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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결전 의지를 다지다. - 필사즉생 필생즉사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3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33
정탐꾼 보내 왜군 동향 파악 곧 대규모 공격 감지
입력시간 : 2014. 02.05. 00:00
충남 아산 현충사 주차장 입구에 있는 <필사즉생 필생즉사> 비석
우수영으로 전령선 보내서 피난민들 육지 대피 지시
물살 거칠고 해협 좁은 울돌목 이용 최선의 방책
조선 수군 절대 열세이나 명량전투에선 승리 자신감
꿈에서도 전투작전 구상. 진실로 나라 구하기 혼신
지피지기(知彼知己)이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이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보통 우리는 이 말을 ‘지피지기이면 백전백승’으로 알고 있다.
이순신은 해전에 임하면서 항상 이 점을 명심하고 있었다. 천시(天時)와 지리(地理)는 물론이고 언제나 적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래서 23전 23승이라는 신화를 낳았다.
9월7일에 일본수군은 두 번째 공격을 하였고 전투 강도도 한층 높였다. 일본 수군은 수륙병진책에 호응하여 대규모 함선을 해남 지역에 포진시키고 있었다. 이순신은 곧 결전의 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느꼈다.
다행히도 9월8일에 왜적은 쳐들어오지 않았다.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대책을 논의하였다. 어제 일어난 일본 수군의 공격에 심각성을 느낀 것이다. 그런데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장수들은 침묵만 지킬 따름이었다.
9월9일은 중양절(重陽節)이었다. 이 날은 국화주를 마시고 음식을 먹는 명절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제(喪祭)의 몸이었지만 이순신은 9월1일에 제주도에서 보내온 소 다섯 마리를 잡아서 녹도만호 송여종과 안골포만호 우수에게 주었다. 군사들은 모처럼 소고깃국을 먹었다. 군사들은 힘이 나고 한결 거뜬하여 졌다.
이 날 오후 늦게 왜선 두 척이 감보도에 들어와 다시 정탐을 하였다. 감보도(甘甫島)는 지금은 감부도라고 하는데 진도군 고군면 벽파리 벽파항 바로 앞에 있는 작은 섬이다. 왜군이 벽파진 바로 코앞까지 와서 정찰을 한 것이다. 이에 영등포만호 조계종이 즉각 왜선을 추격하였다. 그러자 왜군 정탐선은 급히 도망을 갔다.
9월10일부터 13일까지 4일간은 조선 수군은 별 징후 없이 지냈다.
13일 밤에 이순신은 또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난중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꿈이 범상하지 않았다. 임진년에 크게 이겼을 때의 꿈과 비슷하였다. 무슨 징조인지 잘 모르겠다.
9월14일에 이순신은 중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벽파정 맞은편에 연기가 오르기에 배를 보내서 실어왔는데 탐망군관 임준영이었다. 그가 정탐한 결과를 보고하기를 “전선 2백 여 척 가운데 55척이 먼저 어란 앞바다에 들어왔습니다”하였다.
어란 여인 조각상 -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소재
그리고 또 말하기를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해 돌아온 김중걸이 전하는 말에, ‘그는 이 달 초 6일 해남 땅 달마산으로 도망갔다가 달마산에서 왜적에 붙잡혀 묶인 채로 왜선에 실렸는데 다행히 임진년에 포로가 된 김해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왜적 대장에게 빌어서 결박을 풀고 같은 배에서 지냈는데, 한 밤중에 왜놈들이 깊이 잠들었을 때 김해 사람이 김중걸의 귀에 대고 몰래 이야기하기를 ‘조선 해군 10여척이 우리 배를 추격하여 혹은 사살하고 혹은 배를 태웠으니 극히 통분한 일이다. 각 처의 배들을 불러 모아 조선 수군을 섬멸할 것이다. 그런 후에 곧장 서울로 올라간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나 그럴 수 없는 것도 아니어서 곧 우수영으로 전령선을 보내서 피난민들에게 곧 싸움이 벌어질 것이니 빨리 육지로 올라가도록 하였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순신은 여러 곳에 정탐꾼을 보내어 왜군의 동향을 파악하였는데 군관 임준영이 첩보를 가지고 왔다.
임준영의 첩보는 두 가지이다. 첫째, 왜선이 200여척이고 그 중 55척이 이미 어란포에 정박하였다는 것이다. 9월7일에는 왜선이 55척이라고 했는데 이제는 4배나 많은 200여척이 집결하고 있고, 어란포에 55척이 정박하고 있다는 점은 일본 수군이 곧 대규모 공격을 할 것임을 감지할 수 있다.
둘째, 달마산에서 왜적에 붙잡혔다가 도망 나온 김중걸이 말한 정보이다. 김중걸은 왜군과 같이 오랫동안 지낸 김해사람에게서 들은 정보를 임준영에게 전달하였다. 이순신은 김중걸의 말을 1급 정보로 생각하였고 결전의 날이 왔음을 감지하였다. 그는 전령선을 해남 우수영으로 보내어 주변의 피난민들을 곧 육지로 올려 보내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관심을 가지는 점은 김중걸에게 정보를 준 김해사람이 누구인지 하는 점이다. 구전(口傳)에는 김해사람은 왜군에게 잡혀간 해남 처녀라는 것이다. 진도 출신 소설가 곽의진은 이런 설화를 바탕으로 소설 '민'을 지었다. 이 소설은 해남에서 왜선에 잡혀온 ‘복이’라는 처녀가 적장의 노리개 감이 되었다가 기밀을 빼낸 과정을 그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해남 출신 박승룡 옹은 일제시대에 해남에서 19년간 경찰을 한 일본인 ‘사와무라 하찌만다로(澤村八幡太郞’의 유고집 '문록경장의 역'을 인용하여 왜군이 명량해전에서 패한 사유가 어란 여인의 첩보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어란보존현창회장인 박옹은 2006년부터 어란 여인 발자취 찾기를 시작했다. 그리하여 2008년에 전남도립국악단 주최 ‘울돌목에 핀 해당화-어란' 국악뮤지컬 공연에 기여를 하였고, 2012년에는 어란 마을 뒷산 낭떠리지 여낭터에 어란 여인 비석을 세웠다.
9월 15일에 결전의 날이 다가옴을 느낀 이순신은 진영을 진도 벽파진에서 해남 우수영 앞바다로 옮겼다.
13척의 배로 수 백 척의 왜선과 벽파진의 넓은 바다에서 싸우기에는 절대 불리하였다. 이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물살이 거칠고 해협이 좁은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하여 싸우는 것이 이순신 입장에서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해남 우수영으로 진영을 옮긴 후에 이순신은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일장 연설을 한다.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있는 <충무공 이야기> 입구
병법에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살 것이고, 살려고만 하면 죽을 것이다. (必死卽生 必生卽死)“라고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족히 천명이 와도 두렵지 않다”라고 했는데 이 두 마디 말은 지금 우리를 두고 한 말이다.
그대들은 이번 전투에서 살고자 하는 생각을 품지 마시오. 장수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군졸들도 뒤를 따를 것이요. 만약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기면 군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요
이순신의 훈시는 비장하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야 이길 수 있다는 절박감이 배여 있다. 문득 영화 ‘300’에서 본 스파르타 왕의 연설 장면이 생각난다. BC 480년, 스파르타의 용사 300명은 그리스를 침공한 100만 페르시아 대군과 맞서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키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는 ‘나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와 함께 가장 많이 알려진 이순신 어록(語錄)이다. 원래 ‘필사즉생 필생즉사’는 오자병법에 있는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卽生 幸生卽死)’ 글귀를 변용한 것이다.
아울러 이순신은 조선 수군이 절대 열세이기는 하지만, 천혜의 요새지인 명량에서 싸우면 이길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은근히 내비쳤다.
이 날 밤 이순신은 또 꿈을 꾸었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서 “여차 여차 하면 크게 승리할 것이요 여차 여차 하면 패배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순신이 얼마나 노심초사하였으면 꿈에도 전투작전 구상이 나타났을 까? 이순신, 그는 진실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군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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