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q1f37W

<4>좌원대첩 이끈 고구려 첫국상 명림답부(하)
새 임금 모시고 충성을 다한 인격자
2010. 03. 25   00:00 입력 | 2013. 01. 05   05:27 수정



집안 교외의 산성하 고분군. 국내성 시대 고구려 황족·귀족의 무덤들이다. 명림답부의 묘도 이 가운데 있지 않을까.


환도산성은 국내성 외곽 방어 요새였다. 명림답부는 이 시기에 활약했다.   

차대왕 재위 20년(165년) 3월 별궁에서 쓸쓸히 노년을 보내던 태조대왕이 세상을 떴다. 그리고 7개월이 지난 그해 10월에 연나부의 조의선인 명림답부가 군사를 일으켰다. 차대왕의 20년에 걸친 폭정을 종식하기 위해서였다. 명림답부에 의해 목숨이 끊어질 때에 차대왕도 96세였으니 천수를 누릴 만큼 누린 셈이다.

차대왕을 제거한 명림답부는 태조 대왕의 두 아들이 모두 죽고 없기에 그의 막내 아우인 백고를 모셔와 왕위를 잇게 했다. 그가 신대왕. 그러나 신대왕도 보위에 오를 때는 이미 77세의 고령이었다.

또 추산해 보건대 명림답부도 군사를 일으켰을 때 그의 나이 99세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가 죽은 것이 신대왕 15년(179년) 113세 때였다고 했으니 출생은 태조 대왕 14년(66년)이요, 혁명을 일으키던 차대왕 20년에는 99세가 되기 때문이다. 

신대왕은 차대왕이 맏형 태조 대왕의 보위를 넘볼 때에 목숨을 걸고 이에 반대했기에 지난 20년간 도성인 국내성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중에 숨어 살고 있었다. 혁명에 성공한 명림답부는 사람들을 풀어 백고를 찾아 궁궐로 모시고 와 보위에 오르게 했다.

이렇게 집권한 명림답부는 신대왕으로 하여금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게 하는 등 화합정책을 펼쳐 차대왕의 폭정으로 피폐해진 민심부터 어루만지도록 했다. 이에 따라 생업을 버린 채 산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쳤던 백성도 제 고향 제 집으로 돌아와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신대왕은 행정조직을 개편해 좌보·우보제도를 없애고 국상을 신설해 초대 국상으로 자신의 즉위에 일등공신인 명림답부를 임명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쿠데타를 일으켜 차대왕을 제거하고 신대왕을 추대한 뒤 고구려 최초의 국상이 된 명림답부의 가장 큰 공적이라면 좌원대첩(坐原大捷)을 통해 후한(동한)을 굴복시킨 일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4년(168년) 조에 ‘한나라 현도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범해 와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이므로 왕은 스스로 항복하여 현도 군에 복종할 것을 청했다’는 대목이 있다.

이는 참으로 허황하기 그지없는 사대주의 모화사상가 김부식다운 망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창 기세를 뻗어가는 대제국 고구려가 다 망해 가는 한나라, 그것도 황제의 친정(親征)이 아닌 일개 지방관인 태수가 쳐들어와 겨우 수백 명의 군사가 전사했다고 해서 항복을 자청하고, 한나라 자체도 아닌 현도 군에 복종을 맹세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린가 말이다. 어찌하여 이런 망발이 비롯되었을까.

당시 한나라의 사정은 고구려가 조금만 더 강한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나라가 거덜날 위험한 처지에 빠져 있었다. 고구려가 점차 강성해 요하를 건너 요서와 북경 지방은 물론 산둥반도 일대까지 고구려 무사들의 말발굽 아래 무참하게 짓밟히는 사태가 쉴 새 없이 이어지자, 이러한 열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보려고 틈만 나면 요서지방의 한나라 태수들이 고구려의 서쪽 변경을 노략질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기록은 한의 현도 태수 경림이 열세를 인정하고 고구려에 화해를 청한 역사적 사실을 삼국지의 저자 진수가 왜곡해 기술한 것을 김부식이 의도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대로 베껴 쓴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구려의 강성에 위기를 느낀 후한은 당분간 고구려의 기세를 눌러놓은 뒤 국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신대왕 8년(172년) 11월에 수만 대군을 동원해 쳐들어왔다. 당시 사정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한나라에서 대군으로 우리나라(고구려)를 공격했다. 왕이 여러 신하에게 공격과 방어 어느 쪽이 유리한지 물으니 여러 사람이 의논하여 말하기를, “한나라는 군사의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업신여기는데 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으면 적들은 우리를 비겁하다 하여 자주 올 것이요, 또한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야말로 한 사람이 문을 지켜도 만 사람을 당하는 격입니다. 한나라 군사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우리에게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내어 막아 버리소서.”

그러자 명림답부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아 이제 강병으로써 멀리 쳐들어오니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군사가 많은 자는 싸워야 하고 군사가 적은 자는 지켜야 한다는 것은 병가(兵家)의 상식입니다. 이제 한나라 적들이 천리길에서 군량을 운반하매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을 것이니, 만약 우리가 구렁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 곡식 한 톨 없이 들판을 비워 놓고 기다리면 적들은 반드시 열흘이나 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곤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강병으로써 친다면 필승할 것입니다.”

왕이 그렇게 여겨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니 한군이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수와 사졸들이 굶주려 퇴각하매 이때 명림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해 좌원에서 교전하니 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해 한 필의 말조차 돌아가지 못했다. 왕이 매우 기뻐하여 명림답부에게 좌원과 질산을 주어 그의 식읍으로 했다.

한편 삼국사기 ‘열전’ 명림답부 편도 좌원대첩의 내용이 이 기사와 거의 같은데, 다만 이때 한나라 대군을 이끌고 온 자가 현도 태수 경림이라고 밝힌 점만 다르다.

이처럼 고구려의 국력 신장기를 이끈 당대의 영걸 명림답부는 113세로 세상을 떠났다.

신대왕은 친히 찾아가 조문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했으며, 예를 갖춰 질산에 장사 지내 20여 호를 묘지기로 뒀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명림답부가 옹립했던 신대왕도 붕어하니 그의 나이 또한 당시로써는 고령인 97세였다고 사서는 전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명림답부 사후 그의 손자로 추측되는 명림어수(明臨於漱)가 동천왕(東川王) 4년(230년) 국상에 임명됐고, 역시 그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명림홀도(明臨笏覩)가 중천왕(中川王) 9년(256년) 대왕의 사위인 부마도위가 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그의 출신부족인 연나부는 여러 명의 왕비를 배출한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명림답부는 일세의 영걸이면서도 훌륭한 인격자였다. 그가 강력한 독재자인 차대왕을 제거할 정도면 제왕보다 더욱 강력한 무력과 치밀한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이 제위에 오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새로운 임금을 내세워 충성을 다 바쳤던 것이다. 어찌 명림답부를 가리켜 의롭고 장하다 하지 않을쏜가. 

<원갑 소설가·역사연구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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