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90921200433484141

이순신, 진영을 옮기면서 왜적과 싸우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2
입력시간 : 2014. 01.29. 00:00

진도군 벽파진에 있는 이충무공 대첩비
 
왜선 8척 불시에 급습해 오자 직접 선봉에 서서 추격 물리쳐
수군 재건 유리한 조건 두루 갖춘 벽파진으로 진영 옮겨 정보 수집
경상우수사 배설 새벽에 탈영, 훗날 고향서 체포돼 참형 당해
피난민들이 물심양면 힘껏 도와 
장수들에 왜적 야습 대비 명령
명량해협 필사즉생 각오 다져

전라남도가 이순신 장군이 정유재란 때 전라좌수사겸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장을 받은 진주에서부터 명량대첩을 이룬 해남우수영까지의 역사현장 길 450Km를 복원한다 한다. 조선수군 재건 길이 만들어진다 하니 늦었지만 크게 환영할 일이다. 

다시 8월20일 이후 이순신의 행적을 알아보자. 장흥 회령포에서 전선을 인수한 이순신은 회령포 포구가 좁아 해남 이진 梨津 (해남군 북평면 이진리)으로 진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이 날부터 이순신은 몸이 아파서 음식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21일 새벽 2시쯤에 이순신은 곽란(癨亂 음식이 체하여 갑자기 토하고 설사하는 급성 위장병)을 일으켰다. 그는 몸을 차게 해서 그런가 생각하여 소주를 마셔 치료하려 했다가 오히려 혼수상태에 빠졌다. 토하기를 10여 차례나 하고 밤새도록 괴로워하였다. 22일에도 이순신은 곽란이 심해져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대변도 보지 못했다. 견디다 못하여 그는 23일에는 배에서 내려 포구 밖 민가에서 쉬었다. 

24일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이순신은 일찍 괘도포에 이르러 아침 식사를 하고 정오에 어란포 앞바다에 이르렀다. 괘도포는 해남군 북평면 영전리 또는 남성리로 추정하고 있고, 어란포는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이다. 

25일에 이순신은 유언비어를 유포한 포작인(匏作人) 두 사람을 체포하여 목을 베었다. 포작인이 피난민의 소 두 마리를 훔쳐 끌고 가면서 왜적이 왔다고 헛소문을 낸 것이다. 포작인은 일정한 거처 없이 배안에서 살고 있는 부랑인인데, 이들은 날쌔고 사나워서 왜구도 두려워서 피할 정도였다. 이순신은 포작인 2명의 목을 매달아서 사람들이 널리 보도록 하였다. 이러하자 군대와 백성의 동요가 가라앉았다. 요즘 SNS에서 괴담이 퍼져 나간다. 악플로 인하여 연예인이 자살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런 유언비어는 이순신처럼 초기에 강력 대응하여야 진정된다. 

26일 늦게 탐망군관 임준영이 말을 타고 달려와서 “왜적의 배가 벌써 이진 梨津에 이르렀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일본수군이 벌써 코앞에 왔다. 

이날 선조가 임명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부임하여 왔다. 그런데 그는 전투에 필요한 격군과 전투병 그리고 무기 등을 가지고 오지 않고 몸만 달랑 왔다. 이순신은 크게 실망하였다. 

27일에도 이순신은 어란포에 머물렀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찾아왔는데 두려워서 떠는 빛이 역력하였다. 이순신이 불쑥 말하기를 “수사는 어디로 피해 갔던 것 아니냐?” 하고 캐물었다. 배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치려고만 하였다. 그런데 배설만 그랬을까. 아마도 칠천량 해전의 악몽에 시달린 대부분의 조선 수군들이 그러했으리라. 

28일 오전 6시에 왜선 8척이 불시에 습격하여 왔다. 조선 수군들은 겁을 먹고 경상우수사는 피해서 물러나려고만 하였다. 이순신은 직접 선봉에 서서 깃발을 휘두르며 추격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군사들이 움직였고 적선들이 물러갔다. 이어서 조선수군은 해남 땅끝 마을 부근인 갈두(해남군 송지면 갈두리)까지 왜적을 추격하였는데 더 쫓지는 않았다. 뒤따르던 왜군 배가 50여척이라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남 우수영 기념공원 입구(사진위)와 명량 해협과 해남 우수영 기념공원 (해남과 진도사이)

이날 저녁에 이순신은 장도로 진을 옮겼다. 왜군에게 진영이 노출되었으니 어란포는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노루섬이라고도 하는 장도는 해남 어란포와 진도 벽파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이다. 

8월29일 이른 아침에 이순신은 진도 벽파진(진도군 고군면 벽파리)으로 건너가 진을 쳤다. 벽파진은 해남과 진도를 오가는 나루터로서 진도 섬의 입구이고 명량해협의 초입이다. 이순신은 여기에서 9월14일까지 머물렀다. 이순신이 진영을 벽파진으로 옮긴 이유는 수군 재건에 유리한 조건을 두루 갖추었고, 왜군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8월30일에 이순신은 정탐꾼을 여러 곳에 내 보내어 정보를 수집하였다. 첩보는 전쟁에 이기는 데 필수 요건이다. 

이 날 경상우수사 배설은 하인을 보내어 병세가 몹시 중하므로 몸조리를 해야겠다고 이순신에게 청원하였다. 이순신은 허락하였다. 배설은 전라우수영이 있는 해남에서 육지로 올라갔다. 

9월2일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 해군사령관이 탈영을 하였으니 정말 어이가 없다. 이 일로 수군의 동요가 매우 심하였으리라. 이순신은 이렇게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했다. 결국 배설은 1599년 3월에 고향인 선산에서 도원수 권율에 의해 체포되어 참형을 당하였다. 

9월3일부터 6일까지 4일간은 북풍이 강하게 불어 배를 제어하기가 힘들었다. 바람이 잠잠해 진 뒤에는 추위가 엄습하여 사공들이 추위에 떨었다. 이 당시 수군은 군복도 변변하지 못하였고 식량도 부족하였다. 

이순신은 그를 믿고 따라온 피난민에게 식량과 의복을 요청하였다. 그 대신 목숨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피난민들은 물심양면으로 이순신을 힘껏 도왔다. 

특히 백진남, 문영개, 김성원, 변홍원, 정명렬, 김택남, 백선명, 정운희 등 해남·장흥 ·영암·흥양(고흥의 옛 지명)의 선비들이 앞장서서 후원하였다. 이들 중 '난중일기'에도 여러 번 이름이 나오는 해남출신 백진남은 삼당시인으로 잘 알려진 옥봉 백광훈의 아들이다. 고창 출신 오익창도 본진과 피난선단 사이를 왕래하면서 의곡을 전달하고 솜이불을 모아 물에 적신 다음 적의 철환을 막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이들 중에는 명량해전 당일 실전에 참여한 해상의병들도 많았다. 

이순신의 조카 정랑 이분이 쓴 ‘이충무공 행록 行錄’에는 전라도 백성들이 이순신을 도운 기록이 적혀 있고, 해남 우수영기념공원에는 전라도 사람들의 지원 흔적이 여러 군데 있다. 

9월 7일에 바람이 그치었다. 정탐군관 임중형이 와서 “적선 55척 가운데 13척이 이미 어란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며 그들의 공격이 예상된다”고 보고하였다.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에게 군령을 내려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두 번 세 번 엄하게 타일렀다. 

이순신의 예상대로 오후 4시경 왜선 13척이 쳐들어왔다.

미리 대비를 하고 있던 우리 배들은 닻을 거두고 바다로 나가 반격하였다. 그러자 적선은 뱃머리를 돌려 도망쳤다. 이순신은 먼 바다까지 쫓아가다가 바람과 물살이 모두 우리 쪽으로 향하고 또 숨어있는 적의 배도 있을까 걱정되어 더 이상 쫓지 않았다. 

벽파진으로 돌아와서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명령하였다. “오늘 밤에 반드시 왜적의 야습이 있을 것이다. 모든 장수들은 단단히 준비하라.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는 일이 있으면 군법대로 시행하리라”하였다. 

과연 밤 10시경에 왜선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순신은 즉시 앞장서서 지자포(地字砲)를 쏘며 대응하였다. 이 날 밤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은 4차례 접전하였는데, 자정이 되자 왜군이 물러갔다. 

일본수군의 공격은 벌써 두 번째이다. 전투 강도도 한층 높이고 있다. 이제 일본 수군 대규모 선단은 수륙병진책에 호응하여 조만간 조선수군을 전멸시키고 서해로 올라갈 차비를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명량해협을 통과하여야 한다. 이순신도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필사즉생의 각오를 다지고 있다.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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