휘관들의 동정과 발언 등을 지속적으로 파악해 문건으로 남겼다


5·18 당시 20사단 대대장으로 투입됐다 1994년 국방부 동원국장이었던 유효일 소장에 대한 기무사 문건에는 “지휘계통의 지시에 의거 출동한 대대장 등을 조사한다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면서 “군인이란 지휘계통의 상급자 말 한마디에 진로를 결정해야 하며 명령에 대핸 절대 복종은 군의 생명”이라고 말한 것으로 돼 있다. 그는 기소되지 않았고 처벌을 받지도 않았으며 2004년 국방부 차관이 됐다.


기무사는 소준열 5·18 당시 전투병과교육사령관의 동정을 파악해 “5·18과 관련해 본인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책임질 것은 확실히 지겠지만 오직 충성일념으로 군복무에 최선을 다했을 뿐 잘못은 없었다는 것인 본인의 신념이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5·18당시 7공수 33대대장 이었던 권승만 준장의 문건에는 “정부 조치에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 없어 몇몇 사람들과 대책을 논의하기로 했다”며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나온다. 3공수 11대대장 이었던 임수원 준장은 “정부에서는 명령권자만 처벌한다고 했지만 사견으로는 대대장급 이상 직위에 있는 사람들은 명령을 직접 수행했기 때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것으로 생각 된다”는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적혀있다.


기무사 문건에는 당시 합참의장 이었던 김동진 대장(20사단 61연대장)이 임 준장에게 “5·18당시 역사자료와 전투상보 등 관련 자료를 보고해 달라”고 지시를 했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육군 정훈참모부장 이었던 정영진 소장(20사단 61연대 대대장)은 “시위군중과 큰 출동이 없었음에도 지금 와서 무조건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군 지휘·명령체계에 악영향을 미칠 소지가 다분하다”면서 “책임자 처벌시 당시 수뇌부에 한정해야만 군의 동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발언한 것으로 기무사는 파악했다.


이들의 조직적인 반발은 군인들을 대상으로 수사를 진행한 군 검찰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기무사가 작성한 1995년 2월3일자 ‘군 검찰부 5·18관계 조사 진행 동정’에는 군 검찰의 조사 축소 사항이 기록돼 있다. 문건에는 “군 검찰부는 당시 진압작전에 참가한 12개 대대 중대장 14명에 대한 조사를 끝으로 사실상 참고인 조사를 모두 종료했다”고 밝히면서 “최초 참고인 56명을 조사할 예정이었으나 군 사기 저하 등을 우려해 대대 당 1∼2명만 조사했다”고 돼 있다.


■처절받지 않은 계엄군 지휘관…진상 규명 외면


이렇게 면죄부를 받은 계엄군 지휘관들은 현재도 5·18을 부정하며 진상 규명을 외면하고 있다. 최근 광주지법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두환씨의 사죄명예훼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계엄군들은 한결같이 ‘헬기사격’을 부정하고 있다. 1995년 검찰 5·18특별수사본부장을 맡았던 최환 변호사는 “전씨 휘하에 있었던 계엄군들의 충성심은 대단했다. (5·18을 부정하는)전씨의 뜻과 행동에 따라 그들도 이런 태도를 계속 견지할 것이다”면서 “정치권이 사면 복권을 너무 서둘렀다”고 말했다.


처벌받지 않은 계엄군 지휘관들은 국립묘지에 안장되고 있다. 국립묘지 안장대상은 무공훈장 수훈자나 장성급 장교, 20년 이상 군에 복무한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계엄군 지휘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전현충원에는 현재 진종채(2군사령관)·소준열·박준병·홍성률(1군단 보안부대장) 등 5·18에 관여한 지휘관들이 장군 묘역에 안장돼 있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이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았다면 5·18진상규명은 훨씬 빨라졌을 것이다. 계엄군 지휘관들은 이제라도 진상규명에 협조하고 국민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면서 “전씨처럼 끝끝내 버틴다면 단호한 처벌을 요구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 12일 조사를 개시한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특별법에 따라 조사 결과 범죄혐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검찰에 수사를 요청할 수 있다. 다만 진상규명 과정에서 가해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적극 협조할 경우 처벌하지 않고, 특별사면과 복권도 건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40년 동안 진실을 외면한 5·18계엄군에게 주어진 마지막 참회의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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