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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을 일으킨 고구려의 여걸 ´부여태후´ - 김용만"에서 부여태후와 직접 관련된 내용만 가져왔습니다.

혁명을 일으킨 고구려의 여걸 ´부여태후´ 
2013/07/18 06:03

(전략) 

재사의 아들 태조대왕
 
모본왕이 죽자 다음 왕이 누가 될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쏠렸다. 모본왕은 6년 전에 자신의 아들 익을 태자로 삼아 자신이 죽으면 다음 왕이 될 사람으로 정해 놓았다. 국인(國人)이라 불리는 고위 관리, 왕실가족, 부족장 등을 포함한 고구려 국가 운영을 논의할 수 있는 사람들이 다음 왕을 선출하기 위한 회의에 들어갔다. 왕위계승 1순위는 당연히 모본왕의 아들이자 태자인 익이었다. 그런데 국인들은 익이 왕의 재목이 아니라며 그를 제쳐놓았다.

새로 왕에 추대된 사람은 뜻밖에도 7세밖에 되지 않은 어수란 아이였다. 익과 비교했을 때 어수가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궁이라고도 불린 고구려 7대 태조대왕이 바로 이 아이였다. 7세의 아이가 왕이 된다면 나라의 정치를 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이 아이가 왕으로 선택된 것일까?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의 아들인 재사였다. 그런데 처음에 나라 사람들이 재사를 왕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재사가 자신이 나이가 많으므로 아들에게 양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믿을 만한 사실이 못된다.

재사가 유리명왕의 아들이라면, 3대 대무신왕의 동생이 된다. 대무신왕이 서기 4년에 태어났으므로, 재사가 바로 다음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서기 53년에는 48세 정도가 된다. 또 재사가 유리명왕이 죽은 해인 서기 17년에 태어났다고 한다면, 이때 나이 36세에 불과하다. 결국 40세 전후의 재사가 나이가 많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다.

재사는 오히려 태조대왕을 낳은 후, 24년이나 차이나는 동생인 차대왕을 낳았고, 또다시 19년 후에는 막내인 신대왕을 낳았다. 놀랍지 않은가! 기록대로 한다면 재사는 29세에 첫째를 72세에 막내를 낳은 사람이 된다. 이렇게 늙어서도 아들을 낳았던 사람이라면, 36세에서 늙었다고 왕위를 물려주었다고 볼 수는 없겠다.

7살 된 아들이 너무 똑똑해서 왕이 되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모본왕이 죽은 뒤 태자 익이 왕위계승에서 제외되고, 재사도 왕이 안 된 상태에서 7살의 어린아이가 왕이 된 것에는 어떤 숨겨진 내막이 있지 않을까? 어수는 모본왕의 사촌동생에 불과했다. 왕위계승 서열로 본다면 그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혁명의 주인공 부여태후
 
7살의 어린아이가 정치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정치의 실권은 놀랍게도 태조대왕의 어머니인 부여태후에게 돌아갔다. 남편이 분명히 살아 있음에도 정치를 담당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부여태후는 태조대왕의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이란 여자가 가리개를 드리운 채로 왕의 뒤에 앉아서 일일이 정치를 지시하는 것을 말한다. 왕이 나이가 어린 경우에 왕의 어머니가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잠시 정치를 대행했던 것은 한국사에서 자주 있었다. 신라에 2번, 고려에 4번, 특히 조선시대에는 8번의 수렴청정이 있었다. 왕의 어머니, 외삼촌 등이 권력을 잡고 정치를 뒤흔든 일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최초로 보이는 부여태후의 수렴청정은 다른 사례들과는 아주 달랐다. 다른 사례들은 남편이 왕이었다가 그 지위를 물려받은 왕비들이었지만, 부여태후만은 남편이 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여태후는 자신의 힘으로 아들을 왕으로 삼고, 스스로 왕의 권력을 가진 우리 역사상 보기 드문 여걸이라고 할 수 있다.

두로에게 모본왕을 죽이라고 지시한 사람은 부여태후의 무리임에 분명하다.

모본왕은 포악한 왕으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에 의해 왜곡된 모습일 수 있다. 언제나 역사는 승자에 의해 기록되는 것이고 패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모본왕은 흉년이 들자 사람을 보내어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한 임금이었다. 게다가 서기 49년에는 장수를 보내어 후한의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기습하여 후한을 놀라게 했다. 지금의 북경지역인 우북평과 그 주변의 어양, 상곡을 지나 산서성의 태원에 이르는 대원정은 고구려 기마대라면 능히 행할 수 있는 작전이지만, 이처럼 신속하게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것은 모본왕의 대담한 결정 때문이었다. 후한은 재물을 바쳐 고구려에 화친을 요구하였고, 고구려는 이 기습작전의 효과로 막대한 재물을 얻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그것은 후한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업적을 가진 모본왕이었지만, 국내에 존재하는 반대세력의 기습에는 당할 수 없었다. 부여태후는 고구려 5부 가운데 한 부의 우두머리였다. 그녀는 남편의 도움 없이 스스로 권력을 잡은 것이었다.

신라의 선덕과 진덕, 진성여왕은 공주라는 신분을 갖고 있었기에 왕이 될 수 있었지, 부여태후같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왕이 된 것은 아니다. 고구려에서는 여성이 부족의 우두머리였던 사례가 몇 번 보인다. 다음에 살펴볼 우씨왕후도 연나부의 우두머리였다. 또 고구려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소서노도 한 부의 우두머리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추모왕을 도왔다.

이러한 여인들의 삶은 조선시대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것은 고구려 사회에서는 여인들의 삶이 무척이나 달랐기 때문이다. 고구려 여인들은 길쌈과 농사짓기뿐만 아니라, 시장에서 장사를 하여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소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자유롭게 시내를 활보할 수도 있었다. 고분벽화를 보면 여인들이 야유회를 하며 노는 모습이 보인다. 동맹행사에서는 여자들도 밤늦도록 술과 음식을 먹으며 남자들과 춤추고 노래하며 놀기도 했다. 여자들도 자기의 뜻에 따라 결혼하고 이혼도 할 수 있었다. 평강공주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바보 온달과 결혼했다. 유화부인이 고구려 최고의 신으로 섬겨지듯이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는 무척 높았다.
 
하지만 전쟁이 많았던 나라인 만큼 고구려에서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무척 어려웠던 모양이다. 부여태후는 스스로 왕이 되지는 못했다. 아들을 내세워 왕으로 삼고, 자신은 실질적인 왕노릇을 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왕 못지않은 큰 일들을 해낸 실질적인 한국 최초의 여왕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를 발전시킨 위대한 여걸
 
태조대왕은 나이 14세에서 17세가 돼서야 비로소 왕으로서 정치를 주도하게 된다. 태조대왕 초기에 벌어졌던 일들은 전부 부여태후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부여태후는 태조대왕이 9살이 되던 해인 서기 55년에 신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고구려를 세운 지도 이제 100년이 되어 간다. 나라가 더 크게 발전하려면 영토를 넓히고, 차지한 땅은 더 잘 다스려야 한다. 먼저 우리가 가진 요서땅에 10개의 성을 쌓아 후한의 침입을 막도록 하라.”
부여태후는 나라를 다스릴 줄 아는 안목을 지닌 인물이었다.

부여태후는 모본왕이 확보한 요하 서쪽지방을 굳건히 지키기 위해 여기에 성을 쌓으라고 지시를 했던 것이다. 고구려 후기에는 이 지역을 차지하여 군사적으로 활용했으나, 전기에는 이때뿐으로 언제 상실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나, 태조대왕 년간에 상실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이후 고구려와 후한과의 전쟁이 주로 요하를 중심으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부여태후는 다음해 7월에는 군사를 보내어 지금의 함흥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동옥저를 공격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관리를 파견했다. 고구려는 이곳을 지배함으로써 동해의 수산자원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동해안의 해안평야를 따라 남쪽의 신라와도 만날 수가 있었고, 바다 건너 일본열도로 나갈 수 있는 길도 얻게 되었다.

동옥저는 의식주 생활과 예절 등이 고구려와 흡사하고 언어도 거의 같았지만, 다른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동옥저 사람들에게 각종 세금을 거두고 특산물을 바치게 했다. 처음에는 동옥저인들이 노비처럼 대우 받았지만, 점차 고구려인으로 동화되어 갔고, 고구려의 든든한 후방이 되었다.

부여태후의 열정 어린 노력으로 고구려는 동으로는 동해, 남쪽으로는 청천강, 북으로는 부여국, 서로는 요서 지방에 이르는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

부여태후는 고구려를 더욱 강한 나라로 만들고 난 후, 아들인 태조대왕에게 정치의 권한을 넘겨주고 물러난 위대한 여걸이었다.

(후략)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김용만, 도서출판 창해)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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