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lGfNvc

<14>을지문덕 (하)
청천강서 수나라 주력군 궤멸시킨 영웅`청야전술'로 고구려 영토 깊숙이 적군 유인 30여 만명 가운데 2700명 정도 살아 돌아가<淸野戰術>
2010. 06. 03   00:00 입력 | 2013. 01. 05   05:38 수정
 

오늘의 청천강 모습
 

살수대첩 민족기록화
 

평남 안주 백상루. 청천강을 바라보는 절경지에 위치하며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 누각으로 꼽힌다.

고구려는 을지문덕 원수의 작전 계획에 따라 청야전술(淸野戰術)을 구사하고 있었다. 청야전술이란 성 밖에 있는 집이건 밭이건 모두 비워놓아 적군에게 곡식 한 톨 돌아가지 않게 하는 계책이다.

을지문덕 장군은 수나라 군사들이 더욱 지치도록 하루에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모두 일부러 져 줌으로써 적군을 고구려 영토 더욱 깊숙이 유인했다. 적군은 마침내 살수를 건너 평양성 30리 외곽까지 육박했다. 그러자 을지문덕 장군이 다시 사자를 적진에 보내 이렇게 거짓항복을 청했다.

“만약 너희가 군사를 돌이킨다면 우리 태왕 폐하를 모시고 가서 항복하겠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들을 조롱하는 저 유명한 오언시를 지어 보낸 것도 바로 이때였다. ‘삼국사기’ ‘을지문덕 열전’에 실린 그 시의 내용은 이렇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기묘한 방략은 지리를 통달했도다/ 싸워서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족함을 알고 돌아감이 어떠리(神策究天文 / 妙算窮地理 / 戰勝功旣高 / 知足願云止). - 

그제야 을지문덕에게 속은 것을 알아차린 우문술 등은 서둘러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곳곳의 요충에 매복, 기회만 기다리고 있던 고구려군이 지친 수나라 군사들을 사정없이 공격하기 시작했다.

수군이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은 오늘의 청천강인 살수에서였다(살수가 요동에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여기에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는 등 수군은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전설에는 을지문덕 장군이 상류를 막았다가 적군이 반쯤 건넜을 때 둑을 터뜨려 수장(水葬)을 시켰다고 했으나 이는 전술적으로 무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이고, 곳곳에서 매복에 걸려 계속 패퇴하다가 주력군의 대부분이 살수에서 궤멸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해서 압록강을 살아서 건너간 자는 30만5000명 가운데 2700명뿐이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살수대첩의 전말이다.

우문술의 패전 소식을 들은 수군의 내호아도 남은 배를 끌고 퇴각해 버렸다. 보고를 받은 수양제는 패전 책임을 물어 우문술을 쇠사슬로 묶어 돌아가고 말았다. 귀국한 수양제는 우문술을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을지문덕을 놓아 보낸 죄를 물어 유사룡은 목을 쳤다.

한편, 그 옛날 살수였던 청천강이 흐르는 평안도 안주 땅에는 살수대첩에 얽힌 ‘칠불사(七佛寺)의 전설’이 서려 있다. 살수싸움이 있기 전에 일곱 명의 고구려 병사가 스님으로 변장해 바지를 걷고 강을 건너고 있었다. 

강가에서 이 광경을 본 수나라 군사들이 그곳 여울이 얕은 줄 알고 서로 먼저 강을 건너려고 아우성치며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살수를 반쯤 건넜을 때 상류에서 큰물이 쏟아져 내리고, 사방에서 고구려 군사들이 몰려나와 활을 쏘고 투석하며 수나라 군사를 무찔렀다. 그 뒤 고구려에서는 부처님의 가호로 수나라 군사를 물리칠 수 있었다면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 칠불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그때 스님으로 변장한 일곱 명은 고구려 병사가 아니라 일곱 부처님이었다는 것이다.

천하의 주인으로 자처하던 수양제는 부자 2대에 걸쳐 소국인 고구려에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자 이를 갈며 분통해했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613년 4월에 또 다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요하를 건너 다시 고구려 정복에 나섰다. 이것이 제3차 침범이었다. 수양제는 평민으로 강등시켰던 우문술을 다시 등용, 대장군으로 삼아 선봉을 맡게 해 평양성으로 진격토록 하고, 왕인공(王仁恭)에게는 신성을 공격토록 했다. 그리고 자신은 친히 요동성을 공격했다. 고구려는 이번에도 철벽 같은 수성전을 펼치는 한편, 사람 한 명 곡식 한 톨 남기지 않는 청야전술을 펼쳐 수나라 군사들의 진을 빼놓았다.

수나라 군사들은 성벽보다 높은 누각인 비루당, 성벽을 넘기 위한 높은 사다리인 운제(雲梯), 성벽을 부수는 충거(衝) 따위의 공성기를 동원해 맹렬히 요동성을 공격했으나 성은 20일이 넘도록 함락되지 않았다. 수양제는 100만 개의 흙 포대를 성벽 높이로 쌓아 군사들로 하여금 그 위에 올라가 성을 공격토록 하는 한편, 성벽보다 더 높은 8층 수레로 성을 공격토록 명령했다. 

그래도 고구려 군사들은 무서운 투지로 용감하게 싸워 단 한 명의 수나라 군사도 성안으로 넘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수양제에게 급보가 날아왔다. 후방에서 군량 수송의 총책임을 지고 있던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였다. 수양제는 급히 회군, 양현감의 반란부터 진압했다. 

3차에 걸친 고구려 정벌이 그렇게 물거품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수양제는 이듬해인 614년 2월에 또다시 전국적인 총동원령을 내려 군사를 소집했다.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해 7월에 제4차 출병을 단행했으나 소득이라고는 수군 장수 내호아가 요동반도 남해안의 비사성을 탈취한 것이 전부였다. 전쟁은 지지부진해지고 공격하는 수나라나 방어하는 고구려나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양국은 화친책을 모색하고, 이에 따라 수양제는 다시 군사를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장장 16년 동안 4차에 걸친 수나라의 침공은 그렇게 끝났는데, 그것으로 모든 것이 전처럼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무리한 고구려 원정으로 수나라의 국력은 피폐하고 백성의 삶이 곤궁해지자 각지에서 반란이 쉴 새 없이 일어났던 것이다. 611년에 시작된 농민들의 봉기가 해가 갈수록 중국 각지로 퍼져나가고, 여기에 호족과 귀족들까지 군웅 할거함에 따라 수나라 조정의 통제력은 약화됐다. 그러다가 617년에 마침내 수양제가 친위군의 쿠데타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수양제를 죽인 사람은 그의 ‘평생 동지’였던 우문술의 아들 우문화급(宇文化及)이었다. 수양제의 피살로 수나라는 중국을 재통일한 지 불과 40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이연(李淵)이 새로운 나라를 세웠으니 그것이 당나라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 고구려에서도 영양왕이 재위 29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이복동생 고건무(高建武)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류왕이다.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612년의 살수대첩 이전부터 수나라에도 알려질 만큼 뛰어난 인물로서 출장입상(出將入相)했던 고구려의 대신이요 전쟁영웅인 을지문덕의 자취가 그 뒤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조선조 세조 때인 1458년에 양성지(梁誠之)는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며 모셔야 할 역사적 인물로 12명의 왕과 24명의 신하를 추천했는데, 고구려에서는 시조 추모성왕(鄒牟聖王)과 영양왕, 그리고 을지문덕 장군이 천거됐다. 그리고 숙종도 1680년에 관리를 보내 을지문덕의 사당에 현판을 다시 만들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돌이켜 보건대 을지문덕이 없었다면 고구려가 수나라에 멸망당했을지도 모르고, 만일 그렇게 됐다면 아비와 형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패륜아, ‘제2의 시황제’ 수양제에 의해 신라와 백제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뒷날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없었다면 조선왕조가 왜적에게 멸망당하고, 어쩌면 명나라도 무사하지 못했을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런 까닭에 이순신과 더불어 을지문덕을 우리 역사상 으뜸가고 버금가는 명장이라고 추앙하는 것이다.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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