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24>제11대 동천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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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읽어보신 분들 많을 것이다. 난 어려서 만화로 잠깐 읽었는데 지금은 잘 안 읽는다. 아니, 내가 과거 10년 안에 《삼국지》 읽은 기억이 없다.(올해 나이 스물 하나) 우리 나라 사극들은 고증할만한 역사 기록이 그렇게 많지 않다보니, 그 부분은 야사, 즉 민담이나 개인기록에서 보충해야 하는데, 그나마도 없는 경우는 상상력으로 메꿔넣어야 한다.

 

어차피 사극의 내용 전체를 사실로 받아들일 사람은 없지만 간간이 그런 사람이 있으니까. 상상해서 창작한 내용을 실제 역사와 합쳐놓다보면 그 경계가 모호해져서, 마치 실제로도 있었던 일인줄 착각하게 되는, 하지만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을 구별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조선만 넘어가면 이런 사태는 더 심각해진다. 태조 왕건이나 대조영 같은 곳에서는 군데군데 《삼국지》의 내용을 살짝 바꿔서 넣은 것이 있는데, 민족주의나 국수주의 문제는 그렇다 쳐도 우리 나라 사극이 참조할 게 꼭 중국 소설밖에 없었나 참, 우리 나라에는 왜 《삼국지연의》같은 소설이 없을까 하는 탄식, 우리 조상들께서는 어쩌면 그리도 소설 짓기에 인색하셨는지 이미 죽어 땅속에 묻힌 분들께 괜히 욕하고 싶은 한탄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 사실.

 

하지만 소설은 어찌 보면 현실의 축소판. 군데군데 실제적인 면모가 들어가있기는 해도 어디까지나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그리고 《삼국사》와 《삼국유사》. 이 속에 기록되어있는 천년 전의 이야기들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읽다보면 우리 역사가 《삼국지》는 비교도 하지 못할 만큼 엄청난 소재를 담고 있으며, 그 소재로도 충분히 《삼국지》를 능가할만한콘텐츠가 될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단지 우리 손에 뭐가 있는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

 

[東川王<或云東襄> 諱憂位居, 少名郊彘, 山上王之子. 母酒桶村人, 入爲山上小后, 史失其族姓. 前王十七年, 立爲太子, 至是嗣位.]

동천왕(東川王)<혹은 동양(東襄)이라고도 했다>의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고, 어릴 적의 이름은 교체(郊)인데 산상왕의 아드님이시다. 어머니는 주통촌(酒桶村) 사람으로서 들어와 산상왕의 소후(小后)가 되었으나, 역사책에 그 족성(族姓)이 전해지지 않는다. 전왕 17년에 태자로 세워졌다가 이때 왕위를 이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즉위전기

 

《삼국사》가 기록한 위궁왕의 대략설명. 그리고 《삼국사》는 위궁왕의 성품이 몹시 너그럽고, 또 어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인, 인, 어질인, 어질, 어질, 어질, 어질.... 오우, 어지럽군화~~) 《삼국사》산상왕 즉위전기에서 《위서》를 인용해서 말한 위궁이 바로 이 위궁왕이다. 거기에 따르면 추모왕의 증손자인 궁(宮) 즉 태조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었다[生而開目能視]"고 했는데, 여기에 고구려말로 서로 비슷한 것을 가리키는 위(位)라는 말을 붙여서 "'궁(할아버지)를 닮았다'는 뜻으로 '위궁'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高句麗呼相似爲位, 故名位宮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시다시피 태조왕은 정작 아들이 없었고 태조왕 이후로는 모두 그의 아우들이 즉위했는데, 신대왕이 고국천왕을 낳고 고국천왕의 아우가 산상왕이며 산상왕이 위궁왕을 낳았다는 계보를 따라가면 위궁의 증조부는 태조왕이 아니라 그 아버지 고재사 고추가로 《위서》의 착각이다.

 

[王性寬仁. 王后欲試王心, 候王出遊, 使人截王路馬鬣. 王還曰, "馬無可憐". 又令侍者進食時, 陽覆羹於王衣, 亦不怒.]

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지셨다. 왕후가 왕의 마음을 시험해보려고, 왕이 밖으로 나간 틈을 타서, 사람을 시켜 왕이 타는 말[王路馬]의 갈기를 잘랐다. 왕은 돌아와서

“말이 갈기가 없으니 안됐구나.”

고 할 뿐이었다. 또 시중드는 사람을 시켜 식사를 올릴 때 일부러 왕의 옷에 국[羹]을 엎지르게 하였으나, 역시 화내지 않았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원년(227)

 

산상왕의 유일한 적자이며 피붙이. 하지만 어머니쪽 힘이 약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여지껏 고구려의 국왕들은 모두 어머니쪽이 유력한 부(部) 출신이었지만, 이번의 태자 우위거는 달랐다. 태어날 때부터 왕비로 살아갈 운명으로 태어났다고 '후녀(后女)'라는 이름을 지니고 태어났던 그녀의 어머니지만, 귀척이나 대족과는 전혀 상관없이 촌구석에서 술통이나 만들던 부곡민 비슷한 것의 후손.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보면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灌奴部)와 음행하여 아들을 낳아 위궁(位宮)이라 하였다[伊夷模無子, 淫灌奴部, 生子名位宮]"고 적고 있는데 어느 쪽의 기록을 따르든 어머니 쪽이 별로 대접 못 받는 처지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의 왕비족은 절노부였으니까. 선왕의 아들이라는 것만 빼면 지지할 배후 세력도 뭐도 없는데다 외가쪽의 세력이 그렇게 강하지 못했던 그였기에, 알게 모르게 궁중에서 받는 스트레스나 지닌 컴플렉스가 만만찮았다. 자칫 밉보였다가는 반대파 신하들 손에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수도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조금 부드러워질 필요가 있었다. 다른 이와 트러블을 만드는 일 없이,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 살아야 한다고 태자 시절의 우위거왕은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기록에 보이는 태왕의 지독한 인내심은, 궁중 생활에 적응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그만의 생존방식이었다. 산상왕비 우씨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우위거는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어차피 자신의 소생도 아니고, 두 번이나 몰래 죽이려고 했던 천한 여자(몰락한 귀척이었을 수도)의 아들인 자신이 그렇게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자신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자른 것도, 뜨거운 국을 엎은 것도 보통 대노해서 책임자를 벌하라고 방방 뛰었을 일을 그냥 조용히 웃어넘긴다. 아니, 그래야 했다.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大赦. 三月, 封于氏爲王太后.]

2년(228) 봄 2월에 왕께서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3월에 우(于)씨를 왕태후로 봉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즉위 이듬해(유년칭원에 따른다면 그의 원년이 될 수도 있는 해다). 그는 졸본을 찾는다. 홀승골성에서 시조 동명왕의 능을 찾아 참배하고서, 대사면령을 내린다. 무사히(?) 왕이 된 것을 하늘과 조상들께 고하고, 앞으로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펼쳐보이려는 자신의 포부를 세상에 보이기 위해 죄수들에게 사면을 내리고, 양어머니이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왕비인만큼 자신의 어머니이자 왕실의 최고 웃어른으로 대우하여 인군(仁君)으로서 거듭나고자, 자신을 그리 괴롭히던 우씨를 태후로 모시게 된다.

 

[四年, 秋七月, 國相高優婁卒. 以于台明臨於漱爲國相.]

4년(230) 가을 7월에 국상 고우루(高優婁)가 죽었다. 우태 명림어수(明臨於漱)를 국상으로 삼았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명림어수는 신대왕 때의 명림답부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면 그는 연나부 쪽의 사람이겠고. 이때 고구려 조정의 실권은 연나부가 잡고 있었다고 봐도 무리는 없을듯 싶다. 연나부는 곧 고구려 오부의 하나인 북부(北部)이자 후부(後部).

 

이 때에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이 오에 대해 스스로 신하라 칭하였다. 오의 왕[吳主] 손권(孫權)은 크게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연을 연왕(燕王)에 봉하였다. 사신이 이르자 연은 그 사신 장미(張彌)를 목베어 머리를 위(魏)에 보내고, 그를 따라온 진단(秦旦)과 황강(黃彊) 등은 현도에 구금하였다. 단(旦) 등이 고구려로 도망쳐 오왕의 전지(傳旨)를 전하면서 거짓으로 말했다.

"하사한 것이 있었는데 요동에서 빼앗겼소이다."

왕은 기뻐하여 조의(衣) 25명을 보내어 단 등을 오로 송환하고, 표(表)를 올려 신하를 칭하며(?) 초피(貂皮) 1천 장[枚], 갈계피 열 구(具)를 공물로 바쳤다.

《동사강목》 권제2상(上) 계축(신라 조분왕 4년, 고구려 동천왕 7년,

백제 구수왕 20년: 233)

 

이것이 고구려 위궁왕 7년(233) 여름 5월의 일이었는데, 《삼국사》에는 없지마는 안정복 영감이 《자치통감》 및 《문헌통고》에서 보충해 적어놨다. 그러니까. 손권이 요동에 보낸 사신이 거기서 죽었고 목은 위(魏)로 보내졌는데, 용케 살아남아 구금된 사신 진단이 고구려로 도망쳤다. 위궁왕은 자신의 조의 25인과 함께 사신들을 손권에게 돌려보내고 예물로 초피(담비가죽) 1천 장과 갈계피(싸움닭같이 생긴 새의 가죽) 열 구를 주었다는 것. 그리고 고구려와 오는 연합해 요동을 칠 것을 약조했다ㅡ고 단재 선생이 말씀하셨다. 강동의 오와 고구려가 서로 가까워지게 되면 위로서는 이득볼 것이 없었다. 다급히 사신을 고구려로 급파해서 오와 고구려가 서로 가까워지는 것을 막으려 했고 이것은 모종의 성공을 거둔다.

 

[八年, 魏遣使和親. 秋九月, 太后于氏薨. 太后臨終遺言曰, "妾失行, 將何面目見國壤於地下? 若臣不忍擠於溝壑, 則請葬我於山上王陵之側." 遂葬之如其言.]

8년(234)에 위(魏)가 사신을 보내 화친하였다. 가을 9월에 태후 우씨가 죽었다. 태후는 임종시에 유언하였다.

“내가 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였으니 앞으로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국양(國壤)을 뵙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차마 구렁텅이에 떨어뜨리지 않으려거든, 나를 산상왕릉 곁에 묻어주기 바란다.”

마침내 그 유언대로 장사지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어찌 보면 참으로 그녀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고국천왕의 왕비로 들어와, 그의 아우 고연우를 산상왕으로 즉위시키고 그의 안사람 자리까지 차지함으로서 두 왕의 곁을 지켰던 당대에 보기 드문 여장부.(조선조 유학자들에게 비판은 엄청 받았지만) 그런 그녀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한 유언은, 자신을 고국천왕이 아닌 산상왕의 곁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유언이라는 것은 보통 자신이 죽기 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혹은 그 마지막 순간 자신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처음에 자신이 남편으로서 섬기고 사랑했던 고국천왕을 배신하고 그의 동생에게 간 것이 우씨는 평생 마음에 걸렸던 것일까. 그렇게 그녀는 고국천왕이 아닌 산상왕의 옆에 묻힌다.

 

[巫者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是用植松七重於陵前.]

무당[巫者]이 말하였다.

“국양께서 내게 내려와 말씀하시기를, ‘어제 우씨가 산상(山上)에 돌아가는 것을 보고 분함을 못 이겨 결국 함께 싸웠노라. 돌아와 생각하니 낯부끄러워 차마 국인을 볼 수가 없다. 네가 조정에 알려, 무엇으로 나를 좀 가리게 하라.’ 하셨사옵니다.”

이리하여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8년(234)

 

그런데 보니까, 고국천왕이 현몽해서 저렇게 말한 것이, 당시 고구려에는 형사취수라는 풍속이 존재하지 않았던 증거라고 하더라.만약 실제로 그런 풍속이 있었다면, 우씨가 '바르지 못한 행동' 운운하면서 부끄럽게 여길 필요도 없고, 자기 부인에게 동생이 장가들었다고 분해할 필요도 없는데, 그걸 저승에서 안 고국천왕이 산상왕과 싸웠다고? 그래서 그게 부끄럽다고 뭐로 좀 가려달라고 한 것이란다. 죽기 전에 이르러 남편 대하기 부끄럽다며 얼굴을 피해 다른 곳에 묻히려던 부인이나, 그걸 보고 화가 나서 부인이 옆에 묻히겠다고 말했던 그 동생을 찾아가서 싸운 왕이나.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가. 우리나라 옛날 사람들은. 아무튼지간에 이것이 《삼국지》에서 말한바,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그 주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벌려 심는다."

라고 말한 풍속의 내막이다. 지금도 무덤 주변에 나무 심는 사람들 많더라.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

10년(236) 봄 2월에 오왕(吳王) 손권(孫權)이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왕은 그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가을 7월에 목을 베어 머리를 위로 보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위와 사신을 통한 뒤, 위궁왕은 오와의 국교를 끊어버렸다. 오에서 온 사신 호위의 목을 베어 위로 보내버린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5년 전만 하더라도 고구려와 오의 관계는 괜찮았는데, 고구려와 위, 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촉한 따위는 빠져라!)《동사강목》에서 안정복 영감은 특유의 꼬장꼬장한 멘트를 잊지 않으신다.

 

교린하고 화친하는 것은 나라의 상도(常道)이지만, 오(吳)는 고구려와 뱃길이 1만 리나 되고 지세가 너무 떨어져서 이웃 나라라고 할 수 없다. 때문에 오는 일찍이 고구려에 화친을 구한 적이 없었으나, 지난해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 신하를 칭했기에(?), 오의 사신이 온 것은 그 답례였다. 왕은 그 사신의 내방을 대접하는 것이 마땅한데, 지금 도리어 사신을 죽여 그 머리를 위(魏)에 전하여 공손씨(요동 태수)의 난망(亂亡)한 정치를 답습하려 했으니, 심히 의롭지 못한 것. 이런 왕의 처사는 위에 잘 보이려던 것에 지나지 않지만, 불과 10년도 못 되어 관구검의 침입으로 수도는 잔파(殘破)되고 나라는 거의 보전할 수 없게 되고 말았으니, 불의한 일의 결과란 이런 것이다.

 


하지만 안정복 영감의 비판에도 헛점은 있다. 원래 오에서 고구려로 온 사신 진단의 목적지는 요동이었다. 고구려로 가려던 것이 아니고 말이다. 요동에 있던 공손연과 일이 잘 풀리지 않으니까 고구려로 온 것이지 손권이 처음부터 고구려 하나를 생각하고서 마음먹고 사신을 보낸 것은 아니다. 요동에 계속 있다가는 죽을 것 같으니까 거기서 도망친 진단이 고구려에 왔고,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 말한 대로 손권이 보낸줄 '속여서' 고구려에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위궁왕도 그걸 믿었다.

 

오히려 의아해한 것은 손권쪽이었다. 고구려라는 나라가 어디 붙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정말) 사신은 커녕 편지 한 통 주고받은 적 없는 나라에서 자기가 보낸 사신을 잘 대접해주고 본국으로 선물까지 콜택배로 부쳐주니 고맙긴 하지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는 진단에게서 내막을 듣기 전에는 몰랐다. 손권이 고구려로 보내려다 요동에서 가로채인 물품 따위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고, 진단의 말에 속아 위궁왕은 보기좋게 비싼 담비가죽과 갈계피만 '떼먹힌' 꼴이 된 셈. 하지만 진단의 거짓말이 고구려와 오 사이를 처음으로 이어주는 가교가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오는 라이벌인 위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으로서 '고구려'라는 나라를 의식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화친을 염두에 두고 사신을 보낸 건 아니었지만 고구려라는 존재를 알고 그들과의 교섭권을 얻게 된 것은 오로서는 상당한 소득이었다. 반대로 위로서는 고구려가 오와 서로 통하게 되면 양면으로 공격당하는 꼴이 된다. 오와는 달리 위는 고구려와는 요동 하나 사이에 두고 국경을 맞대고 있는 사이. 고구려라는 나라에서 한번 일어난다 그러면 받게 될 영향이 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정말 고구려가 오와 손을 잡고 위를 견제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덧정없이 일이 커진다. 위는 손을 썼다. 오의 사신이 고구려로 돌아간 이듬해에 고구려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는 위의 우호교섭을 받아들여 오와의 국교를 끊었다. 

 

오왕 손권. 고구려와 화친을 맺어보려다 욕 많이 봤다. 그래도 《삼국지》는 결코 읽지 않으리. 흥.

 

[十一年, 遣使如魏,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

11년(237)에 위에 사신을 보내 연호를 바꾼 것을 축하하였다. 이 해가 경초(景初) 원년이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뭐 어쨌거나 앞으로의 고구려는 위와의 우호를 유지하려고 했던 모양이다. 오의 사신을 죽여서 위에 보낸 이듬해, 위궁왕은 다시 사신을 보낸다. 위가 연호를 경초라 바꾼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

 

[十二年, 魏太司馬宣王率衆, 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

12년(238)에 위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公孫淵)을 치니, 왕은 주부(主簿), 대가(大加)를 보내 1천 군사를 이끌고 그것을 돕게 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여기서 말하는 사마선왕 즉 사마의는 저 유명한 사제갈주생중달()이라는 고사에 나오는 바로 그 자다. 희대의 지략가이자 책략가였던 제갈공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촉한을 공격했는데, 공명은 이것을 미리 계산하고서 죽기 전에 자기를 꼭 닮은 실사체 등신대를 만들도록 했고, 공명과 얼굴뿐 아니라 키와 의자에 앉은 자세까지 꼭 빼닮은 피규어를 본 사마의는 공명이 아직 살아있는줄 착각하고 내뺐다. 훗날 사마의는 "죽은 사람이 하는 일을 어찌 알겠는가[]"라며 웃었다지만. 뭐 말하자면 탁월한 지략을 갖춘 인재는 죽어서도 그 값을 한다는 뜻이고, 한 번 싸워 보지도 않고 미리 도망치는 겁쟁이라는 뜻도 있다.(참고로 필자는 후자에 속함) 그러니까 이렇게 죽은 공명에게 쫓겨난 산 사람 중달이가 요동의 공손연을 치는데, 고구려가 군사를 내서 도왔다는 말이지. 군사 1천으로.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 중국의 '삼국지'시대를 끝내고 중국 천하를 통일하였다>

 

《삼국지연의》는 정작 고구려의 개입을 적지 않았지만, 이때 위의 태부 사마의가 공손연을 친 것은 조위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사건이었다. 조위가 멸망하고 그의 손자 사마염에 의해서 서진(西晉)이 세워지는데, 이 서진이 훗날 중국의 삼국지 시대를 끝내고 새로이 천하를 통일하게 되는 주역이기도 하다. 본의아니게 고구려는 그 역사의 격변기를 참관인으로서 지켜보게 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나라가 《삼국지》라는 희대의 걸작(?)을 탄생시키는 역사의 소용돌이속에서 맡았던 역할이 제법 혁혁한지라 자칫 《사국지연의》가 될뻔도 했지만, 나관중 그 양반이 《삼국지연의》에서 고구려를 뺀 것이, 지금에 와서는 꽤나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안 그랬으면 저 중국 양반들이 그것까지 들먹여서

"봐! 고구려를 우리 동족으로 생각해서 위대한 고전소설 속에도 등장시켰잖아!"

이러면 안되지 않나. 나관중이 《사국지연의》가 아니라 《삼국지연의》를 쓴 것은 우리로서는 상당히 불행중 다행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16년(242)에 왕은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쳐서 깨뜨렸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그런데 웬걸? 뜻밖에 위를 도와 요동을 치나 싶던 위궁왕이, 갑자기 노선을 선회해서는 4년만에 요동 땅 서안평을 빼앗아버린다. 마치 백제와 연합해 고구려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의 탈환에 협조했던 신라가 대번에 칼끝 돌려서 한강유역을 백제에게서 탈취해버린 것처럼.(뭐 외국과의 일이니 우리랑 똑같이 보면 안 되겠지만.) 《삼국사》는 《양서(梁書)》를 인용해서, "사마의(司馬懿)가 공손연을 토벌하는 틈을 타서 왕이 장수를 보내 서안평을 습격하였고 무구검이 침범해오게 되었다[以司馬懿討公孫淵, 王遣將襲西安平, 毋丘儉來侵]."고 동천왕 20년조 기사 말미에다 설명을 붙여놨다.

 

서안평은 요동에 속한 현의 하나인데, 태조왕 94년에 여기를 한번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은 일이 있다(낙랑군과는 별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듯). 《한서》에는 서안평을 북안평(北安平)이라고도 적고, 현도군에 속한 서개마현에 대해서는 "마자수는 서북쪽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쪽은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염난수라는 강은 지금 중국 내몽골자치구 시라무렌 강에 해당되며, 광개토태왕께서 친히 정벌하신 비려족들이 살던 '염수(鹽水)'이기도 하다.(역사스페셜에서 본 것을 떠올리면, 여기는 강에 염분이 많아 주변 일대의 땅이 농사짓기 힘들었다고) 소금기가 많아 소금 염(鹽)자를 써서 염수라고 부른지도.

 

《위씨춘추》에 보면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小水)가 있다."는 말과 함께, "요동군 서안평현의 북쪽에 소수가 있는데 남쪽으로 해서 바다로 들어가므로 구려(句驪)의 별종을 소수맥(小水貊)이라고 한다"고 써놨다. 그러니까 소수라 불리는 강의 남쪽에 서안평현이 있다는 것인데, 그곳에는 우리, 즉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들이 사는 고향이라는 말이 된다고 한다. 《한서》 지리지에 따라 '서북쪽으로는 시라무렌 강으로 서남쪽으로는 서안평을 거쳐 바다에 닿는 강'이 바로 《한서》가 말한 마자수이고, 그 강을 찾으면 서안평의 위치도 찾을수 있을텐데, 그런 강은 요동에서는 찾을수 없다. 저너머 요서, 대릉하나 난하에서밖에는. 중요한 것은 압록강은 결코 아니라는 것. 그런데도 이병도는 이 서안평의 위치에 대해 지금의 중국 단동이라고 했다. 염난수를 압록강으로 간주해버린 탓이다.(미친 놈!) 압록강은 백두산에서 나와 서해로 흘러드는 강인데, 단동은 압록강 북쪽에 있으니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가 있다"는 주장과도 맞지 않는다. 《한서》를 대조해도 단동은 압록강의 동북쪽에 있으니, 이 자가 한 말은 남북을 멋대로 바꿔버린 엉터리 헛소리다.

 

[十七年, 春正月, 立王子然弗, 爲王太子, 赦國內.]

17년(243) 봄 정월에 왕자 연불(然弗)을 세워 왕태자로 삼고, 나라 안에 사면을 베풀었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위궁왕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 시대의 용위(用魏)주의자ㅡ매우 실용적인 비지니스맨이기도 했다. 위와 동맹을 맺고 있던 고구려는 공손씨가 차지하고 있던 요동을 차지하기 위해 필요했던 막대한 군비를 위와의 합동작전으로 상당량 절약할 수 있었다. 위의 동맹국 자격으로 함께 공손씨의 요동에 진주해있던 1천의 고구려군이 칼끝을 돌려 요동 서안평을 차지해버림으로서 고구려는 군비도 줄이고 땅도 넓히는 두 가지 토끼를 동시에 잡고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 이때 고구려가 위의 서안평을 차지함으로써, 국경을 서로 맞대고 있는 두 나라의 사이가 안 좋아져서 치고박는 원인이 여기서 생겼다는 안정복 영감의 지적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바깥에서 전쟁이 생기게 되면 내부에서는 혼란이 생기곤 했다. 통치자가 직접 전쟁터에 나가있는 동안에 비어있는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난다던가 하는. 위궁왕은 나중의 기록에 보이지만 위와의 전쟁에 본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참전했다. 전쟁에 군사를 직접 이끌고 나가있는 동안 태왕이 없는 수도를 태왕 대신 관리감독하고 나아가 세습체제를 확실히 다져서 사후 일어날 수 있는 왕위다툼을 완화하기 위해, 위궁왕은 왕자 연불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때 연불의 나이는 열아홉살. 사리판별 똑바로 할수 있는 나이다.

 

[十九年, 春三月, 東海人獻美女, 王納之後宮.]

19년(245) 봄 3월에 동해 사람이 미녀를 바쳤다. 왕이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동해 곧 옥저 일대는 예로부터 미녀가 많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동해에서 후궁으로 받아들인 여자는 아무래도 옥저 출신이 아니었나 싶다. 고구려의 대가들은 옥저로부터 소금과 해산물, 바다표범의 가죽을 공물로 받고 옥저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면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귀척들이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첩으로 삼기도 했다는 사실이 중국측의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실려 있다. 고구려에서는 옥저의 미인을 데려다 첩으로 삼는다는 《삼국지》 기록도 있고 보면, 하긴 북쪽 사람들이 미녀가 많지(사상은 공산주의지만).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邊.]

울 10월에 군사를 내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삼국사》 권제17, 고구려본기5, 동천왕 19년(245)

 

이때 신라를 다스리고 있던 왕은 조분왕이었는데, 신라측에서는 왕자 석우로를 보내서 막게 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와 마두책(馬頭柵)을 지켰을 뿐이라고. 가까스로 즉위해 왕이 되어, 중국에서 일어나는 이른바 '삼국지 전쟁'에 뛰어들어 기회를 노려서 요동을 빼앗아 차지해버리고, 세자까지 책봉하고, 이렇게 여기까지 적다보면 동천왕이나 고구려의 앞날은 그저 창창하게만 보였는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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