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it.ly/1A7g7wS

異說 난무 ‘이순신정론’ 바로 잡는다
온양신문 창간23주년 특집-이순신 연구
2012년 05월 22일(화) 11:05 [온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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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인물인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그동안의 각종 이설(異說)에 대해 ‘정론(正論)’으로 바로잡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동안 명확하지 못하고 불충분한 사료와 자료들이 난무해 ‘정론’으로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이순신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의 일된 의견이다. 

이에 순천향대학교(총장 손풍삼) 이순신연구소(소장 임원빈)는 임진왜란 발발 7주갑을 맞이해 제51회 아산성웅이순신축제를 앞둔 지난 4월 24일 오후 2시부터 아산 현충사 옆에 위치한 충무교육원 강당에서 ‘이순신정론’이라는 주제로 ‘제14회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은 “이순신정론은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을 재조명하는 사업이 전국적으로 진행되고 있는데 문헌적 해석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순신에 대해 잘못 알려지고 왜곡된 여러가지 이설(異說)에 대해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주제발표를 하는 참여자들 ⓒ 온양신문

이번 학술세미나에서 ▲해군리더십센터 제장명 교수는 ‘해전횟수, 면사첩, 백의종군’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출신 배경과 명량해전 철쇄설’ ▲ 이순신연구소장 임원빈 교수는 ‘명량해전 승리요인, 이후 조선수군과 일본 수군의 행적 그리고 당파전술’ ▲문화재전문위원인 정진술 위원은 ‘거북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 ▲홍순승(연기교육청 장학관)장학관은 ‘전사설/자살설/은둔설’을 주제로 발표했다. 

온양신문은 지난호에서 세미나에 발표된 일부 주제를 요약 보도한 데 이어 이번호에는 발제자 5명의 모든 논문을 요약해 보도한다. 

“23전 23승은 허구…백의종군, 졸병 강등 아니다” 

해군리더십센터 제장명 교수 ⓒ 온양신문

□ 해전횟수, 면사첩, 백의종군 
─ 제장명(해군리더십센터) 교수 

제장명 교수는 지난 2004년도에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방영을 전후해 ‘23전 23승’이라는 문구가 각종 매체에 이순신의 전적으로 사용됐으나 이러한 주장은 구체적인 해전명칭에 대한 제시 없이 대략적인 횟수만 카운트했기 때문에 어떤 해전들로 구성돼 있는지 알 수 없고 실체가 없는 구호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제장명 교수는 해전횟수 정립(안)으로 임진왜란 당시 해전을 분류하기 위해서는 ‘어떤 해전을 1회의 해전으로 셈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문제를 제기, 해전의 개념에 대한 규정이 전제돼야 한다고 보고 이를 ‘대표해전’과 ‘세부해전’으로 나누어 분류했다. 

‘대표해전’은 조선수군이 모 기지를 한번 출동해서 다시 돌아올 때까지 기간 중 전투를 했을 경우 있었던 모든 해전을 모아서 1회로 산정하고 해전명칭을 그 중 가장 의미가 깊은 해전에 포함시켜 분류하는 방안이고 ‘세부해전’은 한번 출동해서 있었던 모든 전투를 각 각 1회의 해전으로 산정하는 것이다. 이 경우 같은 대상이라도 교전날짜가 다를 경우 해전 횟수에 포함했다. 

그렇게 해서 임진왜란 당시 대표해전은 총 21회로 이중 이순신은 총 17회 대표해전에 참가했고, 세부해전 49회중 이순신은 45회 참가해 전승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면사첩에 대해서는 본래 임진왜란 시기 명나라에서 도입돼, 본래 부적(附賊)했거나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적용했던 제도로 ‘적(賊)에게 붙었던 사람이라도 돌아와 자수하면 죽음에서 면제시킨다는 증명’인데 이순신이 면사첩을 받은 것은 이순신 본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적에게 어쩔 수 없이 협조한 사실이 있는 사람들을 이순신더러 구제하라고 명의 경리 양호가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장명 교수는 ‘백의종군’에 대해서도 이는 형벌의 하나로서 이 형벌은 적어도 과거에 급제한 인물들 이상에게만 적용한다고 지적하고, 이를 통해 항간에서 이순신의 백의종군 중의 신분을 졸병이라고 규정한 것은 잘못된 인식이었음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특히 이 시기는 미증유의 국가 위기상황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적을 맞아 싸울 장수가 부족한 현실을 감안해 전공을 세워 죄를 갚으라는 의미로 부과된 비교적 가벼운 형벌이라고 밝혔다. 

“이순신은 사대부 가문 집안”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교수 ⓒ 온양신문

□ 출신배경과 명량해전 철쇄설 ─ 이민웅(해군사관학교)교수 

이민웅 교수는 지금까지 알려져 온 이순신 가계가 조부 때부터 몰락해서 매우 빈한(貧寒)했다는 설은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즉, 역사적으로 ‘영웅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어린시절 어렵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국가를 구한 위대한 인물이 됐다는 과장된 ‘스토리텔링’이 그대로 인식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교수는 이순신의 부친이 비록 벼슬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 기반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순신의 모친과 부인은 모두 지방관의 딸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음을 볼 때 외가와 처가 역시 사회경제적 기반이 있었던 집안으로 몰락한 집안으로 볼 수 없고 매우 부유한 편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 기반을 갖춘 양반 사대부 가문으로 보는 편이 합당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민웅 교수는 명량해전의 철쇄설치설은 문헌 자료상으로만 보더라도 역사적 사실이 아닌 ‘설화’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지적하고 더 이상의 논쟁이 필요없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철쇄설’은 18세기 중반에 나온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기록됐으나 이는 저자가 지방을 돌며 설화를 채록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료로 분석했다. 전후의 임진왜란 기사가 부정확할 뿐 아니라 설화적인 뉘앙스를 쉽게 느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적 사실과 설화가 혼동된 것인데, 아직까지 잘못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당파전은 깨뜨리가 아니라 포격전”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임원빈 소장 ⓒ 온양신문

□ 명량해전 승리요인과 당파전술 ─ 임원빈(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소장 

임원빈 소장은 명량해전의 승리요인 중 하나로 판옥선의 막강한 전투력을 꼽았다. 특히 판옥선에는 대형 화약무기인 천자, 지자, 현자 등의 총통이 설치됐는데 총통은 임진왜란 당시 첨단 무기였다. 명량해전에 나선 조선함선 13척은 단 한 척도 격파되지 않은 반면 조선함대를 에워싸고 있던 일본함선 31척은 모조리 격파됐다. 이 사실은 판옥선이 지닌 구조적 우월성과 막강한 전투력을 상징적으로 보여는 것으로 그 막강한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승리요인으로는 이순신의 탁월한 병법과 리더십을 꼽았다. 이순신은 조선수군이 명량의 좁은 물목 밖 넓은 곳에 위치해 13척 모두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포진한 반면, 일본수군은 명량의 좁은 물목 때문에 5~6열 종대로 진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비록 전체 함선의 숫자에서는 13척 대 133척으로 열세였지만 해전이 벌어지는 구체적인 전투국면에서는 13척 대 5~6척이어서 우세한 상황을 조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어 이순신의 리더십을 꼽기도 했는데 명량해전에 나타난 가장 인상적인 리더십은 ‘수평소통형 리더십’과 ‘솔선수범형 리더십’ 그리고 ‘투지망지형 리더십’이었다고 설명했다. 

‘수평소통형 리더십’은 당시 엄격한 계급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부하 장수들과 함께 활을 쏘고, 밥과 술을 먹고, 이야기하고, 바둑과 장기를 두었다는 사실, ‘솔선수범형 리더십’은 이순신은 언제나 선두에 서서 싸웠다는 사실로 서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독전을 하다가 철환을 맞고 전사한 사례가 그것이며 ‘투지망지형(投之亡地形) 리더십’은 평소 군율을 매우 엄격하게 집행해 해전을 앞두고 도망가거나 식량을 훔친 자를 처형한 사례 등 을 꼽고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처형될 것이라는 절박함에 부하 장수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것이라고 봤다. 

임원빈 소장은 당파(撞破)는 천자, 지자 총통 등에서 대장군전, 장군전, 철환을 쏘아 ‘처 부순다’거나 ‘격파한다’는 의미이지 배를 부딪쳐 깨트린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거북선이든 판옥선이든 조선 수군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일본 수군의 등선백병전술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함선이 일본의 함선에 충돌한다는 것은 일본 수군에게 그들의 장기인 등선백병전을 구사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갖다 바친 꼴이 되는 것”이라며 “조선 수군은 거의 모든 해전에서 일정한 거리에서의 함포(총통) 포격전 그리고 이어진 활에 의한 공격, 화공(火攻)에 의한 분멸을 주요 전술로 사용했다면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은 이미 충돌전술이나 백병전을 벌이는 재래식 해전전술을 넘어서서 함포(총통) 포격전술을 적극적으로 구사하는 혁신된 수군이었다”고 주장했다. 

“정원 148명, 포는 2층에 설치” 

문화재전문위원 정진술 위원 ⓒ 온양신문

□ 거북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 ─ 문화재전문위원 정진술 위원 

문화재전문위원인 정진술 위원은 한마디로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라 장갑선이라고 해야 옳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정 위원은 “임란기 거북선에 대해서는 이순신의 장계(狀啓)와 그의 조카 이분(李芬)이 저술한 이순신 행록(行錄)에 나타나는 몇줄의 기록이 거의 전부”라면서 “그런데 이 정도의 기록만으로는 임란기 거북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귀선도설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정 위원은 거북선의 인원 구성에 대해 “임란기 혹은 조선 후기 거북선에 대한 연구는 당시 거북선 승조원의 직무에 대한 이해가 전제돼야 한다. 이순신의 장계에 나타나지 않는 임란기 거북선 승조원의 직무와 정원은 조선 후기의 자료에서 파악될 수 있다.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18세기에 이르러 비로소 거북선 승조원의 직무가 체계적으로 정비되고 정원도 148명으로 책정됐다”고 밝혔다. 

포 설치 위치에 대해서는 “임진년 해전에서 거북선의 사상자 통계를 보면 노를 젓는 격군의 사상자가 23명으로 그 피해가 상당히 컸음이 드러난다”면서 이로 미루어 방패를 뚫고 적군이 들어올 수 있는 구멍이 있었고, 그 구멍은 포를 발사하는 구멍으로 판단하는 것이 순리적인 추론이라고 주장하고 “이상의 검토 결과로 임란기 거북선은 2층에서 노를 젓고 포를 쏘며, 3층에서 활을 쏘았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했다. 

정 위원은 또 거북선이 세계최초의 철갑선이었다는 말에 대해 1929년에 편찬된 ‘The Encyclopaedia Britanica’나 1957년에 미국 해군 대령 해거만(George M. Hagerman)이 ‘Proceedings’라는 잡지에 소개된 글, 같은 책 1967년 판에 같은 내용이 다시 게재돼 세계최초의 철갑선으로서 거북선이 널리 소개됐다고 주장하고 철갑선의 정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람마다 의견이 달라지겠지만, 사실 진정한 철갑선은 19세기 중엽에 유럽과 미국에서 등장했다고 밝혔다. 

따라서 정 위원은 “우리가 세계사적인 시각으로 군함의 역사를 바라보았을 때, 16세기의 동양에서 목선에 약간의 철판을 가미한 것을 철갑선이라고 볼 수는 없다”면서 “그러므로 필자는 거북선의 철갑선 주장에 대해서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자살설·은둔설은 장군에 대한 모독” 

연기군교육지원청 홍순승 장학관 ⓒ 온양신문

□ 전사설과 자살설·은둔설 ─ 홍순승(연기교육지원청 장학관) 

홍순승 교육장은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설은 전사설, 자살설, 은둔설로 대별된다”고 말하고 “전사설은 이순신이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 국민들이 알고 있는 보편적인 정설”이라고 주장했다. 

홍 교육장은 “그러나 계획적인 전사, 즉 스스로 적진에 뛰어들어 죽었다거나(자살설), 전사하지 않고 죽음을 위장, 숨어살다 천수(天壽)를 누리고 죽었다는 설도 있다(은둔설)”며 “일부 작가들과 TV방송 드라마에 의해 왜곡된 사설(邪說)이 역사적 사실인 것처럼 혹세무민하는 바람에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 학계와 연구자들의 무능과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홍 교육장은 여러가지 논란에 대해 먼저 전사설을 임증하는 사례로 순국 상황과 장례 과정, 이순신장군의 사생관(死生觀)을 제시하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만이 죽음에서 제외될 특별한 이유가 없고 ▲장례기간이 84일이나 걸리는 등 그의 장례는 정상적으로 치러졌으며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죽게 되면 죽을 뿐’이라는 사생관을 살펴볼 때 죽음을 왜곡할 의도는 엿보이지 않는다며 전사설을 강조했다. 

이외에 자살설로는 ‘면주(免胄) 자살설’, ‘당쟁 관련설’ 등이 있으나 무리한 설정이며 은둔설 또한 이순신의 죽음을 확인한 사람이 30여명이나 되고, 당시 ‘경국대전’의 상장(喪葬)조에 ‘4품 이상의 관리는 3월장(三月而葬)을 치른다’는 규정에 의해정1품 이순신의 장례는 법도대로 죽은 달(11월)을 빼고 3월, 즉 후년 2월에 치른 사실 등을 거론하며 사실이 아니라고 일축했다. 

홍 교육장은 “자살설과 은둔설은 둘 다 충분한 설득력을 얻기에는 이론적인 근거 제시나 실증적인 자료의 뒷받침이 미흡했다”면서 “이순신이 죽은 지 4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민족사의 유일무이한 성웅의 죽음을 가지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비약적인 상상이나 구구한 억측으로 자살이니 은둔이니 하는 것은 아무런 소득이 없고 그의 값진 죽음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 콕 짚어 다시보기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임원빈 소장 ⓒ 온양신문

임원빈 소장이 밝인 이순신장군의 리더십은 세 가지가 있다. 바로 명량해전에 ‘수평소통형 리더십’과 ‘솔선수범형 리더십’ 그리고 ‘투지망지형 리더십’이다. 

▲‘수평소통형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당시는 엄격한 계급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은 부하 장수들과 함께 활을 쏘고, 밥과 술을 먹고, 이야기하고, 바둑과 장기를 두곤 했다. 그러면서 부하장수들에게 아주 상세하게 명량의 지형적 이점을 활용한 작전의 개요를 설명해 그들의 이해를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솔선수범형 리더십’으로는 이순신 장군은 언제나 선두에 섰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즉 사천해전에서 함선의 갑판 위에서 사수들과 함께 활을 쏘다가 어깨에 철환을 맞기도 했고,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독전을 하다가 철환을 맞고 전사했다. 즉, 이순신 장군은 ‘돌격 앞으로’ 형(形)의 리더가 아니라 ‘나를 따르라’형(形) 리더, 이른바 ‘솔선수범형 리더’였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투지망지형(投之亡地形) 리더십’은 위의 두 리더십과는 다른 면모가 나타난다. 평소 이순신 장군은 군율을 매우 엄격하게 집행했다. 해전을 앞두고 집으로 도망간 부하, 식량을 훔친 자, 명량해전 직전 일본군이 쳐들어왔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백성 등을 처형한 사례 등 중대한 군율을 어긴 자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극형으로 다스렸다. 

특히 명량해전에서는 김응함과 안위의 필사적인 고군분투가 큰 힘을 발휘했는데 ‘전공을 세우지 못하면 처형될 것’이라는 절박함에 이들 장수는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을 것이라며 평소 이순신의 엄격한 군율 적용이 장수들에게 필사즉생(必死卽生)의 힘을 부여해주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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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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