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sbjI8Q

<12>을지문덕 (상)
수나라 대군 전멸시킨 살수대첩의 영웅
2010. 05. 20   00:00 입력 | 2013. 01. 05   05:36 수정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기록화


을지문덕 흉상.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다.

일찍이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申采浩)가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에서 이렇게 말했다. ‘을지문덕은 우리나라 4000년 역사에 유일무이한 위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전 세계 각국에도 그 짝이 드물도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30만 대군을 전멸시킨 살수대첩(薩水大捷)의 주역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아도 그의 가계가 어떻게 되는지, 언제 태어나 언제까지 어떤 벼슬을 지냈으며, 언제 어디에서 죽었고, 무덤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그에 관한 기록이 매우 간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38년 5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조만식·최윤옥·김병연·김성업 씨 등 평양의 지식인들이 평남 강서군 저차면 현암산에 있는 을지문덕 장군 묘의 보수 모임을 조직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강서군은 현재 남포시에 편입돼 있고, 을지문덕 장군의 유적에 관해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취재가 불가능해 매우 아쉽다.

‘삼국사기’ ‘열전’ 을지문덕 편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 을지문덕의 집안 내력은 자세하지 않다. 그의 성격이 침착하고 용맹스러우며 지혜와 재주가 있었고 겸해 글을 지을 줄 알았다. -

그리고 끝 부분에 가서는 저자의 평으로 이런 말을 달아놓았다.

- 수양제(隋煬帝)의 요동전쟁은 군사를 출동시킨 규모에 있어서 전고에 없이 굉장했건만 고구려는 한 모퉁이의 작은 나라로서 그를 맞아 국토를 보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거의 다 없애버린 것은 문덕 한 사람의 힘이었다. 경전에 이르기를 ‘인재가 없으면 어찌 나라 노릇을 할 수 있으랴(‘춘추좌전’)’ 했으니 과연 그렇다. -

살수대첩은 영양왕 23년(612)에 일어났다. 그 당시 을지문덕이 50대라면 그는 평원왕 2년(560)께에 태어났고, 만일 60대였다면 양원왕 11년(550) 무렵에 태어난 것으로 역산된다. 

을지문덕이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는 평원왕이나 양원왕 재위 시에 평양 근처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평양 인근 평남 증산군·평원군 지방에 을지문덕에 관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또 이맥(李陌)이 지은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도 이런 대목이 실려 있다.

‘을지문덕은 고구려의 석다산(石多山, 평안도 증산현 서북쪽에 위치) 사람으로 일찍이 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꿈에 삼신(三神)을 뵙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해마다 3월 16일이 되면 말을 타고 마리산(摩利山)으로 달려가서 제물을 올리고 경배하고 돌아왔으며, 10월 초사흘이 되면 백두산에 올라 삼신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삼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은 신시(神市)의 옛 풍속이었다.

홍무(洪武) 23년에 수나라 군사 130만여 명이 바다와 육지로 쳐들어왔다. 이때 을지문덕은 기묘한 계책을 내어 병사를 출동해 그들을 멸하고 추격해 살수에 이르러 드디어 크게 쳐부쉈다. 수나라 수군과 육군이 함께 무너져 요동성으로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700명 정도였다.

양광(楊廣 : 수 양제)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을지문덕이 허락하지 않고 영양무원호태열제(?陽武元好太烈帝) 또한 추격을 엄명했다. 

을지문덕이 여러 장수와 더불어 승승장구하는데, 한 갈래 군사는 현도 방면에서 태원에 이르고, 한 갈래는 낙랑 방면에서 유주에 이르러 그 주·현으로 들어가 그들을 다스리는 한편, 그 유민들을 불러서 안정시켰다. (중략) 양광은 임신년에 고구려를 침범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성대한 출병 준비를 했다. 우리 조의군(?衣軍) 20만으로 양광의 군사들을 거의 모두 멸했으니, 이것은 을지문덕 장군 한 사람의 힘이 아니겠는가.

을지공 같은 이는 곧 만고에 한 시대를 창출한 거룩한 호걸이로다.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조선 개국공신)이 명나라 사신 축맹(祝孟)과 더불어 백상루(百祥樓·평북 안주 북성)에 올라가 시를 지었는데 다음과 같다.

- 살수 질펀하게 흘러 푸른 하늘 울렁이는데/수나라 군사 백만 명을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냈네/지금까지 어부와 나무꾼의 말에 남아 있으니/나그네의 비웃음거리에 지나지 않네 -

을지문덕이 태어났다는 마을의 석다산은 현재 평남 증산군 석다리에 있으며, 높이는 해발 270m. 석다리에는 을지문덕이 어린 시절 글 읽고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이 있다. 또 평남 평원군 화진리 불곡산 동굴 속에서 글 읽고, 석다산 남쪽의 마리산으로 말을 타고 다니며 무술 훈련을 했다는 전설도 있다.

어느 날 을지문덕이 불곡산 석굴 속에서 책을 읽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때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그를 해치려고 기어 들어왔다. 잠결에 괴이한 살기를 느낀 을지문덕이 눈을 뜨면서 번개같이 칼을 휘둘러 구렁이의 목을 쳤다. 그때 칼로 내려친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돌로 만든 책상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지금도 그 석굴에는 모서리가 떨어져나간 돌 책상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한편 이웃 평원군 운봉리의 대원산에도 을지문덕의 전설이 있다. 을지문덕이 무술 훈련을 하면서 활을 쏘는데 과녁이 잘 보이지 않기에 높이 자란 나무들을 칼로 쳐서 시야가 훤히 트이게 만들어 놓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나무들은 을지문덕이 칼질을 한 그 높이에서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고수전쟁(高隋戰爭)이 일어나기까지 고구려와 중국의 사정을 살펴보자. 

고구려는 당시 영양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영양왕은 유명한 평강공주(平崗公主)의 오라비요, ‘구걸하는 바보’에서 하루아침에 평강공주의 남편이 되고 고구려의 용장으로 변신한 온달(溫達) 장군의 매부였다.

수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한 것은 영양왕이 즉위하기 1년 전인 589년. 북주의 외척인 양견(楊堅)이 정권을 장악한 뒤 581년에 왕을 내쫓고 수나라를 건국하니 그가 바로 수 문제(隋文帝)다. 

양견은 589년에 남쪽의 진나라까지 멸망시킴으로써 남북조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이 같은 수의 등장은 동북아시아 국제 정치 질서에도 당장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고구려는 북주, 북제와 등거리 외교관계를 통해 될 수 있는 한 전쟁을 피하려고 했고, 백제 또한 북주, 북제와의 외교관계를 이용해 고구려를 견제하려고 했는데, 남북조시대가 무너지고 수나라가 등장하니 새로운 관계설정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에 백제는 재빨리 수나라 건국 직후 사신을 보내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신라도 이에 뒤질세라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신라는 수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자 611년에 고구려 정벌을 청하는 이른바 ‘걸사표(乞師表)’를 보내기도 했고, 백제는 수나라의 2차 침공 직전에 고구려 원정의 향도(嚮導) 노릇을 자청하기도 했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대결이었다.

선제 공격을 개시한 것이 고구려였다. 영양왕은 재위 9년(598)에 1만 명의 말갈 기마대를 친히 거느리고 요서지방 공격을 단행했다. 이는 거란과 말갈 여러 부족의 지배권을 확보해 요서와 요동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황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