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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량해전 - 엔하위키미러"에서 "
5. 분석"의 일부분만 가져왔습니다.

분석 : 명량해전 승리 요인

5.1. 이순신의 리더십 : 군율과 신뢰의 승리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리라!(小有違令 卽當軍律)
─ 명량 해전을 앞두고

그야말로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한 전투이며, 이순신이 무엇 때문에 엄격한 군율을 강조했는지 보여주는 전투였다.

위에서도 나왔지만, 12척의 전함을 이끌던 장수들은 이순신이 타고 있던 대장선을 버려두고 후방으로 물러나 있었다. 이들이 나중에 갑작스럽게 돌격하면서 전황이 확 바뀌었던 것도 일본 수군의 퇴각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특히 전투 개시 이후에도 쫄아서 움직이지 않던 안위와 김응함이 단지 초요기가 올라왔다는 이유로 죽을 수도 있는 자리로 나아간 이유는 명백하다. 일본군과 싸우면 살아남을 수도 있지만, 통상대감을 거스르면 살아남는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다.(...) 즉 평소의 엄격, 엄정한 신상필벌에 따른 군기의 시행이 위급한 때에 얼마나 적절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명량의 전훈을 엄격한 군율로만 보고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이순신 본인에 대한 신뢰감이야말로 그가 실질적으로 부하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요인이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순신이 평소 권위를 이용해서 사익을 챙기거나,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그가 이처럼 도박과도 같은 무모한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25] 또한 원균과 대비되는 존재로서 이순신이 담지하고 있던 희망이라는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고위 지휘관이 탈영할 정도로 사기가 바닥을 친 조선 수군을 단결시키고, 마침내 그들을 기적으로 이끈 이순신의 리더십을 단지 엄격한 군율만으로 보는 것은 분명한 오독이다. 유명한 한신의 배수진도 그저 아군을 사지에 몰아넣은 것이 아니라, 동시에 아군의 별동대가 적의 배후에서 적의 본진을 빈집털이할 것이라는 복안과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였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은 필사(必死)에, 몸은 필생(必生)에 둔다는 것은 용병의 기본이며, 이순신은 그가 치루었던 모든 전투에서 그 누구보다도 이 전훈을 뚜렷이 실천한 전략가였다.

그렇다면 명량에서 이순신은 무엇을 가지고 몸을 필생지지(必生之地)에 두었는가? 다시 말해 이 승리에 대한 이순신의 실재적, 물리적 복안은 무엇이었던가?

5.2. 판옥선, 화기, 지리의 압도적 시너지 

워낙 사기적인 승리라서 다양한 설이 많지만, 그냥 조선 수군의 우위가 환상적이었다고 요약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위에서 언급한 다카야마공 실록에 따르면 일본군이 전투에 투입한 함선은 해협의 크기 때문인지 대부분 세키부네(80)나 그 이하의 고바야 급(30)이었는데, 이에 반해 조선 수군의 기본 전함인 판옥선(130)은 해상의 성이라 불리던 아타케부네(290)와 비슷한 크기였으니 조선군이 가뜩이나 격류인 울돌목에서 질적 우위를 담보하고 전투를 펼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판옥선의 구조 자체가 철저하게 한 가지 기능, 즉 연안에서 화포를 쏘기 위한 장벽으로 사용하려는 목적만을 위해서 설계된 구조였다. 애당초 물목에서 통행세를 걷기 위해 치고 빠지는 전략을 목적으로 설계된 일본군의 세키부네보다 몇 배는 더 튼튼할 수밖에 없다.[26] 즉 일본군이 자신들의 함선보다 월등히 큰 조선의 판옥선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난데없이 바다 위에서 공성전을 치러야만 했던 것이다.

더불어 천자총통과 승자총통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조선의 화포들은 매우 강력한 무기였다. 천자총통[27]은 격목 위에 백여 개의 조란환(산탄용 쇠구슬)을 넣고 다수의 적들에게 뿌려대거나, 혹은 대장군전을 쏴서 적선을 격침시키는 용도였다. 비뢰포를 사면 대함 미사일을 드려요! 당시부터 이미 저평가되고 있던 승자총통마저도 장대에 달아서 조란환을 쏘는 구조 덕분에 방어전에서 아군에게로 다가오는 적들에게 상당한 성능을 발휘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화포들은 접현이 이루어진 초근접전에서는 그 활용이 제약되었을 것이나[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미터 밖에서 다가오는 적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기 충분했다.

더불어 결정적으로 울돌목은 해류가 바뀔 때 갈매기도 앉지 못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물살이 거센 곳이라는 사실도 작용한다. 이런 곳에다 세키부네급 이하의 배를 몰아넣어 보았지만 자신들의 속도를 이기지 못해 떠내려가면서 자기들끼리 부딪쳐서 타격을 입거나, 튼튼한 판옥선에 들이박아 자기가 박살나거나, 혹은 조선군 화포의 좋은 표적이 되거나 할 따름이다. 운 좋게 판옥선에 접현했다 할지라도 그들을 기다리는 건 머리 위에서 빗발치듯 쏟아붓는 화살 따위의 투사무기다(...). 그럼에도 안위의 배에 일본군 전함이 세 척이나 달라붙어서는 뱃전을 아득바득 개미떼처럼 기어올라 백병전을 치렀다는 사실을 보면 그 근성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어야 할지도... 게다가 전투 후반에는 화포와 역물살로 일순간에 역습을 당했다.

크기상 판옥선의 대항마라고 할 만한 아타케부네는 애당초 주로 대장선으로 사용되었지 전력상으로 의미를 가질만큼 수효가 충분하지는 않았으며, 다카야마공 실록에는 좁은 해협을 보고 아예 편성하지 않은 것으로 나온다. 다만 이순신이 장계에서 붉은 깃발과 푸른 휘장을 두른 대선을 격파했다고 하고, 총대장인 도도 다카도라가 화살에 맞은 것으로 보아 전투 후반에 적진을 헤집던 판옥선들이 후방에 있던 어립선에 당도하여 직접적으로 교전에 휘말리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는 있다. 이 경우에는 운신이 어려운 좁은 지형[29]에서 한두 척만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으니 대함 미사일 격인 대장군전의 효용성을 검증하기 딱 좋은 표적이었을 것이다. 

더불어 조선 수군이 사용하는 대형 총통들의 운용기록을 보면 지상보다 사거리가 매우 짧은 편이었다. 거꾸로 생각해보면 일본군의 사격무기도 해상에서는 본래 스펙보다 훨씬 약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사람이 들고 쏘는 조총만 해도 물살로 인한 흔들림으로 조준이 어려워져 유효 사거리가 줄어들었을 터인데, 아예 천장에 매달아서 쐈다는 화포는 당연히. 특히 일본군의 조총은 화승총이었기 때문에 물살이 거세면 화승이 젖기도하고 긴 격발시간동안 롤링과 요잉같은 배 자체의 움직임때문에 유효한 조준이 몹시 힘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포좌로 어느정도 고정된 조선군의 화포는 이에 반해 배 자체의 움직임에만 맞춰 사격을 가할 수 있었던 반면 일본군은 그 당대 해군들이 쓰던 접근전 이후 나포를 썼다고 볼 수 있다. 반면 화포가 아무리 사거리가 짧아도 100미터 200미터에서는 유효한 타격이 나오는데 이 거리는 지상의 조총도 맞히기 힘들고 해상에선 사실상 안전거리나 다름 없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현대인의 생각보다 거리비가 축소되었을뿐 원거리에서 일본군이 화포에 썰린뒤 성채같은 판옥선에서 미니공성전을 겪다가 털린게 맞다.
 
5.3. 백성들의 도움

명량 해전의 전황을 상세히 기록한 오익창의 사호집(沙湖集)에 의하면, 이순신이 왜군과 싸울 때 사대부들의 솜이불 백여 채를 걷어다가 물에 담가 적신 뒤 12척 배에 걸었더니 왜군의 조총이 그것을 뚫지 못했다고 한다. 왠지 조선 후기에 개발되는 면제배갑이 떠오르는 장면이긴 한데, 솜이불을 뱃전에 걸어봐야 어차피 조총에서 발사되는 탄환은 두꺼운 소나무 판재로 제작되는 판옥선 선체에 전혀 타격을 주지 못한다.[30] 따라서 3층 상갑판에서 아래로 이불을 걸었을 리는 만무하고, 그렇다고 이걸 실용적으로 써먹자니 3층 상갑판 위로 걸쳐서 방패판 대용으로 써야 승선 인원을 보호하는 구실로라도 써먹을 만 할텐데, 이불을 3층 상갑판 위에 주렁주렁 건 상태에서 시야 확보 및 난중일기에서 묘사되는 치열한 근접전을 어떻게 치렀는지가 문제고, 게다가 현장 지휘관인 이순신의 기록에는 이러한 기록이 전혀 없어서 의구심을 갖게 한다.[31]

또한 장기전을 예상해서인지 동아(박의 일종)를 배에 가득 싣고 군사들이 목마를 때마다 먹였더니 갈증이 해소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건 또 이순신의 어릴 적 일화가 떠오르는 장면(...). 즉 조선 수군은 오랫동안 상대의 화력을 견디며 싸울 준비를 끝낸 상황이었다.

5.4. 명량철쇄설  (생략)
5.5. 거북선의 등장?  (생략)

5.6. 결론 

지휘관의 역량이 승패에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준 전투. 

당시 조선 수군이 명량 해전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장 압도적인 화포와 난공불락의 판옥선을 대량으로 보유했으면서도 참패한 칠천량 해전의 선례가 있다. 패잔병들로 이루어진 13척의 배와 도망가고 싶어서 안달하는 중간 지휘관들, 물자 부족에 시달리는 함대, 모함을 당해 건강을 해치고 모친상까지 당했으며 임금으로부터는 노골적인 박대를 받는 총지휘관, 한 척의 배도 보내주지 않는 조정, 그리고 대승을 거둬 사기가 하늘을 찌르며 수백 척의 배를 끌고 오는 적군까지. 이길 수 없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뒤집어서 승리를 거둔 것은 오로지 이순신의 역량 덕분이었다. 막강한 판옥선도 강력한 화력도 결국 제대로 된 지휘관이 있었기에 위력을 발휘한 것이고, 부족한 물자를 긁어모으면서 싸울 준비를 갖춘 것도 이순신이며, 울돌목을 싸움터로 정하고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서 전황을 유리하게 이끈 것도 이순신이고, 겁먹은 부하들을 다그치면서 전선을 유지하며 끝까지 싸운 것도 이순신이었다.

결국 승리의 요인은 이순신 그 자체로 요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자 한 마리가 지휘하는 염소 무리가, 염소 한 마리가 지휘하는 사자 무리보다 강하다'고 하는 비유의 가장 극적인 사례.



주석

[25] 조정에서도 이미 '수군 폐지령'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칠전량에서 패배했던 수군 장수들 중에는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은둔해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경우, 부하들은 그대로 도주해도 그렇게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이순신도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비전투선들을 도주방지용으로 세워놓긴 했지만, 통상대감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시늉만 하다가 통제권을 이양받아서 퇴각하는 식으로 적당히 처리하고 도망치는 선택지도 충분히 나올만한 상황이다. 이런 결정적인 순간에, 비록 그전까지 뒤로 물러서 있었더라도 부장 두 명이 이순신을 따라서 돌격하여 분위기를 반전시켰다는건 군율 이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애초에 이순신의 군율만이 이유였다면 그냥 왜군진영으로 가서 항복하거나 애초에 합류를 안 했겠지
 
[26] 물론 세키부네가 소형 보트라고 할 정도로 작아빠진 것은 아니다. 당포 해전의 장계에서는 판옥선과 비슷한 크기의 대(大)세키부네도 확인되고 있다.
 
[27] 다만 위 난중일기 기록에서도 나오듯 실제 명량 해전에서는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이 사용되었다. 천자총통은 너무 크고 화약을 많이 잡아먹는다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난중일기 등에서는 1593년 이래로 천자총통에 대한 기록이 사라진다.
 
[28] 일본 함선들의 높이가 조선 함선(판옥선)보다 현저하게 낮으므로 접현시 지자총통과 같은 대형화포는 하향사격을 해야 하는데, 이때 대포에 장전한 발사체가 흘러내릴 개연성이 높다. 유럽에서는 하향사격(Depressed Fire)을 할 때 이중 격목을 사용해서 포탄 등 발사체를 흘러내리지 않게 했지만, 현존하는 조선시대 화약무기 관련 문헌에서 이중 격목을 사용한 직접적 증거는 확인되지 않는다. 더구나 현재 학계의 연구처럼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이 사용한 포가의 형태가 동차라고 간주한다면 초단거리 하향 사격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한다. 포가의 앞부분이 높고, 뒷부분이 낮아 17도 이하의 사각을 선택하는 것이 구조상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29] 게다가 첨저형 선박은 구조상 제자리회전이 불가능하다. 거센 물살로 주위에 소선들이 어지러이 밀집된 상황에서 이런 선박이 기동하기란 아군을 짓밟는 팀킬을 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30] 구경을 늘린 오오츠즈, 즉 대조총을 동원해도, 판옥선 선체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기엔 역부족이며 판옥선의 3층의 사부들을 보호하는 참나무 방패에 기별이라도 줘 볼 만 한 것이 당시 현실이다. 그리고 이점은 영화 명량에 충실히 반영되어, 이 영화에서 조총은 방패 틈 사이로 날아든 탄환 말고는 노 젓는 격군조차 못 죽이는 위엄(...)을 달성한다. 오죽하면 영화 내에서 총 맞아 죽은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 그런데 문제는 실제 이순신 기함의 전사자는 저것보다도 더 적었다는 것.
 
[31] 전형적인 개인 행장록 특유의 '공훈을 과장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이 외에도 여러 선비들의 행장에 임란 당시 '장군님께 이러저러한 계책을 상신했다'느니, '활을 들고 함께 적을 섬멸했다'느니 하는 식의 글이 기록된 경우가 많다. 특히 행장이라는 것은 그 행장의 주인공이 죽은 후 다른 사람이 그를 찬양하고 기리기 위해 쓰는 글이니만큼 이런 식의 과장된 기록이 남는 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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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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