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134.html

교과서가 미워하는 백제 역사 
중흥기 역사 생략한 채 멸망에만 방점…황국사관 무비판적 수용도
[한가위별책-백제 깨어나다] - 백제, 그 이후   
[2010.09.17 제828호]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공주 송산리 고분군’(262쪽)이라고 설명이 붙었지만 기실은 ‘송산리 고분군 모형관’ 사진을 잘못 게재한 것이다. 2002년 초판에서 송산리 고분군 사진을 제대로 게재한 것과 비교하면 지금은 개악이 되었다.
 
중등교육에서 국사는 올바른 국민적 정체성 확립과 다양한 사관의 수용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서해 바다의 ‘황해’ 표기처럼 자기 인식의 부재가 곳곳에 드러나 있다. 더구나 ‘남해’는 표시도 되지 않았다. 삼국시대 백제사 서술 부분 또한 심각한 오류들이 보인다. 우선 건국설화와 관련된 부분을 꼽을 수 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백제 건국 집단을 “백제는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과 고구려 계통의 유이민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되었는데”(47쪽), “고구려 주몽의 아들로 알려진 온조가 남하하여”(47쪽)라고 했다. 이대로라면 백제 건국 세력은 고구려 계통이 되지만, 이와 다른 기록이 훨씬 많다. 가령 <삼국사기>에는 온조 설화 외에도 북부여 계통인 비류 시조 설화를 함께 수록했다. 중국이나 일본 문헌에서 백제 시조라는 구태나 도모대왕은 부여 계통이었다. 더구나 백제인이 시조로 인식한 동명왕은 고구려가 아니라 기실은 부여의 시조였다.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는 “저희는 근원이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왔다”고 해 자국의 근원이 부여임을 분명히 했다. 백제 왕실의 씨(氏)인 부여씨의 내력을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내려왔기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했다. 실제 부여씨는 370년께 부여 왕실의 씨인 것으로 확인됐다. 게다가 중국 역사서에서 백제를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해, 백제 건국 세력을 부여의 한 갈래로 인식했다. 그 밖에 성왕은 사비성 천도와 더불어 남부여로의 개호(改號)를 통해 부여로부터 내려오는 역사적 법통 계승을 천명했다.

제7차 교육과정에 의한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 2002년 초판 본문에서 “사비성과 웅진성의 당군을 공격하면서”(59쪽)라고 했지만, 이 지도에서는 ‘사비성’을 임존성이나 주류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 중심지’로 부각시키는 모순이 보인다. 더구나 명색이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운동 세력’이라는 이름의 지도이건만 ‘통일신라’로 표기됐다. ‘통일신라’는 백제 땅의 지배권을 장악하고 한반도에서 당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낸 676년 이후라야 가능한 용어다. 재판에서 수정했다지만 이런 명백한 오류가 4년간이나 버젓이 통용됐다.
 
뿌리는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

요컨대 당시 백제인들은 자국의 기원을 일관되게 부여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교과서에는 이런 사실을 단 한 줄도 언급하지 않고, 백제 건국 세력을 고구려 계통으로만 간주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열등감을 지녔다는 허황된 주장까지 나왔다. 이렇듯 백제 건국 세력에 대한 편중된 서술은 백제사에 대한 편견의 단초가 되었다.

두 번째로 성왕의 관산성 패사(554년) 이후 위덕왕이나 무왕과 의자왕대에 이르는 무려 100여 년에 걸친 국력 회복과 군사적 성취에 대해 단 한 줄의 언급도 없이 멸망으로 넘어간 부분을 지적할 수 있다(51~54쪽). 이 기간에 백제는 불교 이념을 적절히 이용해 강력한 왕권 구축과 익산 천도 추진, 동양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 창건, 신라에 대한 군사적 공세로 넓은 영역 확보라는 괄목할 만한 팽창을 이뤘다. 교과서가 이런 내용을 서술하지 않음으로써 백제 멸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저변에 깔리게 한 요인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실제 국사 교과서에서는 백제의 멸망을 “이미 내부적으로 정치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으로 국가적 일체감을 상실한 백제는 결국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54쪽)라고 기술했다. 백제는 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와 다름없다. 이 문구에는 은연중 백제는 멸망함으로써 ‘질서의 문란’과 ‘지배층의 향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왜곡될 소지마저 있다.

백제 멸망이 억압의 해방!

물론 이런 기술이 백제 멸망의 온전한 배경이 될 수는 없다. 당대에 100여 개 신라 성을 점령해 승전에 도취한 의자왕의 자만심, 신라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당나라 세력의 유인과 국제 정세 급변이라는 복합적 요인이 백제 멸망의 1차적 요소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비성이 함락되면서 멸망하고 말았다”(54쪽)고 해 변변한 항전도 없이 백제가 역사 무대에서 사라진 것처럼 서술했다. 그러나 이는 풍왕을 수반으로 하는 백제가 복구됐기에 그 멸망을 663년 백강 전투까지로 지목한 조선 후기 이래의 인식과도 배치된다.

백제인의 국가회복운동을 교과서에서는 ‘백제부흥운동’(54쪽)으로 명명했다. 그런데 ‘부흥’은 중흥 개념일 뿐 탈취당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용어로는 부적절하다. 이 용어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 일본왕(천황)이 멸망한 임나의 재건을 지시했다는 ‘임나부흥’의 ‘부흥’에서 비롯됐다. 즉, ‘백제부흥운동’이라는 용어는 종주권자인 천황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백제를 감히 멸망시킬 수 없다는 황국사관에 입각한 것이다. 천황권의 엄존을 과시하려는 입장에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연구자가 최초로 사용한 용어를 답습한 것이다.

또한 교과서는 ‘삼국의 경제생활’에서 백제의 대외 진출과 관련해 “백제는 남중국 및 왜와 무역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136쪽)고만 기술했다. 그런데 백제가 수군을 정비해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고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했다면(49쪽), 그 이상의 풍부한 문헌 사료와 물적 증거를 지닌 동남아시아 지역과의 교류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게 의아하다. 국제성을 띤 백제 문화의 공간적인 토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백제의 국제성 반영 못해

게다가 칠지도를 ‘금속기술의 발달’(260쪽)에 수록해 제철기술의 우수함만 언급함으로써 이 칼이 지닌 정치적 위상을 사장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삼국 가운데 백제가 정치·문화적으로 가장 ‘빈약’하다는 인상만 심어준 것이다. 후대에 여러 차례 걸러진 역사서보다는 백제인들의 사고와 정서가 담긴 당대의 자료를 십분 활용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국가의 백년대계’라는 교육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특히 역사 교육은 그 수용자에게 왜곡되거나 편견에 사로잡힌 역사상을 갖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재 국사 교과서의 백제 관련 서술은 백제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심어줄 위험이 있다. 객관적이면서도 정확한 역사를 다음 세대에 물려주려면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 아울러 학계의 연구 성과를 제대로 빠르게 반영하려는 교과서 집필진의 노력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학교 문화유적학과 교수

*이 글의 검토 대상인 2010년 5쇄인 검인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2002년 초판, 2006년 제2판을 인쇄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