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4.htm
* "북한의 발해사 인식 - 대륙연구소" 중 "4. 연구 동향"에서 "(1) 주민구성 문제"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발해 주민 구성 문제
(1) 주민구성문제

발해사의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었는가 그렇지 않은 말갈인들의 국가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따라서, 북한도 여기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다. 발해사연구실로 옮겨온 장국종이 처음 낸 논문이 바로 주민구성에 관한 것이었다는 것도 그들이 주민구성 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좋은 실례라 할 수 없다.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시라토리[白鳥庫吉]가 지배층의 고구려유민설을 언급한 이래 믿어지고 있는 지배층은 고구려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남한과 일본의 대부분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그러나, 중국이나 러시아는 지배와 피지배 주민을 막론하고 모두가 고구려와 다른 말갈인의 발해였다고 한다. 이 점에서 특히 한국과 중국의 견해차는 심하다.

한국도 발해의 주민구성에 대한 생각이 일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달리 1988년 필자는 종족계통과 정치군사적 관계로 보아 발해의 주민 모두는 대부분 고구려유민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북한도 1990년 장국종의 글부터 필자와 같은 입장으로 주민구성에 관한 그들의 견해가 바뀌어져 있다.

북한은 초기에 지배층의 고구려유민과 피지배층의 말갈설을 수용하고 있었다. 즉, 발해 주민의 10분의 3내지 4는 고구려유민이었고, 다수는 말갈이었다는 견해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박시형의 다음 글로 확인할 수 있다.

발해국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종족-신분, 환언하면 량반에 해당하는 것은 고구려인들이였는데, 그들은 중앙은 물론이요 지방 관직까지 거의 독점하고 있었고 군대 복무에서도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이와 관련하여 발해국에서의 고구려인과 말갈인과의 수적 비중도 대체로 짐작할 수 있다. 원래 상기와 같은 종족-신분적 관계가 성립되기 위하여는 고구려인이 지나치게 많을 수도 없을 것이다. 원래 고구려인이 주민중에서 지나치게 적었다면 말갈인과의 력량 대비상 그러한 관계가 성립될 수 없을 것이요, 또 상기 류취국사의 표현도 그렇게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단순히 말갈인이 많고 토인은 적다는 표현으로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 그와 반대로 고구려인이 거의 반반으로 될 만큼 많은 수를 차지할 수도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량자 간의 수적 대비를 정확히 따지기는 곤난하나 구태여 천착을 한다면 고구려인은 주민중에서 대략 10분의 3-4정도는 차지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이 수적 관계는 지방과 력사적 시기에 따라서 각이할 수 있었겠지마는, 적어도 일본사절들이 주로 래왕하던 연도 즉 그의 소위 동경 룡원부 일본도(東京龍原府日本道)와 수도가 있던 상경룡천부(上京龍泉府)지방, 다시 말하면 예로부터 속말말갈의 거주지로 되여 있던 지방들은 이에 가까운 형편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로 부터 서쪽 료하 방면 즉 옛 고구려의 중요지역으로 나올수록 고구려인의 비중은 더 많아 졌을 것이다. 또 발해국은 동쪽으로 원 속말말갈이 아닌 다른 말갈 제 부족을 거의 다 완전 통합하였거나 예속 관계에 두었기 때문에 이 지방들은 거의 전부 말갈인들의 주지역으로 되였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중략) 발해는 원 고구려인의 국가였다. 다만 이 관계에서 원 고구려와 발해의 차이를 말한다면 발해에서는 주민중에서 말갈인들이 원 고구려 시기보다 량적으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였다는 그것 뿐이다. 그것은 두개 왕조의 령토를 비교할때에 큰 차이는 없지마는 원 고구려 령토가 서방 료하 방면과, 남방 신라 방면에서 다소 줄고 동방 말갈족들의 거주지 방면에서 상당히 팽창하였으며 또 주민으로 볼 때에는 3국의 통합 전쟁 과정에 적지 않은 고구려인들이 신라와 서방으로 이주하고 그대신 동방에서 말갈인들의 수가 상당히 증가하였다는 거기서 오는 것이다.

박시형이 발해의 주민구성문제에서 공헌한 것은 지배층의 고구려유민설을 보다 확고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의 {속일본기(續日本紀)}를 통해 발해국의 창건자가 말갈인이 아닌 고구려인이었음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다. 즉, 727년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발해왕 스스로를 고(구)려국왕 내지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그의 빼어난 견해로써는 고구려의 건국 설화에서 보이는 천손(天孫) 사상이 발해가 일본에 보낸 국서에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발해의 고구려계승과 독자성을 보다 확실하게 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발해의 상층부를 구성하는 왕족인 대씨를 비롯해서 귀족들 모두는 고구려인이었다는 사실도 확인하였다. {유취국사(類聚國史)}의 수령(首領)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도 주민구성을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수령은 발해의 부, 주, 현 지방들에 상당한 수로 존재하였고 그들의 대부분은 곧 고구려인들로 구성되었다고 하며, 발해의 군사제도에 있어서 이들 수령들은 특권적인 사람들로 말갈(군)을 령도지휘하는 입장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모두가 말갈이 고구려인보다 많았다는 점에서 출발한 것으로써, 기본적으로는 일본인들의 지배층의 고구려유민설을 크게 뛰어 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 고씨와 발해의 대씨는 동성이씨(同姓異氏)였다고 하여(1992) 지배층의 순환마저도 인정치 않았다. 그러나 발해의 건국은 고씨 고구려에서 대씨 발해로의 정치적 순환이었으며, 대조영의 아버지는 고구려시대에 송화강유역의 지방 장관에 있던 걸걸중상(乞乞仲象)으로써 결코 중앙귀족도 아니었던 지방출신이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같은 생각은 1990년 장국종의 글에서 변화되었다. 다수의 고구려유민이 발해의 주민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의 관점은 발해의 피지배주민을 중시하는 것이었다.

발해총인구의 압도적부분을 차지한것은 고구려계통의 발해사람(고구려주민)들이었으며 말갈사람과 그밖의 종족은 매우 적었다. 그 전날 고구려령토였던 발해의 기본령역(본토라고도 함)안에 나라의 총인구의 대부분이 살고있었으며 말갈인등이 주로 사는 변방(동북쪽변방의 북위 45-46도이북지방)은 면적이 매우 넓었으나 기후와 생활조건 등이 불리하여 인구밀도가 희박하였다. 그러나 지난 시기 내외의 학계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도하여 발해국의 기본 주민이 마치도 말갈사람이였던 것처럼 여기는 견해들이 류포되어 있었다.(중략)

지난 시기 발해의 주민구성이 고구려의 것을 계승하였다는것을 밝힌 학자들가운데는 통치층주민의 족속을 따지는데만 주목을 돌린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물론 통치층도 발해주민에 속한 것인만큼 그 계승관계를 밝히는것도 중요한 문제로 나서며 그것은 문제해명에서 일보전진으로 된다. 지난날 발해의 통치층마저도 고구려의 통치층을 계승하였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조건에서 그 문제를 밝히는것도 발해의 주민구성을 해명하려는데서 일정한 기여를 한것으로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써는 발해주민구성의 계승문제를 전면적으로 해명하였다고 볼수 없다. 주민구성의 계승문제를 전면적으로 밝히기 위해서는 지배층주민과 함께 피지배층주민구성의 계승문제까지 밝혀야 할것이다. 또한 이와 함께 고구려유민계통의 발해인과 말갈인의 비중과 호상관계에 대해서도 밝혀야만 주민구성의 계승문제가 전면적으로 해명되였다고 볼수 있다.

위 장국종의 견해는 기존의 한국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와는 다르다. 필자의 생각과 일정하게 같다. 그러나, 이것은 필자가 말갈을 중국인들이 동북방 주민들의 범칭이자 비칭인 타칭으로 보고, 그 종족계통을 다원적으로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위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발해의 주민구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말갈이다. 그러나, 도대체 말갈이 어떤 종족이었는가 하는 점은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말갈은 {수서(隋書)}에 따라 그들이 7부 말갈로 나눈다. 또한 그 종족계통도 숙신[秦이전]→읍루[漢]→물길[後魏]→말갈[隋唐]로 변해 왔다는 일원론이 일반적이다. 장국종도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말갈의 일원론적 해석을 지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말갈에 대한 연구사를 비롯한 종족계통 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단지, 말갈족의 분포에 관심을 갖고, 만주의 동북지역만이 말갈족이 많았고 다른 곳에서는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옳은 지적이다. 말갈의 다원계통설에서 볼 때, 고구려계와 다른 말갈이란 동북지역의 흑수말갈에 한정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남하도 상정해 볼 수 있는 것이나, 이것은 매우 제한적이었고 소수였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수서}만으로 보아서는 송화강유역에 속말말갈이 많았고, 백두산유역에는 백산말갈이 많았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실 그곳은 주로 고구려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단지, 그곳 주민들은 고구려시대에는 피지배주민들로써 문화적으로 뒤져있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말갈인을 자처했던 것도 아니었다. 말갈이란 오직 당나라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부르던 타칭이었다. 그들은 발해를 세우고 고구려인임을 자처할 정도로 고구려계승의식이 강했다.

장국종이 발해본토에 고구려인들이 더 많았고 (흑수)말갈인들이 희박했다고 하는 지적은 옳으나, 이러한 주장은 말갈이 갖는 기록상의 문제 제기로부터 나왔어야 했다.

북한의 이러한 말갈에 대한 생각은 {구당서},[북적열전(北狄列傳)]의 항목이름으로 적혀 있는 발해말갈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박시형은 당나라가 발해인들이 스스로 말갈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해말갈 또는 말갈이라고 불렀던 것은 당나라 사람들의 침략에 대한 집요성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당나라는 자국의 수십, 수백만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방대한 재부를 탕진하여 고구려국을 멸망시켜 그 령토를 완전강점하려다가 그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고구려인들에 의한 발해가 건국되자, 이러한 사실을 자국민들에게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어 고구려의 발해를 말갈의 발해라 속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시형의 1992년 글에서는 말갈이 고구려인보다 많았다는 주장은 찾아 볼 수 없다. 1962년 글에서 그는 발해를 굳이 발해말갈이라고 한 이유는 발해의 주민구성에서 고구려인 보다 말갈 숫자가 더 많았기 때문이고, 고구려를 멸시하여 말갈로 대치하여 썼던 이유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발해말갈이라고 하는 기록이 말갈의 숫자를 반영하는 것이나 그렇다고 이것이 발해가 말갈의 나라라고 하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며, 주도권을 잡은 것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인이었다는 전제를 제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박시형도 그의 이러한 주장에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 같으며, 이와 같은 역할을 장국종이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의 주민은 대부분 고구려유민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구당서}에서 발해를 가르키는 이른바 별칭 발해말갈에 대한 북한의 적극적인 견해는 현명호에 의해 체계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즉, 그는 이것의 사용시기, 사용범위, 발해말갈과 말갈의 진상, 이것의 자료적 유래 등을 비교적 소상히 논증하고 있다. 발해말갈이라는 용어는 발해 1대 고왕 대조영기(698-718)와 2대 무왕 대무예기(719-736)에 쓰여지던 것이라고 하고, 그 사용범위도 당나라 사람들끼리 또는 그들을 추종한 신라통치자들과의 사이에서나 통용되였지 그 당사자인 발해를 대상하여서는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발해말갈이라는 별칭은 당나라가 발해를 적대시할 때 사용하던 용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박시형의 생각과 일치한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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