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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해전 - 엔하위키미러" 중 "3. 결과"와 "4. 전과" 중 일부만 가져왔습니다.
* "명량해전 - 엔하위키미러" 중 "3. 결과"와 "4. 전과" 중 일부만 가져왔습니다.
명량해전의 결과
조선 수군의 후퇴
비록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조선 수군도 보급 문제와 전력의 열세 때문에 서해로 물러나야만 했다. 조선 수군은 지속적으로 후퇴하여 9월 21일에는 고군산도(선유도)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명량 해전의 승첩을 알리는 장계를 써서 27일 조정으로 올려보냈다. 이에 따라 일본군도 서해로 북상하여 이 과정에서 간양록을 남긴 강항이 일본군에게 잡혔고, 일부 왜장이 배로 전북 부안까지 다다랐음을 기록에 남겼다.[16] 즉 엄밀히 말해 일본군이 서해로 진입하는 데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목표를 놓고 보았을 때 일본 수군은 서해안으로 세력을 확장하거나 서해안에 상륙하여 육군과의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다. 당초 일본군의 목표였던 이순신과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을 격퇴하는 위업을 이루면서 멀쩡하게 남아 있었고, 이 둘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일본 수군은 서해안으로의 실질적인 진출 기대를 접어야만 했던 것이다.
일본 함대는 명량에서 '20% 이상'이 손실되었고, 이는 전투력 측면에서 실질적으로 '전멸'에 가까운 치명적인 상황이다. 게다가 이순신 함대는 손실이 전혀 없고 오히려 승전으로 자신감을 얻었으며, 후퇴하기는 했으나 충분히 요격전을 벌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후퇴라기 보다는 차라리 기동방어를 펼칠 공간을 마련한 것에 가깝다.
더 이상 서해로 북상한다면 다시 이순신 함대가 공격해왔을 때 그나마 남은 일본 함대 전력 조차도 문자 그대로 궤멸당할 것은 자명하다. 명량의 승리가 지형의 영향이 크다고는 판단되지만, 서해 역시 해안선이 복잡하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서 요격전을 펼치기에 적당한 시기를 충분히 잡을 수 있다. 그리고 전력이 최소 70% 정도로 떨어진 상황에서, 이전에 이미 100%의 전력을 동원하고도 이기지 못한 적과 싸워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발상은 설사 일본 장수들이 돌대가리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한려수도 구경을 하고 돌아간 걸로 만족한 것이 당시 상황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다.
일본 수군이 육군과의 공동 작전을 펴기 위해서는 최소한 수군이 독립적으로 금강 하구, 가능하다면 한강 하구까지 진출했어야 했는데 이것에 실패하였으므로 사실상 일본 수군은 서해안으로 진출하지 못한 것과 별로 다를 게 없는 결과였다.
또한 이때의 전투 결과로 숨어있던 수군 장수들이 병력과 전선들을 이끌고 다시 이순신과 합류한다. 칠천량 해전 이전만큼의 군세를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조선 수군의 부활을 알린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임진년의 침공이 한산도 대첩으로 막힌 것과 마찬가지로, 정유년의 일본군도 명량 해전으로 인해서 수륙병진 작전에 발목이 잡혔다.
반전된 전황
일본에서는 명량 해전이 전쟁의 전체적인 국면에 영향을 주지 못한 국지적인 전투라고 주장한다. 일본 수군이 서해에 진입했고 이순신이 이를 피해 북쪽으로 퇴각했으므로 명량 해전은 전술적인 작은 패배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9월부터 시작되는 일본군의 후퇴 이유도 단순히 월동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 항목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일본군은 한양까지 치고 올라가겠다는 당초의 작전계획을 이 패배로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또한 일본군이 물러난 것도 한겨울에 계속 밀려가는 양상이었음이 조선과 일본 양측의 개인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실제로 이 시기의 조선 조정은 적이 직산까지 다다랐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고, 한양의 주민들은 모조리 피난을 떠난 상황이었다. 일본 측 종군승이던 케이넨의 일기에도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거나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는 말이 나온다. 일본군이 실질적으로 한양을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9월 10일 안성을 거쳐 죽산까지 북상했던 일본군은 명량해전 직전에 돌연 남쪽으로 철수하는데, 케이넨의 일기에 의하면 이는 '항구'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즉 당시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보급 계획이 명량해전으로 박살난 것이다.
이런 걸 보면 명량 해전의 진정한 전략적 의미는 왜군의 한양 점령을 막았다는 것 보다는, 아예 일본군이 삼남을 지배하겠다는 기본 전략 자체를 무산시켜버린 좀 더 근원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일본군의 입장이 단순히 월동 차원에서 철수할 정도로 여유로운 것이었다면, 일본군은 굳이 한겨울에 고생해가면서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 게다가 국지적인 전투라기에는 일본 수군의 피해 규모가 상당히 큰 것도 사실이다. 전쟁은 전황에 일정한 영향을 끼칠 때 비로소 전략적 목표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일본 수군은 전략적 목표가 아무 것도 없다.
애초에, 명량해전에서 이순신과 조선수군을 끝장내고 충청도에 상륙했으면 임진왜란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현실적으로 조선 전체를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최소한 명나라와의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순신을 처치하지도 못하고, 조선 수군을 격파하지도 못하고, 서해안에 진출하지도 못한 명량 해전은 전술적인 측면과 전략적인 측면 모두에서 완벽한 일본군의 패배였다.
전과
내 배에서는 순천감목관 김탁과 본영의 종 계생이 총알에 맞아 죽었다. 박영남, 봉학과 강진현감 이극신도 총알에 맞았으나 중상을 입지는 않았다.
─ 이순신, 『정유일기』 9월 18일
놀랍게도 난중일기에 조선 수군의 피해는 대장선에서 사망자 2명, 부상자 3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것이 전체 피해자인지, 아니면 대장선의 피해자만을 기록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대장선만의 피해로 보더라도 대단한 전과인데, 전투 중반까지 대장선 혼자서 두세 시간을 싸웠는데도 이런 결과라면 일방적인 학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외에도 실제로 접전이 벌어진 안위의 배에서는 사상자가 다수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난중일기에는 격군 5~6명이 물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울돌목의 거센 물살로 보아 사실상 사망.(...)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이날 적선 30척을 부수었다고 하였고, 조정에 올린 장계에서는 전투 전반부에 20척, 후반부에 11척을 각각 격침시켰다고 썼다. 일반적으로는 일본 수군의 피해는 이렇게 단순히 31척으로 알려져 있다. 실록에도 '적선 31척을 격침하고 수급 8개를 취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명확하게 확인된 전과만 적은 것이고, 다른 사료들을 종합해보면 실제 전과는 더 컸을 가능성이 크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패배하여 도망치는 적병의 뒤를 쫒아 목을 베어 죽인 것이 수백여 급이며, 무사히 탈출한 적선이 겨우 10여척 뿐이었고, 아군의 배는 모두 무사하였다'고 적고 있다. 연려실기술에서도 '적의 배는 겨우 10여척이 도망쳤을 뿐이고 우리 배는 모두 무탈하였다'라고 기록했다. 10여척만이 도망친 것은 다소 과장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으나 그만큼 일본측의 피해가 컸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이는 당시 일본 수군의 피해 상황에 대하여, 일본 군에게 사로잡혀 명량해전까지 종군한 조선인 포로의 증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진해(鎭海)에 사는 정병(正兵) 전풍상(全風上)이 왜적의 진중에서 도망해 와서 아뢰었다. 저는 지난 임진년 8월 산골로 피란했다가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장 산도(山道)의 진중에 소속되어 안골포(安骨浦)에 한달 남짓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산도를 따라 바다를 건너 일본의 국도(國都)에서 동쪽으로 하룻길인 진역군리(鎭域軍里)에 도착했는데 진역군리는 바로 산도가 다스리는 고을이었습니다. 또 산도에게 딸린 부장(副將) 우다능기(尤多凌其)의 종이 되어 복역하면서 이따금 문서(文書)를 선소(船所)에 송달하기도 했는데 대체로 우다능기는 바로 산도가 관할하는 전선(戰船)의 장수였습니다. 선척의 숫자는 1백 20여 척으로 지난해 6월 산도가 재차 자기 소속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부산포(釜山浦)에 정박하였고, 7월 사이에는 한산도(閑山島)에서 접전한 뒤에 하동(河東) 앞 포구에서 하륙(下陸)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구례(求禮) 지방을 거쳐 남원(南原)을 함락시키고 전주(全州)에 도착했다가 즉시 하동으로 돌아왔는데 대개 갔다가 돌아온 기간이 20여 일이었습니다. 또 하동에서 열흘 간 머문 뒤에 산도(山道)가 선척을 다 거느리고 수로(水路)를 따라 순천(順天)·흥양(興陽)을 거쳐 우수영(右水營) 앞바다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통제사(統制使)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그리하여 무안(務安) 지방으로 후퇴하여 정박하면서 날마다 분탕질을 한 뒤에 다시 순천으로 들어와서 왜교(倭橋)에다 성을 쌓고 주난궁(走難宮)에게 지키도록 한 다음 산도는 즉시 일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우다능기를 따라 광양(光陽) 지방의 장도(獐島)에 옮겨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또 우다능기가 일본으로 다시 들어간다는 기별을 듣고 고향 생각을 이기지 못하여 밤을 타서 도망와 현감(縣監)에게 자수(自首)해 온 것입니다.”
ㅡ 『선조실록』 97권. 선조 31년. 명 만력 26년 (1598년) 2월 11일 -
선조 실록 선조 31년 2월 11일의 기사에는 정유년에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이듬해 탈출한 전풍상의 증언이 실려 있다. 이 증언에 의하면 전풍상은 산도라는 일본 무장의 부장인 우다능기의 종으로 생활했는데, 산도는 정유년 6월 적선 120여척을 이끌고 부산에 상륙하여 칠천량 해전과 남원성 전투에 참전했고, 9월에는 휘하 전선들을 이끌고 명량해전에 참가했다. 여기서 전풍상은 '거기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반이 산도라는 무장의 부하 중 반인지, 전체 일본군의 반인지는 불확실하다. 산도의 배가 120여척이라고 해도 이것은 전투선만이 아니라 사후선을 포함한 비전투선을 합한 수치일 수도 있다. 산도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실록의 해당 기사만으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명량에서 죽지는 않았으니 구루지마 미치후사일 리는 없고, 일본의 한 지방을 다스리는 영주로서 120척의 함대를 이끌었으니 구루지마 미치후사 휘하의 장수일 리도 없다.
강항의 간양록에도 칠천량 해전과 명량해전을 직접 목격한 조선인 포로의 기록이 나온다. 그 포로가 증언하기를, '왜장 여럿이 서해를 따라 올라가 우수영으로 향했는데, 이순신이 전선 10여척을 이끌고 용맹하게 싸워 승리했다. 왜장 내도수[17]가 죽고, 민부대부는 바다에 떨어져 간신히 목숨을 구했으며, 그 나머지 휘하 장수들도 죽은 사람이 여럿이었다'라고 했다. 강항은 정유년에 쳐들어온 왜장들의 명단을 보면 진도까지 왔다가 배에서 사망한 자가 있다고 했으니, 그의 증언으로도 구루지마 휘하 병력 이외에도 일본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일본군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을 살펴보자.
선수의 배들은 적선에 노 젓는 사공이 너무 많다. 그 중에 구루지마 장군도 앉은 채로 전사해 있다. 그밖에 선수(船手)[18] 가로(家老)[19]의 과반수가 사망했다. 모리 장군은 세키부네(関船)에서 경비선으로 옮겨 탔다. (적은) 경비선에 열십자의 낫을 걸고 활과 철포를 마구 쏘아대며 먼 바다로 몰았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명의 도도장군이 이끄는 배로 적선을 쫒아내고 목숨을 구했다. ...(생략)... 도도장군도 손에 두 군데 부상당했다.
ㅡ 『고산공실록(高山公實錄)』
일본군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의 기록인 고산공실록도 명량 당시의 상황에 대하여 선수와 가로의 과반수가 사망했다고 적고 있다. 참고로 히데요시를 대리하는 군감인 모리 다카마사까지 물에 빠졌다가 구출되었다는 것을 보면 후방에서 보호받아야 할 인물들까지 위험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감이 선봉에 나서는 군대도 있는가? 임란 시기 일본의 군감은 정치 장교가 아니다(...).
따라서 격침을 확실하게 확인한 적선의 수만 31척이고, 명량해전의 패배로 인한 일본군의 전체 손실은 그 이상으로 컸다고 봐야 한다. 완침은 면했다고 하더라도 승선 인원이 대거 몰살 당하거나 큰 부상을 당하여 전투 불능에 빠진 선박이 많았을 것이다. 명량 이후 조선 수군이 전력을 재건하는 동안 일본 수군이 정면으로 조선 수군에 대응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따져보면 더욱 그러하다.
근래 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치계하길, "한산도에서 패배한 이래로 병선과 무기가 흩어져서 거의 사라졌는데, 신이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김억추 등과 전선 13척, 초탐선 32척을 수습하여 해남현의 바닷길에서 길목을 지키고 있자니 전선 130여 척이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왔습니다. 신이 수사 김억추, 조방장 배흥립, 거제현령 안위 등을 거느리고 각기 병선을 정돈하여 진도 벽파정 앞바다에서 적과 교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힘껏 싸웠는데, 대포로 적선 20여 척을 깨부수고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아 적들이 바닷속으로 가라앉았고 머리를 벤 것도 8급이었습니다. 적선 가운데 큰 배 1척이 있어서 우보(羽葆)와 홍기(紅旗)를 세우고 푸른 비단 장막을 둘렀으며, 적들을 지휘하여 아군 전선을 에워싸므로 녹도만호 송여종과 영등포만호 정응두가 잇따라 와서 힘껏 싸워 또 적선 11척을 격파하자 적이 크게 꺾이어 남은 적들이 멀리 물러났습니다. 진중의 항왜가 홍기를 단 적선을 가리켜 안골포의 적장 마다시라고 하였습니다. 획득한 적의 물건은 화문의(畫文衣), 금의(錦衣), 칠함(漆函), 칠목기(漆木器), 장창(長槍) 두 자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소방(小邦)의 수군이 다행히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을 조금 꺾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적선이 서해에는 진입하지 못할 것입니다. ㅡ 『선조실록』 94권, 30년 11월 10일 5번째 기사
선조가 명나라 측에 명량해전의 소식을 알릴 때의 기사이다. 선조의 작태가 잘 드러난다. 분명히 명량해전을 두고 '작은 승리'를 거두어서 적의 예봉이 '조금' 꺾였다고 하면서도, 뒤이어서는 적선이 서해에 진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실히 말하는, 앞뒤가 안 맞는 언행을 보여준다. 뭐, 이 발언 자체는 꼴에 예의 차린다고 겸양하는 걸로도 볼 수 있지만,자기 공도 아닌데 뭘 멋대로 겸양하냐 이 시기 선조는 명의 장수들을 찾아다니며 이순신의 명량해전의 전과를 폄하하고 다니기 바빴다. 오히려 명의 경리 양호[20] 가 선조를 타이르고 이순신은 뛰어난 장수라고 이야기 하며, 선조에게 명량해전 이듬해까지 이순신의 품계를 올려주라고 끈질기게 압박하여, 이전의 정2품 정헌대부의 품계를 되찾게 도와주기도 한다.
주석
[2] 비전투인원 및 사후선 포함 약 2200명 가량.
[16]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부하인 노부시치로라고 적었는데,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
주석
[2] 비전투인원 및 사후선 포함 약 2200명 가량.
[16]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부하인 노부시치로라고 적었는데, 누구인지 명확하게 확인되지는 않는다.
[17]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말한다.
[18] 주사, 즉 수군을 말한다. 이 수군이 격군을 포함한 것인지, 아니면 갑판의 아시가루와 무사 등의 전투원만을 일컫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선조 실록에 실린, 일본 수군에게 잡혀 명량해전에 참전한 조선인 포로의 "거기(명량 해협)서 통제사와 접전을 하여 왜적의 반이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는 증언과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19] 일본에서는 봉건체제에서 다이묘나 소묘의 중신(중요한 관직에 있는 신하)을 가로라 칭한다.
[20] 이 사람은 명량 해전 이후 이순신에게 백금과 붉은 비단을 보내어 표창하며 "배에다 괘홍(붉은 비단을 내걸어 축하한다는 뜻)하는 예식을 올리고 싶으나 길이 멀어 가지 못한다" 며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21] 실록에는 정응두로 오기
[22] 실록에는 영등포만호로 오기
[23] 노를 젓는 격꾼 및 사후선 및 탐망선의 인원을 포함하면 대략 2000여명 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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