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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이 삭제되어 몇군데서 퍼와서 좀 수정했습니다. 맨 아래 기사는 딸린 기사인 듯.


가야가 살아온다 <1> 프롤로그
국제신문 2002.09.02  특별취재팀/김찬석

현해탄에 부는 새바람

서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우리나라의 고대왕국은 가야다. 불행하게도 이는 일본이 주장한 임나일본부설, 즉 고대 왜(倭) 정권이 가야에 건설했다는 식민지에 대한 서양인들의 호기심 탓이다.

[경남 창녕의 교동고분. 일제시대때 최초 발굴이 이뤄져 중요한 가야 유물들이 대거 일본으로 넘어갔다.]

한국 역사학계의 끈질긴 연구와 노력으로 임나일본부설은 설자리를 잃었지만 그 잔영이 아주 지워진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로인해 가야사는 치명적 상처를 입었고, 이른바 ‘님의 나라(임나)’를 잃어버렸다.

21세기 초입, 한일 역사학계의 분위기는 이전과 썩 다르다. 일본내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논하는 학자는 별로 없다. 일본의 진보적 역사학자들은 내놓고 이를 비판한다.

한일고대사 연구의 권위자인 일본국제문화재연구소 나가시마(61·永島 暉臣愼) 소장은 “임나일본부는 낡은 사고의 소산이다. 한일 고대관계사는 이제 상호주의적 차원에서 냉철하고 과학적으로 접근해 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의 고대문명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이제 통설이 되고 있다.

지난달 23일 오후 일본 나라현 가시하라(疆原)시 인근의 니이자와 덴쓰카(新澤千塚) 고분. 2차선 도로를 끼고 좌우로 늘어선 500여기의 고분은 한국의 원분과 흡사했다. 풀섶을 헤치고 고분 주변을 걷자니 문득 한국의 어느 고분에 왔다는 착각이 들었다. 서기 5세기 후반에 조영된 이 고분군은 한반도 남부계 유물이 다량 출토돼 한반도인의 조직적 이주설을 뒷받침한다.

인근의 난잔(南山)고분에도 한반도 도래인들의 자취가 있다. 현지 자료관에는 이곳 4호분에서 출토된 동물형 각배에 대해 ‘조선반도 남부 가야라고 불리는 곳에서 5점이 발견된 귀중한 토기’라는 설명을 붙여놓았다.

가야인을 위시한 한반도 남부인들은 2천~1천5백여년전 일본 열도에 발을 디딘 최초의 외국인이다. 이들은 한국 남해안~대마도~이키섬~규슈~일본열도에 이르는 한일문화교류 루트 곳곳에 이동과 거주 흔적을 남기고 있다.

지난달 27일 일본 사가현의 요시노가리 역사유적지. 현지에서 17년간 유적발굴을 해온 문화재 전문가 시치다(50·七田忠昭)씨는 흥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가을이 되면 나는 때때로 향수를 느낀다. 1천 수백년전 한반도인들이 건너와 여기에 뼈를 묻었고, 내 골격이나 생김새가 그들을 더 닮은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시치다씨는 자신의 말이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사가지역 유적지의 옹관에서 나온 도래인들의 유골을 분석해 얻은 잠정 결론이라고 말했다.

가야는 일본 고대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일본측이 가야를 주목하는 것은 당연하다. 일본에는 한일 고대관계사 연구자만 50여명에 이르고 대부분은 ‘한국통’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두 종류의 눈으로 가야를 본다. 하나는 한반도 남부의 도래인들이 선진문물을 전파했다는 선망의 눈이고, 또 하나는 그들의 옛 조상들이 지배했을 수도 있다는 막연한 자부심의 눈이다.

부산대 고고학과 김두철(44) 교수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연구하는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최근 한국의 일본연구도 진전되고 있다”며 “이제는 서로가 구체적이고 과학적인 사료와 유물을 통해 접근한다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지금 현해탄에는 동북아 고대인들의 문화교류와 자취를 합리적으로 조명하려는 새바람이 불고 있다. 여기에 가야의 발언권은 매우 중요하다.

뿌리를 찾아서

역사책에도 수많은 이름의 가야가 등장한다. 금관가야, 아라가야, 대가야…. 일반인들의 가야 지식은 대개 이런 이름을 열거하고 우수한 문화 운운하는 수준이다.

가야사는 일반인들에게 아직도 낯설다. 가야고분에서 중요한 유물이 나와도 관련 학자들만 흥분할 뿐 일반인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지난 80년대 이전과는 상황이 판이하지만, 가야사에 대한 일반의 관심은 여전히 미약하다.

그러나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가야는 결코 소홀히 다뤄질 역사가 아니다.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가야는 신라 백제보다 문화·교역 시스템에서 한발 앞서가고 있다.

전기가야 연맹의 맹주인 김해의 가락국(금관가야)은 오늘날의 싱가포르와도 같은 국제교역의 거점이었다. 

가락국은 기원전후부터 해상 교역로를 열어 한반도 북부 낙랑, 대방과 교류하고 왜(일본)에 상품을 중개하며 동북아의 교역 메커니즘을 주도했다. 가야의 문화시스템이 신라를 깨우고 왜(일본) 문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

가야사 연구자들에 따르면 가야인들은 대체로 국제적 감각을 지닌 ‘순박한 자유인’으로 그려진다. 가야인들이 국제적 면모를 갖춘 소박하고 곰살궂은 미의식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유물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임효택 동의대 박물관장은 “한국사를 통틀어 영남지방이 역사의 중심이 된 때가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게 바로 가야 시기”라고 말한다. 지역의 역사는 지역의 정체성이다. 세계 어디를 막론하고 도시의 이미지 구축에 역사를 동원하지 않는 곳은 없다. 역사를 관광상품화하면서 그 지역의 자긍심 고취를 위한 문화 콘텐츠로 활용하는 것은 시대적 조류다. 

지금 절실한 것은, 무너진 가야사를 되살려 옛 가야인과 그 후예들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부산과 경남, 영남지방의 지자체와 주민들이 가야를 다시 보고 복원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야사 연구 못지않게 ‘역사경관’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이성주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장은 “자연보호는 이해하면서도 역사경관은 대체로 모른 체 하고 넘어가는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옛 가야의 지형, 산과 강 바다의 교통로, 가야인들의 삶의 자취가 녹아있는 유적지, 그 주변의 풍경 등은 하나하나가 역사로서 소중하다”고 지적했다. 

21세기의 스피드와 첨단, 효율을 이야기하는 마당에 가야사를 다시 보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호고(好古)취미가 아니라 가야의 삶과 꿈이 실로 궁금하기 때문이다.


가야사 복원은 역사적 과제 '전문가들의 견해'

▲ 정징원(부산대 교수·고고학)
가야는 계속 발전한 나라도 아니고 기록마저 빈약해 한국사의 중간에서 실종되는 불운을 당했다. 그러나 근래 가야사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괄목할만한 것으로, 가야가 역사속에 자리잡아야 할 당위성을 제공한다. 그동안의 연구성과가 적지 않았던 만큼, 현시점에서는 가야사를 정리, 종합해 복원하다는 자세가 중요하다. 가야사 복원은 부산 경남의 역사적 정체성을 찾아내는 일이다.

▲ 임효택(동의대 박물관장)
이 시대의 역사는 반쪽짜리 역사다. 한국 고대사의 중요한 대목이 도려진 채 그대로 있다면 우리 민족은 온전한 얼굴로 살아가기 어렵다. 이번 기회에 그동안 학계에서 논의돼 온 가야에 대한 여러 학설을 정리하고 그동안 짚어보지 못한 부분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또 김해와 고령만 중시할 게 아니라 가야의 옛땅을 두루 살펴 유적발굴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가야인의 생활상을 조명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 심봉근(동아대 박물관장)
가야는 고고학적 유물들이 발견되기 전까지 신라와의 관계사속에서 곁다리로 다뤄졌다. 역사 서술에서도 누락됐다. 그러나 가야는 신라나 백제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 문화를 가졌다. 가야와 왜가 교류하며 한반도 문화가 일본으로 흘러갔다는 사실은 민족의 자부심을 갖게 하는 바탕이 된다.

▲ 신경철(부산대 교수·고고학)
가야사를 안다는 것은 한국 고대사를 아는 것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고대사를 함께 풀어내는 실마리가 된다. 신라사 중심의 삼국사기 만으로 역사를 공부한다면 고대사의 원래 모습을 올바르게 볼 수 없다. 무엇보다 가야를 빼놓고 고대 한반도와 왜, 중국 동북지방 상호간의 외교관계를 해명하지 못한다. 가야사는 비록 문헌이 없는 치명적 약점이 있지만 풍부한 유물로 고고학적 재발견이 가능한 역사다.

소멸되어 가는 가야유적을 보존하는 데도 관심이 필요하다.

▲ 주보돈(경북대 교수·사학)
사료가 빈약한 가야사는 고고학적 발굴이 활발해진 후 다소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따라 정확한 고증이나 생활사적 발견보다는 ‘인기 위주의 발굴’이 많아 또다른 왜곡된 가야사를 만들기도 했다.

이제 미흡했던 부분은 보강하고 정돈되지 못한 이론들은 정리해 생명력 있는 가야사를 다시 써야 할 때다.

▲ 김태식(홍익대 교수·역사교육)
우리 역사는 실학시대(조선후기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삼국만 중시하고 가야사는 터부시하는 사관을 아직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문헌상의 한계에도 불구, 유적 발굴성과는 가야가 수백년간 우수한 문화를 꽃피운 실체에 다가서게 한다. 삼국시대가 아닌 사국시대를 시급히 정립해야 한다.

▲ 이영식(인제대 교수·사학)
가야는 한반도에서 신라 고구려 백제와 함께 600여년간 존재한 나라다. 차이가 있다면 두 나라보다 불과 100여년 먼저 멸망했다는 것 뿐인데 그 때문에 후대의 역사연표에 ‘공백’으로 남겨두는 것은 후손들의 직무유기라고 생각한다. 고대사에서 이 공백부분을 제대로 채워넣지 않는다면 우리의 뿌리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 김세기(경산대 교수·역사지리학)
지금까지 가야는 설화 등에 기대어 막연히 신비의 왕국, 사라진 왕국 등으로 과장되어 소개된 측면이 있었다. 이제는 차분하고 과학적으로 가야사를 접근, 실체를 밝힐 때다. 가야를 온전히 복원하는 작업은 지역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가야사 자문단>

△김두철 (부산대 교수·고고학) △김세기(경산대 교수·역사지리학) △김태식(홍익대 교수·역사교육) △박천수(경북대 교수· 고고인류학) △백승옥(울산대 교수·사학) △백승충 (부산대 교수·역사교육) △손명조(국립김해박물관 학예실장) △송계현(부산시립박물관 복천분관장) △신경철(부산대 교수·고고학) △심봉근(동아대 박물관장) △이근우(부경대 교수·사학) △이성주(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장) △이영식(인제대 교수·사학) △이주헌(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임효택(동의대 박물관장) △정징원(부산대 교수·고고학) △주보돈(경북대 교수·사학) △홍보식(부산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가나다순>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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