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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좌원대첩 이끈 고구려 첫 국상 명림답부 (상)
한나라 대군 통쾌하게 무찌른 영걸
2010. 03. 18   00:00 입력 | 2013. 01. 05   05:26 수정
                                                     

고구려인들도 신성시하던 민족의 영산 백두산과 천지.        
                                                                    

국내성에서 요동으로 가는 길. 명림답부도 이 길을 통해 오랑캐를 물리치러 갔을 것이다.
 

고구려의 황성 옛터. 국내성은 이제 초라한 폐허만이 남았다.                                                                   

고구려 제7대 임금 차대왕(次大王) 20년(165년).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불길한 조짐이 일어났다. 정월 그믐날에 일식이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나라에 무슨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술렁거렸다. 과연 그해 3월에는 대왕의 동복형인 태조대왕(太祖大王)이 별궁에서 세상을 떴는데 그때 나이가 119세였다.

이어서 그해 10월에는 연나부(椽那部)의 조의선인 명림답부(明臨答夫)가 차대왕의 학정과 백성들의 고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군사를 모아 차대왕을 죽여 버렸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군사혁명에 성공한 명림답부는 그동안 숨어 살던 태조대왕의 막내 아우인 고백고(高伯固)를 찾아내 왕위에 앉히니 그가 곧 신대왕(新大王)이다. 

신대왕은 즉위 2년째인 서기 166년 정월에 명림답부를 국상(國相)으로 삼고 벼슬을 더해 패자(沛者)로 삼아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맡겼다. 국상이란 그때까지 국왕의 정무를 보필하는 좌보와 우보를 통폐합한 최고위 직이니, 이는 곧 뒷날 사람들이 말하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수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명림답부는 이처럼 고구려·신라·백제를 통틀어 최초의 반정에 성공하고, 고구려 최초의 국상 자리에 앉아 출장입상(出將入相)하며 정권을 좌지우지한 영걸이었다. 삼국사기 ‘열전’ 명림답부 편에 따르면 그는 신대왕이 세상을 뜨기 3개월 전인 179년 9월에 113세의 고령으로 죽었다고 했으니, 이를 역산해 보면 그는 태조대왕 14년(66년)에 출생한 셈이 된다.

명림답부가 태어날 무렵은 태조대왕의 모후인 부여태후(夫餘太后)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수렴청정을 끝내고 21세의 대왕이 친정에 나선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119세로 역사상 가장 장수한 임금인 태조대왕의 양위는 정상적이 아니라 아우 수성(遂成·차대왕)의 공갈협박에 못 이긴 것이었다. 태조대왕에게는 후계 1순위인 태자 막근(莫勤)이 있었는데, 재위 80년(132년)에 이런 일이 있었다.

그해 가을에 수성이 심복들을 거느리고 왜산에서 사냥을 즐기고 술판을 벌였다. 이때 관나부의 우태 미유, 환나부의 우태 어지류, 비류나부의 조의 양신 등이 수성에게 이렇게 알랑방귀를 뀌었다.

“전에 모본왕이 죽었을 때 그 아들 익이 싹수가 없어서 중신들이 재사(再思)를 세우려 했으나 재사가 늙어서 그 아들에게 양보한 것은, 형이 늙으면 아우에게 양위하게 하려 함이 아니갔습네까? 지금 대왕은 이미 늙어 꼬부라졌는데도 왕위를 사양할 의사가 없으니 대인은 이 일을 서둘러야 하지 않갔습네까?”

그러자 수성이 이렇게 대꾸했다.

“기렇치만 맏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관례가 아니갔음메? 대왕이 비록 늙었다 하지만 이미 태자가 있는데 어찌 내가 감히 분에 넘치는 일을 바랄 수 있갔시오.”

미유가 말했다. “에헤이! 아우가 어질면 형의 뒤를 잇는 일은 옛날 옛적에도 있었으니 기렇게 겸손하지 마시라요!”

그 무렵 조정 대신인 좌보 패자 목도루가 이런 이야기를 듣고 수성에게 반역할 생각이 있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렸다. 그러나 수성의 기대와는 달리 대왕은 좀처럼 왕위를 물려줄 기미가 없었다. 그로부터 6년의 세월이 흐른 태조대왕 86년(138년). 그해 가을에도 수성이 또 사냥을 갔다가 5일 만에 돌아왔다. 수성의 행동거지가 갈수록 수상하자 그의 아우 백고가 말했다.

“형님! 자고로 재앙과 복은 오는 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이 그것을 불러들이는 것이라고 합네다. 지금 형님은 임금의 아우라는 근친으로서 백관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지위가 이미 매우 높고 공로 또한 매우 큽네다. 마땅히 충의의 마음과 예절과 겸양으로써 욕심을 억제하여 위로는 대왕의 덕을 따르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지 않갔시오?”

수성은 “키잉!” 하고 콧방귀로 대답을 대신했다. 태조대왕의 수명은 억세게 길었다. 그로부터 다시 8년의 긴 세월이 흘러 태조대왕 94년(146년). 그해 가을에 수성이 또 왜산에 가서 사냥하면서 심복들에게 말했다.

“휘유! 이거 지루해서 미치갔구나야! 대왕이 늙어 꼬부라졌지만 죽지 않고 나도 갈수록 늙어가니 이젠 더 기다릴 수가 없다 그기야! 이젠 임자들이 구체적으로 행동에 나서야 하지 않갔네?”

이렇게 전개된 상황은 마침내 태조대왕의 양위로 이어지게 된다. 그해 10월에 우보 고복장이 태조대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수성이 무리를 모아 반역하려고 획책하니 빨리 처형해야 됩네다!” 하지만 이미 수성 일파의 공갈협박에 못 이긴 대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이젠 힘이 없으니 어쩌갔음메? 수성에게 양위할 수밖에 없지 않갔음둥?” 그러고는 그해 12월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왕위를 내주고 별궁으로 물러나 은퇴하고 말았다.

마침내 고대하던 왕위에 오른 차대왕은 자신의 즉위에 공이 큰 심복들을 중용한 반면, 바른 말로 간하는 충신들은 사정없이 숙청하는 등 살벌한 공포정치를 펼쳤다. 즉위에 일등공신인 미유와 어지류를 각각 좌보와 우보로 삼고 양신을 중외대부로 삼는 등 중용하고, 자신을 죽이라고 충언했던 고복장은 목을 날려버렸다.

이처럼 늙은 형을 몰아내다시피 하고 왕위에 오른 수성이 곧 차대왕인데, 즉위 당시 그의 나이도 이미 76세의 고령이었다. 수성이 즉위해 공포정치를 벌이자 자연히 민심이 이반되고 정국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독재자들일수록 자신의 정권안보에 관해서는 신경이 날카롭기 마련이다. 그 역시 권좌가 불안했기에 태조대왕의 태자요 자신의 친조카인 막근에게 자객을 보내 암살해 버렸다. 그러자 막근의 아우인 막덕(莫德)은 다음은 자기 차례라고 생각하고 아예 자살하고 말았다.

명림답부는 이러한 때에 몸을 일으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유혈혁명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 성공보다도 명림답부가 고구려사를 빛낸 것은 좌원대첩(坐原大捷)을 통해 한나라 침략군을 통쾌하게 무찌른 전공에 있었다.

<황원갑 소설가ㆍ역사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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