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ugyo.net/mt/bok/bokView.jsp?CLSS=1&sBookNmbr=A402&sMok_Nmbr=52
* "제3장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 제1절 고구려 영토에서 신라 영토로"에서 고구려와 신라 영남,동해안 영토 쟁탈에 대해서만 퍼와 제목은 내용에서 뽑아서 달았습니다. 

동해안과 영남, 고구려 영토에서 신라 영토로

(전략)

『삼국사기』에 의하면 사로국(신라)은 진한의 여러 소국 가운데 그 세력이 가장 강성하여 1세기 후반부터는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여 영토국가를 이룩하였다. 그리하여 탈해왕 때에 우시산국(于尸山國, 지금의 영해)과 거칠산국(居柒山國, 지금의 동래)을 정복하였고, 파사왕 때에는 음즙벌국(音汁伐國, 지금의 안강)과 비지국(比只國, 지금의 창녕), 다벌국(多伐國, 지금의 대구), 초팔국(草八國, 지금의 합천 초계) 및 굴아화촌(屈阿火村, 지금의 울산)을 병합하였으며, 실직(悉直, 지금의 삼척), 압독(押督, 지금의 경산)의 두 나라가 항복하여 옴으로써 그 영토를 확장시켰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고분 분포를 통하여 대구․경산․창녕․합천지방은 이후 6세기까지도 독자적인 정치세력이 존재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초기 신라의 영토는 동해안 삼척에서 울산에 이르는 지역과 경주․안강 일원이 되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이후 5세기경 삼국의 판도는 고구려가 북쪽으로 만주지방에 크게 영토를 넓힌 연후에 남쪽으로 한강 유역까지 진출하였고, 백제는 남쪽으로 계속 진출하여 오늘의 경기․충청․전라도에 이르기까지 영토가 넓어졌으며, 신라는 북쪽으로 소백산맥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낙동강까지 진출하여 오늘의 경상남북도를 거의 장악하였다. 오늘의 영양지방이 신라 영토에 편입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아달라왕 3년(156)에 계립령(鷄立嶺, 지금의 문경 새재)을 개척한 사실과 나해왕 27년(222)에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춘천)에서의 나․제 충돌 외에 기림왕 3년(300)에 우두주 태백산(太白山)에서의 제사행사 등을 통해서 이때에 영양지방이 신라 영토에 편입되었음은 확실하다. 그리하여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려는 신라와 이를 사수하려는 백제 사이에 잦은 충돌이 있었으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나․제의 세력이 위축되고, 드디어 신라는 소백산맥 이남의 영토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세기 중엽에 신라의 북쪽 경계는 오늘의 강릉[何瑟羅城]에서 충주에 이르는 선이 되었는데, 오늘의 경상북도 지역 중에서도 예천․문경지방은 백제 영토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런데 신라 눌지왕 34년(고구려 장수왕 38년, 450년) 오늘의 삼척[悉直原]에서 고구려의 변장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고구려의 남하가 본격화하였다. 고구려는 장수왕 56년(468)에 오늘의 삼척지방을 점령하였고, 동왕 63년(475)에는 드디어 한강을 넘어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漢城)을 공격하여 백제의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그리고 장수왕 69년(481)에는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동해안으로 오늘의 흥해[彌株夫]까지 진출하였으며, 내륙으로는 청송[狐鳴城]을 비롯하여 안동․문경․예천․서산․당진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의 영양지방도 이때에 고구려 영토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신라에서는 고구려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하여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더욱 굳게 다지는 한편으로 삼년산성․굴산성을 개축하는 등으로 노력하였으나, 신라왕의 통치 범위는 오늘의 선산지방[一善界]에 미치고 있을 뿐이었다. 5세기 말경의 삼국의 경계는 『삼국사기』지리지를 통해서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먼저 『삼국사기』지리지에서 소백산맥 남쪽에 위치한 군․현들에 대해서 살펴보면, 지금의 영풍군을 “백제의 나기군(奈己郡)으로”, 지금의 예안면을 “고구려 매곡현(買谷縣)으로”, 지금의 봉화군을 “고구려의 고사마현(古斯馬縣)으로”, 지금의 풍기읍을 “고구려의 급벌산군(及伐山郡)” 혹은 “고구려의 이벌지현(伊伐支縣)으로”, 안동군 임하면을 “고구려의 굴화군(屈火郡)으로”, 청송군 안덕면을 “고구려의 이화혜현(伊火兮縣)으로”, 진보면을 “고구려의 조람현(助攬縣)으로”, 청기면을 “고구려의 청기현(靑杞縣)으로”, 영덕군을 “고구려의 야시홀군(也尸忽郡)으로”, 영해면을 “고구려의 우시군(于尸郡)으로”, 영일군 청하면을 “고구려의 아혜현(阿兮縣)으로”, 지금의 울진군을 “고구려의 우진야현(于珍也縣)으로”라는 내용을 살필 수 있을 뿐 아니라 같은 내용을 『고려사』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볼 수 있으므로 당시 고구려의 신라 영토 지배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그후 신라는 고구려에게 점령당한 북쪽의 영토를 수복하기 위하여 끈질기게 노력하였다. 신라 소지왕 15년(493)에는 백제의 동성왕과의 사이에 혼인동맹을 맺고, 백제군의 지원을 받아 여러 지역에서 고구려에 대항하였으며, 지증왕 4년(503)에는 나라 이름을 신라(新羅)로 정하고, 이듬해에는 국경지방에 무려 12성을 축조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을 뿐 아니라 동왕 6년에는 이사부(異斯夫)장군으로 하여금 동해안으로 진출케 하여 드디어 오늘의 삼척지방을 수복하고 그 곳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였다. 이로써 약 25년간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동해안이 다시 신라 영토가 되었다. 지난 1988년에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에서 우연하게 신라 때 만든 비석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내용에 신라의 동해안 수복 과정이 잘 설명되어 있다. 

울진 봉평비는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되었으며, 그 내용 중에 과거에 신라에 속해 있었던 백성들이 얼마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으나, 다시 신라에 예속되었으므로 앞으로는 신라의 법을 따르라는 국왕의 명령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이에 신라 6부 사람들이 모여서 얼룩소를 잡고 술을 빚어 제사하였으며, 그 사실을 비에 기록하여 세움으로써 지방민들을 일깨우려는 목적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동해안으로는 왕이 직접 현장을 순행할 정도로 평정되었으나, 내륙으로는 아직도 고구려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법흥왕 12년(525)에는 오늘의 상주지방에 진출하였고, 동왕 19년(532)에는 남쪽으로 오늘의 김해지방에 위치한 금관가야(金官伽耶)를 복속시켰으며, 서쪽으로도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신라가 내륙에서 고구려에 상실한 옛 영토를 다시 수복한 것은 진흥왕 때의 일이었다. 

(후략)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