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60620
백제가 '한반도 듣보잡'? 중국도 점령했다
[백제사의 진실 ③] 요서 점령, 중국 역사서·교과서에도 나와
10.10.13 13:04 l 최종 업데이트 11.01.07 20:27 l 김종성(qqqkim2000)
▲ 백제시대의 토성인 몽촌토성. 서울시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에 있다. ⓒ 김종성
'백제'하면 흔히 충청·전라도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다. '백제'하면 서울·경기 지역도 함께 떠올려야 한다. 백제왕국의 발상지가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서울의 강남 3구 중 하나인 송파구에는 백제시대의 토성인 풍납토성·몽촌토성, 백제시대의 무덤인 석촌동·방이동 고분 등이 있다. 송파구 유적까지 떠올리면, 우리의 머릿속에서 백제의 영역은 한반도 남부의 절반으로 확장된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우리의 머릿속에서 백제의 활동영역은 훨씬 더 확장되어야 한다. 백제의 영향력은 거친 파도를 타고 해양으로도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백제가 해양을 통해 동쪽 일본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곰곰 생각해보면,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왕래하는 것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객선을 타고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서 대마도 이즈하라 항구까지 약 2시간 50분 정도 이동하다 보면, 대한해협의 물결이 상당히 거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총 363톤급의 여객선도 균형을 잡지 못해 자주 흔들릴 뿐 아니라 바닷물이 계속해서 객실 창문에 튀길 정도다. 오늘날보다 훨씬 못한 배를 타고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이 대한해협을 건넜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중국 정사에도 나오는 백제의 요서지역 점령
▲ 대마도 이즈하라 항구에 정박한 363톤급의 여객선. 부산과 대마도 사이를 왕복하고 있다. ⓒ 김종성
그런데 해양을 통한 백제의 팽창은 비단 '동쪽'을 향해서만 전개된 것이 아니다. 움직일 수 없는 확고한 역사기록에 의거할 때, 백제의 팽창은 해양을 통해 '서쪽'을 향해서도 펼쳐졌다.
이런 사실은 중국측 역사서들에까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초반까지의 백제 역사를 다룬 중국 측 사료들에서 그런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아래에 소개될 역사서들은, 중국이 서북쪽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아 분열상태에 빠졌을 때의 남중국 왕조들의 역사를 기록한 책들로서, 중국의 정사(正史, '정통 역사서'란 의미) 시리즈인 25사(史) 안에 포함되어 있다.
* 487년에 편찬된 <송서> 권97 이만열전(夷蠻列傳): "그 후 고구려는 요동(遼東)을 빼앗고 백제는 요서(遼西)를 빼앗았다.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晋平郡) 진평현이었다."(百濟國,本與高驪俱在遼東之東千餘里,其後高驪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晉平郡晉平縣.)
* 629년에 편찬된 <양서> 권54 제이열전(諸夷列傳): "진나라(晋, 진시황의 진나라 아님)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자, 백제도 요서·진평 2군 땅을 소유하고는 직접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晉世句驪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 당나라 때 편찬된 <남사> 권79 이맥열전(夷貊列傳):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빼앗자, 백제도 요서·진평 2군을 소유하고는 직접 백제군을 두었다."(晉世句麗既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
위와 같이 중국 측 정사에서는 고구려가 요동(요하 즉 라오허의 동쪽)을 지배하던 시절에 백제 역시 그와 인접한 요서(요하의 서쪽) 지방을 지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서북쪽 유목민족들의 침략으로 중국대륙이 분열된 틈을 타서 백제가 요서 지방을 점령했던 것이다. 다만, 관련 사료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도 인정한 북중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
위와 유사한 기록이 한국측 사료인 <삼국사기> 권46 '최치원 열전'에도 나온다. 최치원이 신라 사신으로서 당나라 대사시중(大師侍中)에게 올린(上) 글(狀)인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병 백만을 보유하여,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연·제·노를 흔들어 중국의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전성기의 고구려와 백제가 침략한 지역 중에 연(燕)이란 곳이 있다. '연'에는 요서 지방도 포함된다. 백제가 북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이 중국뿐만 아니라 신라에서도 인정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가 북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은 한국의 국사 교과서에서도 나와 있다. 예컨대, 2007년에 발행된 고등학교 <국사>에서는 "정복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배경으로 백제는 수군을 정비하여 중국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다"고 기술했다.
'점령했다' 대신에 '진출했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면 백제의 요서 점령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수군을 정비해서 요서로 진출했다'는 것은 군사력을 통해 요서 지방을 제압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의 공식 역사서에서는 '백제가 요서를 빼앗았다'고 직접적으로 기술한 데에 반해, 이를 홍보해야 할 한국의 공식 교과서에서는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며 간접적으로 기술했다는 것이다.
백제 요서 점령을 부정하는 학자들의 5가지 주장
▲ 백제의 대외관계. 그림은 4세기 때의 상황. ⓒ 고등학교 <국사>
아무튼, 기록상으로는 백제가 요서 지방을 점령했다는 사실이 명확한데도, 이 점은 특히 한국 학계에서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학계의 반대론자들이 펴는 주장 가운데에 주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백제의 요서 점령 사실이 정작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북중국의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다.
(2) 백제가 요서군을 점령할 때에 함께 차지했다는 진평군의 위치를 오늘날 확인할 수 없다.
(3) 526~539년에 나온 <양직공도>(梁職貢圖)란 사료에는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양직공도>보다 나중에 나온 <양서> <남사>의 편찬자들이 '낙랑'을 '한반도 낙랑'으로 오해하고 이 '한반도 낙랑'을 '백제'와 동일시했을 가능성이 있다.
(4) 북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백제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남중국 왕조들의 입장에서는 백제에 유리한 사실을 남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5) 진(晋)나라 말기의 요서 지방은 선비족 모용씨 집단에 의해 점유되었다는 것은 명확한 역사적 사실이다.
여기서 주장 (1)의 설득력은 그다지 높지 않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삼국사기> '최치원 열전'에는 유사한 내용이 나오지 않는가? 또 그 사실이 북중국 왕조들의 역사서에 나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어느 나라든지 간에 자국의 패배를 가급적 은폐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주장 (2)의 설득력 역시 그리 높지 않다. 오늘날 확인할 수 없다 하여 과거의 지명을 무조건 부인하는 것은 타당한 태도가 아니다. 오늘날 확인할 수 없는 지역에서 신라나 중국이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록이 나올 때에도, 과연 이렇게 '까다롭게' 나올 수 있을까?
주장 (3)에 대해서는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양서>나 <남사>보다 먼저 나온 <양직공도>에서 '낙랑이 요서를 점령했다'고 하여 <양서> <남사>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면, <양직공도>보다 40여 년 먼저 나온 <송서>에서 '백제가 요서를 점령했다'고 했으니 <양직공도>의 내용 역시 믿을 수 없는 것 아닌가? 이런 곤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양직공도>는 앞에 나온 <송서>의 잘못을 올바로 수정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일관성을 결여한 태도가 아닐까.
<송서>에서 백제의 요서 점령을 인정한 후에 <양직공도>에서 낙랑의 요서 점령을 인정한 데에 이어 <양서>와 <남사>에서 다시 백제의 요서 점령을 인정했다는 것은, <양서> <남사>의 편찬자들이 <양직공도>보다는 <송서>의 기록을 더욱 더 신뢰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주장 (4) 역시 설득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다. <송서> <양서> <남사>가 남중국의 역사에 관한 책이기는 하지만, 그중 <양서>나 <남사>는 수나라의 중국통일(589년) 이후에 편찬된 것이다. <양서>나 <남사>를 편찬한 사람들이 남중국의 동맹국인 백제를 옹호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위의 주장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5)라고 할 수 있다. 앞의 네 가지와 달리, 주장 (5)는 명확한 사실관계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나라 때에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는 기록과 충돌하는 '진나라 때에 선비족이 요서를 차지했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의 요서 점령과 충돌되는 기록이 있기에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주장 (5)의 논리다.
하지만, 백제의 요서 점령과 선비족의 요서 점령이 충돌된다고 하여, 유독 전자와 관련해서만 무조건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후자는 무조건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존재하는가? 백제의 요서 점령을 인정하는 역사서들이 조작되었다거나 오류투성이라든가 하는 증거도 없는데, 백제에 유리한 내용은 무조건 부정해버리는 것은 과연 합리적인 태도일까?
두 기록이 상충할 경우에는 둘 중 하나를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가급적 양쪽을 조화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일 것이다. 같은 진나라 시대에 요서를 점령했더라도 백제의 요서 지배와 선비족의 요서 지배가 시간적 차이를 두었을 경우라든가, 양쪽이 점령한 지역이 같은 요서 안에서도 서로 다른 곳일 경우 등등의 다양한 가능성을 놓고 두 기록을 가급적 살리는 편이 바람직할 것이다. 두 기록 중 하나가 조작됐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이렇게 양쪽을 다 살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접근법이 될 것이다.
요서 점령을 부정하는 명확한 문헌자료는 없다
▲ 백제에서 중국 요서로 직항하는 항구였던 전라북도 부안군 죽막동의 상상도. 그림은 배를 타기에 앞서 항해의 안전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모습. <한국생활사박물관> 4권 중 일부 ⓒ 사계절
이와 같이 백제의 요서 점령과 선비족의 요서 점령을 인정하는 기록이 각각 존재하고 각각의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현재로서는, 백제의 요서 점령을 무조건 믿어버리거나 무조건 부정해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일단 믿고 보는 태도나 일단 의심부터 하는 태도를 모두 버리고, 위와 같은 다양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원점에서부터 문제점을 재검토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의 요서 점령을 부정하는 명확한 문헌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백제의 요서 점령을 인정하는 문헌 자료만이 여러 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백제의 요서 점령을 일단 의심부터 하는 결정적 이유는 백제와 요서 사이에 큰 바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고구려가 요서를 점령했다고 하면, 믿기가 쉬울 것이다. 바다 건너에 있는 백제가 요서를 점령했다고 하니까, 기록이 엄연히 존재하는데도 쉽게 믿지 못하는 것이다.
북중국과 백제 사이에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백제의 요서 점령을 인정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해양 강국 백제의 파워를 간과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거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열도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가, 분열 상태에 놓인 중국의 일개 지역을 점령하지 못하란 법이 있는가?
19세기에 영국은 바다를 통해 중국에 진출하여 홍콩을 빼앗았다. 영국보다 훨씬 더 중국에 가까운 백제가 그만한 일을 못하리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게다가 영국이 상대한 중국은 통일제국이었지만 백제가 상대한 중국은 분열 상태였다. 지리적으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영국이 해낸 일을 백제라고 못하란 법은 없는 것이다.
해양을 통한 공격이 육상을 통한 공격에 비해 결코 불리하지 않으며, 한민족의 해상 파워가 현대보다는 고대에 훨씬 더 강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중국과 백제가 바다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백제가 요서를 점령했을 리 없다는 선입견을 배제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런 선입견을 배제한 상태에서 백제의 요서 점령과 선비족의 요서 점령의 충돌 문제를 중립적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과제다.
백제는 태평양 서안의 강력한 '해상강국'
향후 이 문제가 어떻게 판가름 나든 간에, 이런 논쟁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고대왕국 백제의 역량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백제의 요서 점령이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그만큼 백제가 여기저기 많이 '쏘다니면서' 활약상을 펼쳤기 때문이 아닌가. 백제가 한반도 귀퉁이에서 조용히 지냈다면, 이런 논쟁이 국제적으로 발생할 리도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는 충청·전라에 국한된 왕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울·경기·충청·전라에 국한된 왕국도 아니었다. 백제는 바다를 통해 일본과 중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한 태평양 서안(西岸)의 강력한 해상강국이었다.
따라서 우리 머릿속에서 백제를 떠올릴 때에는, 한반도 귀퉁이만 떠올릴 것이 아니라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동지나해를 포괄하는 거대 영역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백제의 위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류의 원조, ‘백제류’ - 한겨레21 (0) | 2014.09.09 |
---|---|
교과서가 미워하는 백제 역사 - 한겨레21 (0) | 2014.09.09 |
백제의 멸망, 찌질해서가 아니라 자만해서였다 - 오마이뉴스 (0) | 2014.06.17 |
을지문덕 살수대첩 승리, 백제 무왕 덕분이었다? - 오마이뉴스 (0) | 2014.06.12 |
동북아 국제해전 백강전투의 현장 기벌포 - 뉴스서천 (0) | 2014.0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