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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경제

발해의 [건국과 성쇠] 1. 건국 http://tadream.tistory.com/6937

2. 발전, 3. 내분, 4. 융성  http://tadream.tistory.com/6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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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업경제

발해의 경제와 관련된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루이쥬코쿠시(類聚國史)』에 “발해는 매우 추운 지역이라서 논농사〔水田〕에 적합하지 않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신당서』발해전에 특산물이 나열되어 있다. 백두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마포, 옥주의 면포, 용주의 명주, 철주 아래 위성현의 철, 노성 즉 노주의 벼, 미타호의 붕어, 환주 아래 환도현의 오얏, 악유(樂游) 즉 낙랑현의 배 등이 있다. 이를 통하여 농업, 방직업, 목축업, 어업, 광업 등이 주된 산업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당나라와 일본에 보낸 물품으로 각종 짐승 가죽, 인삼이나 꿀·사향과 같은 약재, 구리와 같은 광산물이 들어 있어서 수렵업, 임산업 등의 면모나 외국과의 무역 양상을 추측할 수 있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각종 유물을 통하여 도자기(陶磁器) 제조나 제련과 관련된 수공업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유민에 관한 기록이지만 송나라 왕증(王曾)은 발해인들이 철을 제련하는 것을 목격하여, “유하관(柳河館)에 이르렀다. 유하는 유하관 옆에 있다. 서북쪽에는 야철하는 곳이 있는데, 발해인들이 많이 산다. 유하에서 모래와 돌을 걸러서 제련하여 철을 생산한다”고 적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에 발해의 경제는 1차 산업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수준이나 질에서 낮은 편이었다. 반면에 당나라나 일본으로부터 들여오는 물품들은 문방구, 그릇, 옷감 등이 중심을 이루면서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이용되었다.


2. 대외교류

발해는 다섯 개의 주요 대외교통로를 통하여 당나라, 일본, 거란, 신라 등과 교류하였지만, 구체적인 교류 내용을 알 수 있는 것은 당나라 및 일본과의 관계이다.

발해는 당나라에 조공을 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다. 발해는 당나라 및 그 후속국가들에 145회 이상 사신을 파견하였고, 중국은 16회 정도 사신을 보냈다. 이러한 조공-책봉 관계는 당나라에 대한 정치적 예속성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그렇다고 해서 독립국가가 아닌 당나라 지방정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책봉을 받은 당나라 주변국 지배자는 수를 셀 수 없이 많은데, 이 모두를 독립된 지배자가 아니라 당나라 관리로 규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당나라는 발해를 홀한주도독부(忽汗州都督府)로 삼았지만, 이것만으로 당나라 지방행정단위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타당성이 없다. 당나라는 800여개의 기미부주(羈縻府州)를 설치했으니 이를 모두 당나라 영토로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학자들이 조공-책봉 관계나 기미주를 근거로 발해가 독립국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타당성이 없다.

정치적 교류 과정에서 경제적 교류도 진행했다. 713년 12월에 발해 왕자가 당나라에 도착하여 시장에서 교역할 수 있기를 청하여 허락을 받은 기록이 보인다. 발해가 당나라 조정에 보낸 물품은 대부분 지방 특산물로서, 호랑이·해표·담비·곰 등의 가죽, 말·매 등의 짐승, 물고기·마른 문어·다시마 등의 해산물, 인삼·잣·백부자(白附子) 등의 약재, 여자·아이·노비 등의 사람 따위가 있다. 그 답례로 당나라에서는 비단이나 옷가지, 금·은 그릇 등을 내려주었다.

발해 조공도의 경로이면서 발해관(渤海館)이 있던 산동 등주(登州)를 중심으로 조공과 무관하게 당나라와 무역을 하기도 했다. 일본의 승려인 엔닌(圓仁)은 839년에 발해 교역선이 바닷가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또 당나라 후반에 득세했던 지방세력과도 말, 구리 등을 교역한 기록이 전해진다.

발해는 일본에 35회 사신을 파견했고, 일본은 13회 파견했다. 일본과의 교류는 처음에 정치적, 군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뒤에는 점차 상업적으로 변했다. 825년 12월 발해 사신이 일본에 도착했을 때에 이들이 실제로는 상인들이기 때문에 이웃나라의 손님으로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상인들을 맞아들여 나라에 손해를 끼칠 수 없다고 신하가 건의한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일본과 교역한 것을 보면, 발해에서는 담비·표범·곰 등의 가죽, 인삼이나 꿀 같은 약재 등을 보냈고, 일본으로부터는 비단·면포·실 등의 옷감, 황금, 수은, 칠(漆), 부채 등을 들여왔다. 크게 보면 발해의 모피와 일본의 섬유가 교환되는 형식이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물품은 주로 왕실이나 귀족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었다. 일본에서는 798년에 6년에 한 번씩 사신을 파견하길 요구했고, 824년 6월에는 12년에 한 번 파견하도록 조처했다. 또 828년에는 사사로운 교역을 엄격히 금지하기도 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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