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10041347041

[창간61주년 특집]고구려·발해 융성의 원천은 ‘다종족 통합’ 
이기환 선임기자  입력 : 2007-10-04 13:47:04

최근 기자는 연해주 우스리스크 인근 체르냐치노 유적을 실견한 바 있다.

유적 한쪽에 150기가 넘는 대규모 발해고분군이 있었다. 그런데 무덤의 묘제가 너무도 다양하며, 종류별로 구획을 나눠 조성됐다는 게 무척 흥미로웠다.


연해주 체르냐치노 발해고분군. 말갈족의 무덤양식인 토광묘 떼(왼쪽 부분)와 고구려의 무덤양식인 돌무덤들(오른쪽 부분)이 사이좋게 조성되어 있다. |한국전통문화학교 제공

북쪽엔 토광묘가 열지어 있으며, 남쪽엔 석실묘가 분포됐다. 토광묘와 석실묘 가운데는 부석묘가, 석실묘 사이사이엔 위석묘가 있었다.

삼국지 위서 같은 역사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돌로 쌓아 봉분을 만든다(積石爲封)”고 했다. 반면 “말갈의 장례습속은 관이 없으며, 땅을 파서 시신이 직접 흙에 닿게 한다”(구당서)고 했다. 결국 돌무덤(석실분, 위석묘, 부석묘)은 고구려인들이, 흙무덤(토광묘)은 말갈인들이 조성한 것이다. 정석배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는 “발해 백성들인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한데 어울려 살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드라마틱한 유적”이라고 말했다.

알다시피 발해는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세운 나라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고구려 별종’(구당서, 자치통감, 송사)이라 했다.

송기호 서울대교수는 아예 대조영을 ‘말갈계 고구려인’이라고 못박고 있다. 송교수는 “말갈인의 혈통을 이어받은 대조영은 고구려에 들어와 상당한 정도로 고구려화를 이뤘으며, 고구려 귀속의식이 강했던 인물”이라고 보고 있다. 어쨌든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을 이끌고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운다.

대조영 세력은 “겨우 1000명의 고구려 유민이 발해를 세웠다”(입당구법순례행기)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시작은 미미했다. 하지만 요동~천문령~동모산에 이르면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흡수, 40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얻었다. 이 숫자는 2대 대무예왕대에 이르러서는 120만명선으로 급증하게 된다.
 

안악 3호분 주인공 동수. 고국원왕설, 미천왕설도 있으나 중국에서 망명한 동수라는 설이 유력하다.

발해는 극성기에 동으로는 연해주, 서로는 요동반도, 북으로는 송화강까지 미치는 대국으로 성장했다. 만약 한핏줄 운운하면서 고구려계, 말갈계로 나눠 반목했다면 그같은 제국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말갈족이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 고구려 영양왕은 말갈병 1만명을 거느리고 중국의 요서지방을 공략(598년)했다. 이 사건은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패배-멸망의 단초을 낳는다. “동이 최강”(위서)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용맹스러웠던 말갈족이 동북아 정세에 끼친 영향이 컸다는 얘기다. 645년 당태종이 고구려를 쳤을 때도 말갈인들이 나섰다. 그런데 당태종은 고구려군 3만6800명이 항복하자, 유독 말갈인 3300명만을 생매장시켰다. 고구려를 위해 수천명의 말갈인이 죽은 것이다.

정약용은 “이때의 충격으로 말갈인들이 발해의 건국을 적극 도왔다”(강역고)고 해석하기도 했다.

비단 발해뿐이 아니다. 고구려는 정복국가였으며, 다종족 국가였다. 부여에서 이주한 주몽세력이 세운 고구려는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선비 일부, 황룡국, 해두국, 개마국, 구다국, 갈사국 등을 차례로 복속시킨다. 4~5세기 들어 영토가 3배 정도로 확대됨에 따라 고구려민보다 새로 편입된 주민들이 더 많아지게 된다. 윤명철 동국대 교수는 “서로 다른 종족과 문화를 조정하고 통합하지 않았다면 고구려 제국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씨름총(각저총) 벽화 모습. 서역인의 얼굴이 보인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함락시킨 고구려는 고국양왕때(385년) 요동정벌에 나서 중국인 1만명을 잡아오기도 했다. 고구려는 능력있는 중국인들을 적극 등용했는데, 바로 안악 3호분 벽화의 주인공인 동수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이종욱 서강대 교수는 “동수는 336년 전연의 모용황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동수의 직책은 ‘낙랑상(樂浪相)’이었는데, 이는 낙랑의 옛땅을 관장하는 직함일 것이다. 고려시대엔 더했다. 박옥걸 아주대 교수는 고려시대에는 23만8225명이 귀화했다고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고 있다. 박교수 분석에 따르면 발해유민 12만2268명, 여진계 9만7662명, 원계 1만3273명, 거란계 4072명, 일본계 348명, 중국계 184명이다.

특히 광종 7년에 귀화한 중국 후주 출신 쌍기가 유명하다. 그는 귀화후 원보 한림학사가 되어 958년 과거제도를 창설하는 등 고려건국의 기틀을 쌓았다.

이밖에 최무선에게 화약과 화포술을 가르쳐준 이원(중국 강남출신), 그리고 왜구를 물리치는 데 공을 세운 나세(원나라 출신)와 변안열(심양 출신) 등도 귀화인이다. 또한 여진계 가운데는 고열처럼 군공을 세워 고위관직에 오른 이도 있고, 천리장성을 쌓는 데 동원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역시 이런 귀화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이뿐이 아니다. 베트남 망명 왕족인 이용상은 몽골 침입때(1253년) 발벗고 나서 적을 무찔렀다. 원나라 공주를 따라온 장순룡(덕수 장씨)은 위구르 출신이다. 만약 장순룡이 귀화하지 않았다면 훗날 조선시대 한문학의 4대가로 꼽히는 장유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정이 이럴진대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며, 백의민족이라는 순혈주의 교육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박철희 경인교대 교수는 “예컨대 우리 교과서는 여진족을 평화로운 교류를 괴롭히는 종족이며 응징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런 순혈지상주의, 민족주의는 언제 비롯됐을까. 1905년 무렵 단재 신채호와 위암 장지연 선생 등이 일본의 국권침탈에 맞서기 위해 민족주의를 내세웠으며, 이 민족주의는 독립운동정신의 근간이 되었다. 이 민족주의는 해방 이후에는 한국전쟁과 남북분단, 경제개발 등의 와중에서 백성들을 하나로 묶기도 했다.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는 “일제시대나 분단시대, 그리고 경제개발의 시대엔 민족주의가 순기능의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러나 외국인 100만명 시대를 맞은 작금에는 지나친 배타주의로 빠질 수 있다”고 경계했다. 아예 순혈지상주의, 지나친 민족주의를 불어넣는 데 ‘결정적인 도구’가 된 단군신화를 재해석하자는 의견도 나온다.

신화학자인 양민종 부산대 교수는 “그동안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동질성을 강조하는 데 활용됐고, 종족의 가치를 지향하는 데 해석돼왔다”면서 “이제 단군신화를 이데올로기가 깔린 민족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봐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단군신화에서는 근대화의 개념인 ‘민족’이 강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단군신화는 곰족이 호랑이족과의 투쟁을 통해 승리했다는 식으로 해석됐다. 곰족의 후예, 단일민족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데 활용했고, 그럼으로써 지독한 민족주의로 빠진 것이다. 단군신화의 요체는 곰족과 호랑이족이 야만의 속성을 버리고 인간화, 문명화를 이뤘으며 보편성과 인간성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단군신화는 민족의 신화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문명을 지향하는 신화”라면서 “따라서 우리는 단군신화를 있는 그대로의 신화로 보고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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