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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8>제14대 봉상왕

고구려 14대 봉상왕은, 어쩌면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어떤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폭군인지도 모른다.

자기 골육지친을 죽인 것이나, 백성들이 다 굶어죽어가는데도

궁실을 증축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히고(북한의 그 양반처럼.)

외적이 침공해와도 속수무책인 자.(그건 그 양반과는 좀 다르군)

그런 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과연 어떤 지경에까지 나라가 굴러떨어질수 있는지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꽤 재미있는 일이다.

정작 당사자들은 죽어나겠지만.

 

[烽上王<一云雉葛>, 諱相夫<或云矢婁>. 西川王之太子也. 幼驕逸多疑忌. 西川王二十三年薨, 太子卽位.]

봉상왕(烽上王)<혹은 치갈(雉葛)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상부(相夫)<혹은 삽시루(矢婁)라고도 썼다.>이고 서천왕의 태자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 서천왕이 23년만에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서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태자. 봉상왕.

척 보기에도 성격 더러운 놈으로 교만하고 방탕한데다 의심많고 시기심도 많은

(어쩜 이리도 내 성격과 쏙 닮았는지 참;;)

그런 왕이었단다. 이놈이.

 

[元年, 春三月, 殺安國君達賈. 王以賈在諸父之行, 有大功業, 爲百姓所瞻望, 故疑之謀殺. 國人曰 “微安國君, 民不能免梁貊·肅愼之難. 今其死矣. 其將焉託?” 無不揮涕相弔. 秋九月, 地震.]

원년(292) 봄 3월에 안국군 달가를 죽였다. 달가가 아버지 형제[諸父]의 항렬에 있고 큰 공적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 보게 되자, 왕은 의심하여 모살하였다. 국인(國人)이

“안국군이 아니셨다면 백성들이 양맥과 숙신의 난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그분께서 돌아가셨다. 장차 누구에게 의탁할 것인가?”

라며,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문상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가을 9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재위하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란, 자기 삼촌을 죽이는 것.

자기 삼촌이라면 아버지이자 선왕인 서천왕의 아우로서,

숙신의 침공을 멋지게 격퇴하시어 안국군(공?) 칭호까지 받으신 달가였는데,

혹시라도 자기 자리를 넘보는 것이 아닌가 하여 이번에 죽여버렸다.

기록에 보이듯, 큰 공적이 있어 백성들이 우러러보던 안국군을

아무래도 자기보다 사람들이 더 존경하고 있고,

그러다가는 안국군을 내세워서 자기를 몰아내려고 할지도 모른다고

(여기까지 놓고 보면 봉상왕은 자신보다 더 공이 많고 백성들의 신망도 많은 삼촌 달가에게

컴플렉스를 갖고 있던 엄청난 피해망상증 환자였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게 생각하고서, 삼촌 달가를 모살해버린다.

자기 왕좌를 지키고 싶었으면, 삼촌을 죽일게 아니라 나랏사람들 신망 얻을 짓을 했어야지.

공이 큰 사람을 저렇게 죽였으니(실상 무슨 죄목이었는지도 확실하지가 않다)

국인들이 봉상왕에게 '저놈 뭐야?'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도 남는 큰 사건이었다. 

 

[二年, 秋八月, 慕容來侵. 王欲往新城避賊. 行至鵠林, 慕容知王出, 引兵追之. 將及. 王懼. 時, 新城宰北部小兄高奴子, 領五百騎迎王, 逢賊奮擊之, 軍敗退. 王喜, 加高奴子爵爲大兄, 兼賜鵠林爲食邑.]

2년(293) 가을 8월에 모용외(慕容)가 침입해 왔다. 왕은 신성(新城)으로 가서 적을 피하려 했다. 행차가 곡림(鵠林)에 이르렀을 때, 모용외는 왕이 도망간 것을 알고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였다. 거의 따라잡게 되었다. 왕은 두려워하였다. 그때 신성재(新城宰)인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백 기(騎)를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적을 만나 분격하였다. 외의 군이 패하여 물러갔다. 왕은 기뻐하여 고노자의 작위를 더해 대형(大兄)으로 삼고, 겸하여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주었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이때 고구려를 침공한 모용외는 선비족이다.

《동사강목》에 보면 이때에 중국 대륙에 있던 왕조 가운데 한족의 왕조는 오직 진(晉)뿐으로,

한족의 쇠약하고 어지러운 정세를 틈타 북방의 호갈(胡羯),

즉 다섯 오랑캐들이 지금의 중국 북쪽 땅을 차지하고 열여섯 개의 나라를 세웠다.

이른바 '5호 16국 시대'. 모용외는 그 5호 즉 다섯 오랑캐의 하나인 선비족의 유종(遺種)이라 했다.

진이 아직 대륙을 차지하고 있을 무렵 그는 낙랑군 소속의 창려와 요동을 거듭 공격했었는데,

진 세조 태강(太康) 10년, 그러니까 고구려 서천왕 20년(289)에 진에 항복해서

선비도독이라는 벼슬을 받고 자기가 다스리던 지역의 지배권을 인정받아

마침내는 어엿한 하나의 독립국가를 세우게 되었고,

그리고 내친김에 고구려까지 먹어버리자 하고 요동을 경유해 고구려를 침공한 것이다.

 

외적이 침략해왔는데, 싸우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도를 지키지도 않고,

냅다 피하기만 할 생각으로 신성으로 튀었단 말이지.

(나랏사람들에게 비호감이 될 짓을 사서하고 있다)

자칫 나라가 엄청난 위기에 닥칠 수도 있었을 이 사태에서,

왕의 뒤에까지 바짝 추격해온 모용외의 군대를 격퇴하고 왕을 구해낸 것은,

북부 소형으로서 신성 책임자를 맡고 있던 고노자다.

적이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아니면 알고 구원하러 가던 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기병 5백으로 왕을 맞이하러 가던 길에 그들과 딱 맞닥뜨렸으니 조금은 놀라지 않았을까.

(설마설마 여기까지 올줄은 몰랐을테니)

그래, 어쨌든 자신이 거느린 기병 5백으로 모용외의 군대와 맞붙어서 격퇴하고,

봉상왕은 어찌나 고마워했는지 소형이던 그를 대형으로 승진시켜주고 식읍도 하사한다.

 

이 친구, 혹시 예전에 외적 앞에서 도망친 적 있지 않아?

모용외가 쳐들어오기 전에, 서천왕 때에 숙신이 쳐들어왔었으니까.

그때 겁쟁이처럼 벌벌 떨고 있다가, 아니면 서천왕이 태자로서 나가 싸우라고 했다가

겁나서 안 한다고 그러다가 서천왕에게 한 소리 들은 적은 없었을까?

그러다가 삼촌이 자신 대신 나가서 숙신과 싸워 쫓아내고 안국군 칭호까지 받게 되니까,

그리고 그 삼촌이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보다도 더 칭송을 받게 되니까,

그래서 즉위하자마자 외적을 물리친 안국군에게 컴플렉스를 느껴 죽인것 아닌가?

기록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그런 상황도 생각해봄직한 일이다.

(왠지 얼추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뿐일까)

 

여담으로 《후주서》라는 중국역사책에는 후주에서 벼슬한 고림(高琳)이라는 사람의

열전을 싣고 있는데, 자가 계민(季珉)인 이 사람의 선조가 놀랍게도 고구려 사람이라 한다.

그의 6대조 할아버지인 흠(欽)의 성이 고씨라고 했으니 고구려의 왕족임에는 틀림없지만, 

모용외가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그는 연에 볼모로 잡혀왔다가 연에 눌러 살면서 벼슬을 맡았고, 

5대조인 종(宗)은 훗날 백성을 이끌고 위(魏)로 귀화하여 우진(羽眞)이라는 성을 하사받았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고흠도 고구려에 계속 남아있었으면 봉상왕에게 제거당했을지도 모른다.

 

[九月, 王謂其弟固有異心, 賜死. 國人以固無罪哀慟之. 固子乙弗出遯於野.]

9월에 왕은 그 아우 돌고(固)가 배반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여 사약을 내렸다[賜死]. 돌고에게는 죄가 없었으므로 국인이 애통해 하였다.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은 들판으로 달아났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2년(293)

 

삼촌 죽인 것도 모자라서 이젠 동생까지.

왕 주제에 전쟁에서 싸움 한번 안 해보고 신성까지 도망친 것도 꼴사나운 일인데,

돌아와서 한다는 일이 군사 훈련이나 성곽 수축같은 외적 대비방책도 아니고,

괜히 애꿎은 식구 하나 더 잡아서 동생을 죽여?

봉상왕의 욕을 하자는 건 아니지만, 굳이 그렇게 위험한 난리를 겪고 어수선한 상황에서까지,

자칫 국론이 분열될지도 모르는데 나랏사람들에게 신망받던 자기 동생을

사약 내려 죽여야만 했던 것인지 참 알수 없는 일이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또다시 애매한 사람을 하나 더 역적으로 몰아 죽이다니.

사람들 민심만 더 흉흉하게 만드는 꼴이 아닌가.

(마치 6.25 때 서울 수복 직후에 피난 못가고 서울에 남아있던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몰아 애매한 사람까지 마구 족치던 것처럼.)

 

[三年, 秋九月, 國相尙婁卒. 以南部大使者倉助利爲國相, 進爵爲大主簿.]

3년(294) 가을 9월에 국상 상루가 죽었다. 남부대사자(南部大使者) 창조리(倉助利)를 국상(國相)으로 임명하고, 작위를 올려 대주부(大主簿)로 삼았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서부 출신의 국상 상루의 후임으로 발탁된 것은 남부 대사자 창조리.

남부는 곧 관나부, 옛날 중천왕의 노여움에 자루에 담겨 바다에 던져진 관나부인이

궁중으로 발탁되기 전에 살았었던 그 곳.

그 무렵에는 후궁밖에 내지 못할 정도로 세력이 미미했었는데,

대사자 창조리가 국상에 대주부로 발탁되면서 다른 부를 제치고 확 떠오른 듯 싶다.

 

[五年, 秋八月, 慕容來侵.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役者有暴死者, 亦聞壙內有樂聲. 恐有神乃引退. 王謂臣曰 “慕容氏, 兵馬精强, 屢犯我疆.爲之奈何?” 國相倉助利對曰 “北部大兄高奴子, 賢且勇. 大王若欲禦寇安民, 非高奴子, 無可用者.” 王以高奴子爲新城太守. 善政有威聲, 慕容不復來寇.]

5년(296) 가을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해 왔다.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묘를 보고 사람을 시켜 파헤쳤다. 인부 중에 갑자기 죽는 자가 생기고, 또 구덩이 안에서 음악소리가 들렸다. 귀신이 있을까 두려워 곧 군사를 이끌고 물러갔다. 왕은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모용씨의 병마가 날래고 강하여 우리 영토를 거듭 침범한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국상 창조리가 대답하였다.

“북부 대형 고노자는 어질고 또 용감합니다. 대왕께서 만약 적을 막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시려면, 고노자가 아니면 쓸 사람이 없습니다.”

왕은 고노자를 신성태수로 삼았다. 선정을 베풀어 위세와 명성이 있었으므로, 모용외가 다시 쳐들어 오지 못하였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못 잊어서 또 왔네 미련 때문에.

모용외는 3년만에 다시 고구려를 침공한다.

그가 다다른 고국원에, 마침 봉상왕의 아버지 서천왕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 무도한 자식이 서천왕의 능을 파헤쳐 협박이라도 할 요량이었는지 여길 파게 했다가,

때아닌 귀신 소동에 혼쭐이 나서 도망가버렸다고 《삼국사》는 전한다.

그리고 국상 창조리의 건의로, 왕은 일찌기 모용외를 격퇴한 전력이 있는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기에 이르렀고, 다행히 모용외는 그 뒤 쳐들어오지 않았다.

고구려에서 겪은 그 불가사의한 체험 때문에 겁에 질린 탓도 있겠고,

뭐 고노자라고 하는 그 사람의 인품이나 이름값도 톡톡히 한몫했으리라.

하긴 그 자가 어떻게 또 다시 쳐들어오겠나.

예전에도 5백 기병을 끌고 자신의 군대를 거의 작살을 낸 고노자인데.

(왜 자꾸 이 양반 이름 보면서 박노자 교수가 생각나는 거지?)

  

[七年, 秋九月, 霜雹殺穀, 民饑. 冬十月, 王增營宮室,頗極侈麗, 民饑且困.臣驟諫, 不從. 十一月, 王使人索乙弗殺之, 不得.]

7년(298) 가을 9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겨울 10월에 왕은 궁실을 증축하였는데 극히 사치하고 화려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 피곤해했다.여러 신하들이 자주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11월에 왕은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 했던가? 공자님 말씀에,

포악한 정치란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운 것.

호랑이가 자주 출몰하는 곳에 살면서도 세금이 무서워 나오지 못한 것처럼,

서리와 우박 때문에 농사를 망쳐서 백성이 굶는 마당에,

왕은 왕궁 증축에 여념이 없었고, 신하들이 말리는 것도 듣지 않았다.

을불이 도망쳤다는 것을 알고 죽이려고도 했으나, 그가 어디에 있는지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봉상왕의 행동은, 허리에 여자만 안 끼고 있다 뿐이지 다른 여러 나라에서 행해지는

폭군의 전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흉년 들어서 백성들 굶주리는데도 자기는 호의호식하면서,

무리한 토목공사로 백성들을 징발하는 것은,

폭군들이 자기 망하려고 용쓸때 한번씩 꼭 거쳐가는 정석과도 같은 수순.

덧붙여 신하들이 그것을 그만두라고 간언해도 결코, never,

귀 먹은 사람처럼 따르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이기.

이때 왕이 죽이려 했던 을불, 그러니까 예전에 왕이 죽인 동생 돌고의 아들.

봉상왕의 조카인 그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는지 아실만한 사람은 다 아실 것이지만,

뭐 다음 편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해드리기로 하겠다.

 

[八年, 秋九月, 鬼哭于烽山. 客星犯月.冬十二月, 雷, 地震.]

8년(299) 가을 9월에 귀신이 봉산(烽山)에서 울었다.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겨울 12월에 천둥이 치고 지진이 일어났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그리고 때맞춰 일어나주는 각종 자연재해와 괴이한 이변들.

왕의 실정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으리라.

원래 나라가 어지러울 때에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이 일어나기 마련.

귀신이 울고, 혜성이 출몰하고, 지진에 서리에 우박 같은 천재지변까지.

봉산에서 울었다는 그 귀신들은,

굶주린 상태에서 봉상왕의 무리한 토목공사 때문에 지쳐 죽은 백성들이거나,

아니면 봉상왕의 손에 죽은 달가와 돌고의 원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귀신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게 뭔 소용이야.

그게 왕을 저주하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는데.

그 귀신들이 봉산에서 뭐라고 울었을까나?

"고구려는 망한다"

이랬을까?

 

[九年, 春正月, 地震. 自二月至秋七月, 不雨, 年饑民相食. 八月, 王發國內男女年十五已上, 修理宮室. 民乏於食, 困於役, 因之以流亡.]

9년(300) 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2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흉년이 들자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8월에 왕은 나라 안의 남녀 15살 이상인 자들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떨어지고 일에 지쳐 도망쳐 흩어졌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아무나 깔고 앉고 베개삼아 누우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활을 쏘아 죽였다던,

그래서 '폭군'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모본왕 때보다도,

나라는 더욱 더 끔찍한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귀신이 우는 소리도 봉상왕의 귀에는 어디서 개 짖는 소리로밖에 안 들렸던가?

다시 또 장정을 징발해서 궁실을 수리하게 하는데,

이때는 결국 지치다 못해 공사현장에서 도망치는 사람까지 생겼고,

5개월 동안이나 계속된 가뭄과 흉년으로, 백성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비참한 지경에까지.

고구려의 선대를 돌아봐도 이러한 일은 전에 없던 끔찍하고 처절한 모습들이었다.

나라를 뒤엎는 쿠데타가 일어나던지, 외적의 침략으로 수도가 무너지던지,

언제 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지경으로까지 고구려가 몰려 있었다.

사람이 서로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비참한 지경이 바로 나라가 망할 징조가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망하기 직전의 나라와 왕이라도, 한번쯤은 그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오는 법.

그것이 하늘이 공평하다고 하는 이유이다.

그 기회가 봉상왕에게도 찾아왔다.

 

[倉助利諫曰 “天災至, 年穀不登, 黎民失所, 壯者流離四方, 老幼轉乎溝壑, 此誠畏天憂民, 恐懼修省之時也. 大王曾是不思, 饑餓之人, 困木石之役, 甚乖爲民父母之意. 而有强梗之敵, 若乘吾弊以來, 其如社稷生民何? 願大王熟計之.” 王曰 “君者, 百姓之所瞻望也. 宮室不壯麗, 無以示威重. 今國相蓋欲謗寡人, 以干百姓之譽也.” 助利曰 “君不恤民, 非仁也. 臣不諫君, 非忠也. 臣旣承乏國相, 不敢不言. 豈敢干譽乎?” 王笑曰 “國相欲爲百姓死耶? 冀無後言.”]

창조리가 간하였다.

“재난이 거듭 닥치고 곡식이 자라지 않아 백성들은 살 곳을 잃어 버리고, 장정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노인과 어린 아이가 구덩이에서 뒹구니, 지금은 진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염려하며, 삼가 두려워하고 수양하며 반성해야 할 때입니다. 태왕께서는 일찍이 이를 생각지 않으시고, 굶주린 백성들을 몰아 토목공사로 고달프게 하고 계십니다. 이는 백성의 어버이 되신 뜻에 매우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강하고 굳센 적이 이웃해 있는데, 우리가 피폐한 틈을 타서 쳐들어 온다면, 사직과 백성은 어찌 하시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리소서.”

왕은 화를 내며 말하였다.

“왕이란 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분이다.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못하면 위엄을 보일 수 없다. 지금 국상은 과인을 비방하면서 백성들의 칭찬을 가로채려 드는 게로구나.”

“왕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으면 인(仁)이 아닙니다. 신하가 왕에게 간하지 않으면 충(忠)이 아니옵니다. 잠시나마 국상의 자리를 채우고 있는 저로서는 감히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 감히 칭찬을 가로채려 들겠습니까?”

왕은 웃으며 말했다.

“국상께서는 그럼 백성을 위해 죽을 텐가? 다시는 말하지 말았으면 하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9년(300)

 

단순히 쫓겨난 자에 대한 역사의 폭력이자 승자에 의한 왜곡된 초상이 아니라,

실제의 역사에서도 봉상왕이 그저 암군이고 폭군일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서 국상 창조리와 나눈 대화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왕이란 백성이 우러러보는 분으로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보일수 없다."

궁실이 웅장하고 화려해야만 백성들이 위엄을 알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진시황제의 제국은 백성들에게 영원토록 추앙을 받고,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경복궁의 주인과 그 후손들께서는 오래도록 그 궁궐의 주인이 되셔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하는 국상의 말마저도,

"국상은 백성을 위해 죽고 싶은가?"

(풀이하면, '백성 어쩌고 하면서 자꾸 내앞에서 지껄이면 죽여버린다. 닥치고 있어라'는 뜻)

하고 일거에 무시해버린다.

어찌보면 이때 창조리의 말이,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을 마지막 기회였는데....

또한 그토록 목말라하는 '왕의 위엄'이라는 것은, 커다란 궁궐이나 절대권력 같은 것으로는

결코 손에 넣을수 없는 것이란 사실도 깨달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는데.

 

일본의 유명한 군담소설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의 처음 도입부 구절이다.

 

멀리 이조(異朝)를 되새겨보면,

진(秦)의 조고(趙高), 한(漢)의 왕망(王莽), 양(梁)의 주이, 당(唐)의 녹산(祿山).

이 자들은 모두들 구주선황(舊主先皇)의 정치를 따르지 아니하고,

쾌락을 다하고, 충언을 귀기울여 듣지 않고,

천하가 혼란스러운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민간의 고통을 알지 못하였으니,

오래 가지 못하고 멸망한 자들이라.

 

지금 고구려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더 잘 표현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구주선황, 옛날 나라를 덕으로 다스렸던 왕들의 뒤를 따르지 않은 자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고 있는지는 역사가 가르쳐준다.

자고로 충신의 간언을 무시하는 왕이 잘 되는 꼴을 지금껏 본 적이 없다.

봉상왕도 재상의 간언을 무시하고 자신의 위엄을 높이는 데에만 급급했다.

어쩌면 이때 자신에게 간언한 재상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기회를 봐서 죽이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助利知王之不悛, 且畏及害. 退與臣同謀, 廢之, 迎乙弗爲王. 王知不免, 自經, 二子亦從而死. 葬於烽山之原, 號曰烽上王.]

창조리는 왕이 고치지 못할 것을 알고, 또 해가 미칠까 두려워하였다. 물러나와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모의하여 왕을 폐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왕은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목을 매었으며[經], 두 아들 역시 뒤따라 죽었다. 봉산의 들에 장사지내고 호를 봉상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사》권제17, 고구려본기5, 봉상왕 9년(300)

 

결국 창조리는 최후의 결단을 내리고야 만다.

자신의 손으로 왕을 깎아 치워버리고 새로운 왕을 추대하는 것.

어차피 자신이 지금 나서지 못한다고 해도 누군가는 왕을 갈아치우려 할 것이고,

만약 그랬다가는 자신이 왕의 최측근, 국상으로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소위 '연대책임'을 지고 왕과 함께 죽게 될지도 모른다.

더구나 백성들이 저리도 괴로워하는데 국상이 되어 그냥 보고만 있는 것도 영 그렇고.

그렇게 그가 봉상왕을 밀어내고 새로운 왕으로 세운 것이,

봉상왕에게 쫓기다시피해서 달아나 종적을 감추었던, 봉상왕의 조카 을불이었다.

(그런데 봉산이라고 하면 봉홧불이 있는 산이라는 뜻인데, 고구려에도 봉수제도가 있었던가?)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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