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89711600432540141
이순신, 장흥 회령포에서 수군 재건식을 거행하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1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입력시간 : 2014. 01.15. 00:00
길을 걸으며 군사들 속속 합류
선조의 수군 폐지 명령에 곧바로 장계 작성 결의 다져
경상우수사로부터 8척 인수. 일장 훈시에 장수들도 숙연
패잔병 같은 군사들 골머리
9월7일에 왜군은 직산전투에서 패배하여 기세가 크게 꺾였다. 그로부터 열흘 뒤인 9월16일에 일본수군은 10대 1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참패하였다. 왜군의 서해진출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런데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의 역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는 선조의 수군 폐지 명령, 병참부족, 군사들의 공포심, 그리고 왜군과 접전 등 소위 4중고를 겪었다.
8월 3일에 이순신은 곧바로 군관 10여명과 함께 전라도로 향하였다. 직할 지역인 전라좌수영에서 수군을 재건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경상도 진주를 떠나 구례∼곡성∼옥과∼순천∼낙안∼벌교∼보성에 이르렀다. 이 길을 걸으면서 군사는 늘어나 순천에서는 60명이 되었고, 보성에 이르자 120명이 되었다. 정사준·송희립·최대성 등 그의 심복들이 속속 합류하였다.
8월15일에 이순신은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 임금의 편지를 받았다.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순신은 착잡하였다. 조속히 수군을 재건하여 나라를 구하라고 교지를 내린 지가 보름도 채 안 지났는데 이제는 수군을 폐지하라니.
선조의 편지를 읽은 이순신은 곧바로 장계를 작성하였다. 이 장계가 바로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이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왜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돌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적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순풍에 돛을 달듯이 다행한 일로 왜적은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단번에 한강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전선수가 적다하나 보잘 것 없는 신이 아직 죽지 않은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 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수군을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지금 수군을 폐지시킨다면 왜적은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단번에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라고 아뢴다. 그러면서 비록 전함이 12척에 불과하나 신명을 다하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다는 결의를 불태웠다.
8월16일에는 활 만드는 장인 지이와 태귀생, 선의, 대남 등이 모였다. 이순신 휘하에 무기 만드는 장인들이 속속 합류하였다.
8월17일 이른 새벽에 이순신은 보성을 떠나 백사정 白沙亭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군영구미 軍營仇未에 도착하니 경내에는 사람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경상우수사 배설은 이순신이 타고 갈 배를 보내지 않았다. 약속을 어긴 배설. 괘씸하다.
학계에서는 백사정은 장흥군 장흥읍 원도리이고 군영구미는 강진군 대구면 구수리로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일설에는 백사정은 보성군 회천면 벽교리에 소재한 명교 해수욕장이고 군영구미는 수군 만호진으로서 현재 보성군 회천면 전일리 군학마을이라고 한다. 필자의 생각은 후설이 맞다고 생각한다. 보성에서 장흥을 지나 강진까지 갔다가 다시 장흥 회진포로 갈 이유가 없다. 또한 배설이 배를 보내지 않았다는 것은 군영구미가 포구라는 뜻이다. 아무튼 이 문제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이 날 이순신은 장흥의 군량을 담당하는 감관과 색리를 붙들어다가 곤장을 쳤다. 이들이 군량을 모두 훔쳐서 다른 곳으로 숨겨놓았기 때문이었다. 기강이 안 잡히면 왜군과의 싸움에도 이길 수 없다.
8월18일 늦은 아침에 이순신은 장흥 땅 회령포로 갔다. 회령포는 장흥군 회진면 회진리 포구이다. 이곳에서 그는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8척의 전선을 인수 받는다. 배설은 7월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결사항전 명령을 듣지 않고 휘하 장수들과 함께 도망하였다. 배설과 그의 부하들이 도망가면서 타고 간 배가 명량해전의 주력함이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8월 19일에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하였다. 그는 여러 장수들에게 선조가 내린 교서와 유서 앞에 엎드려 절하게 하였다. 교서를 읽어 보자.
임금은 이와 같이 이르노라. 아! 나라가 의지하여 보장으로 생각해 온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하늘이 화를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고 다시 흉한 칼날이 번득이게 함으로써 마침내 우리 대군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다 없어졌으니, 이후 바닷가 여러 고을들을 그 누가 막아낼 수 있겠는가. 한산도를 이미 잃어 버렸으니 왜적들이 무엇을 꺼려하겠는가.
초미의 위급함이 조석으로 닥쳐온 상황에서 지금 당장 세워야 할 대책 은 흩어져 도망간 군사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배들을 거두어 모아 급히 요해처에 튼튼한 큰 진영을 세우는 길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도망갔던 무리들이 돌아갈 곳이 있음을 알게 될 것이고, 한참 덤벼들던 왜적들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생각하건대 그대의 명성은 일찍이 수사로 임명되던 그 날부터 크게 드러났고, 그대의 공로와 업적은 임진년(1592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 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은 마음속으로 그대를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 왔었는데, 지난번에 그대의 직책을 교체시키고 그대로 하여금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했던 것은 역시 나의 모책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며, 그 결과 오늘의 이런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된 것이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이제 짐은 그대를 상복 중에 기용하고 또 그대를 백의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전라좌수사 겸 충청·전라·경상 3도 수군통제사로 임명하는 바이니, 그대는 부임하는 날 먼저 부하들을 불러 어루만져 주고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찾아내어 단결시켜 수군 진영을 만들고 나아가 형세를 장악하여 군대의 위풍을 다시 한 번 떨치게 한다면 이미 흩어졌던 민심도 다시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적들 또한 우리 편이 방비하고 있음을 듣고 감히 방자하게 두 번 다시 들고 일어나지 못 할 것이니, 그대는 힘쓸 지어다.
수사 이하 모두 다 그대가 지휘하고 통제하되 만약 일에 임하여 규율을 어기는 자가 있거든 누구든 군법대로 처단하도록 하라. (후략)
이어서 이순신은 부하 장수들에게 일장 훈시를 하였다.
우리들이 다 같이 임금의 명령을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사태가 여기에 이르렀으니 한번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 것이냐. 오직 죽음이 있을 따름이다.
이순신의 훈시는 비장(悲壯)하다. 장수들도 숙연하였다. 그런데 경상우수사 배설은 선조의 교서와 유서에 고개 숙여 예를 다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배설은 교서와 유서에도 예를 올리지 않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 모욕적이고 오만한 태도는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적고 있다. 화 난 이순신은 배설 아래 딸린 이방과 영리를 붙들어다가 곤장을 때렸다.
아울러 이순신은 회령포 만호 민정붕이 전선에 쓸 양식을 사사로이 피난민 위덕의 등에게 넘겨주고 술과 음식을 받아먹었기에 곤장 20대를 때렸다.
이순신, 패잔병 같은 군사들을 강한 군사로 만들려니 골머리가 아프다. 장수에서 부하까지 온통 기합이 빠졌으니 이를 어떻게 하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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