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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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왕(荷知王)은 가야의 국왕이었다. 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고는 보국장군(輔國將軍), 본국왕(本國王)의 관작을 하사받았다.[1]


미궁의 왕


1. 금관가야의 왕이라는 설


조선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하지왕을 금관가야 수로왕의 후손으로 비정했는데[2] 금관가야의 왕들 중 6대 좌지왕(坐知王), 8대 질지왕(銍知王), 9대 겸지왕(鉗知王) 등과 같이 지(知)자가 들어간 이름을 사용하는 왕들이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하지왕은 이 3명의 왕들 중 한 사람일 것이라고 추정했다.[3]


시간이 흘러 일제강점기 사학자 중 일부도 하지왕을 금관국의 왕으로 비정했는데 이마니시 류는 일본어의 발음상 겸(鉗: ゲノ)과 하(荷: ゲ)의 발음이 유사하기 때문 9대 겸지왕과 동일인물로 파악했다. 하지만 겸지왕의 재위기간이 남제서의 기록과 맞지 않는 문제가 생기자 가락국기의 연대가 잘못된 것이라 주장했다.[4] 그러자 무라카미 요시오는 재위기간이 맞는 제8대 질지왕이라며 주장했다.[5]


현대에 들어서 금관국의 활발한 해상교역 능력을 강조하면서 하지왕을 금관국의 왕으로 비정하기도 한다.[6]


2. 대가야의 왕이라는 설


가락국기에 보이는 금관가야 역대 왕명에 하지와 동일한 것이 없으며, 당시 백제가 남제와 통교하고 있었으므로 고령 지역에 위치한 가야 세력이 백제의 사신을 따라 남제와 통교한 것으로 파악했다.[7] 가야제국에 속한 나라들 중에서 대외적으로 "가라"를 칭할만한 강성한 세력으로 고고학적으로 볼 때에 5세기 후반 대에 가장 왕성한 세력을 이루었던 대가야를 가야제국을 대표해서 중국과 집적 통교할만한 위상을 갖춘 나라라고 보았으며, 또한 하지왕의 정체를 대가야의 가실왕으로 파악하였다.[8]


각주


1. 소도성 (479년). 〈동남이(東南夷) 가라전(加羅傳)〉. 《南齊書》 [남제서]. 권 58 열전(列傳) 제39 만(蠻).

2. 정약용 (1985년) [1865년]. 〈봉전고 서(封典考敍)〉. 《茶山詩文集》 [다산시문집] 제15권. 번역 정태현.

3. 정약용 (1811년). 〈변진고(弁辰考)〉. 《아방강역고》 제1권.

4. 이마니시 류 (1937년). 《朝鮮古史の硏究》 [조선고사의 연구]. 고노자와서점 (近澤書店).

5. 무라카미 요시오 (1978년). 《朝鮮古代史硏究》 [조선고대사연구]. 개명서원(開明書院).

6. 연민수 (1997년). 《고대한일관계사》. 혜안. ISBN 9788985905589.

7. 천관우 (1976년). 《三韓의 國家形成 (下) :「三韓攷 제3부》 (학술저널). 일지사.

9. 김태식 (1993년 12월 1일). 《가야연맹사》. 일조각. ISBN 9788933700563.


전 임
7대 금림왕
제8대 대가야의 국왕
? ~ ?

후 임
9대 이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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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재위기간 미상


1. 소개


중국 역사서 《남제서》 만동남이전(蠻東南夷傳)에 등장하는 가야의 왕. 479년에 여러 나라의 사신과 더불어 가라왕 하지가 사신을 통해 폐백을 바쳤고, 이에 보국장군본국왕으로 제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加羅國 三韓種也 建元元年 國王荷知使來獻 詔曰 量廣始登 遠夷洽化 加羅王荷知款關海外 奉贄東遐 可授輔國將軍本國王


가라국은 삼한의 종족이다. 건원 원년(479)에 국왕 하지의 사신이 와서 (조공을) 올렸다. 조서를 내려 “널리 헤아려 비로소 (남제 조정에) 올랐으니, 먼 오랑캐가 감화되었다. 가라왕 하지가 바다 밖에서 관문을 두드리며 동쪽 먼 곳에서 폐백을 바쳤으니 가히 보국장군 본국왕에 제수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남제서》 권58 열전 제39 만동남이전


이때 하사받은 보국장군은 남제의 제3품으로, 표기대장군이나 진동대장군 등의 제2품을 하사받은 고구려나 왜보다는 낮지만 상당한 지위를 남제에게 인정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본국왕이라는 작호 또한 본국(가야 연맹)에 대한 실질적 지도자임을 인정받았다고 볼 수 있다.


그외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2. 정체?


정약용은 "수로왕의 자손에는 좌지왕, 질지왕, 겸지왕이 있는데 하지는 이 삼지의 하나라고 했으니 그 연대로 보아 질지왕이 틀림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즉 정약용은 하지왕을 김해 금관국 왕으로 추정한 것.


그러나 현대에는 금관국이 아니라 반파국(대가야) 가실왕이 하지왕과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한다. 우선 5세기 후반대에 가야 지역에서 가장 잘 나가던 나라는 반파국이라는 게 정설이며 고고학적으로도 증명이 되어있으므로 중국까지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낼 정도면 반파국일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가실왕은 우륵에게 12개 노래를 짓게 했는데 노래의 제목들이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가야 각 지역의 지명이나 소국 명칭과 유사했다.[1] 가실왕은 후기 가야권의 영향력을 굳히려 했고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도 그 의지라는 것.


그러나 가실왕은 우륵과 동시대 사람, 즉 6세기 사람이라 남제서의 저 기사와 시기차가 제법 있어 확실하진 않다.




[1] 12곡은 첫째 하가라도(下加羅都, 김해 금관국), 둘째 상가라도(上加羅都, 고령 반파국), 셋째 보기(寶伎), 넷째 달이(達已, 전남 여수시 돌산읍), 다섯째 사물(思勿, 경남 사천시 사천읍), 여섯째 물혜(勿慧, 전남 광양시 광양읍), 일곱째 하기물(下奇物, 전북 장수군 혹은 임실군), 여덟째 사자기(師子伎), 아홉째 거열(居烈, 경남 거창군), 열째 사팔혜(沙八兮, 경남 합천군 초계읍), 열한째 이사(爾赦, 경남 의령군 부림), 열두째 상기물(上奇物, 전북 남원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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