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honam.co.kr/read.php3?aid=1366124400412270141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3부 - 정유재란과 호남 사람들 20
육군에 합류하라는 어명 거부하고 수군 재건 지속 
입력시간 : 2013. 04.17. 00:00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 '충무공 이야기' 전시실 사진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이순신, 수군 때문에 왜군의 운신 폭 좁다는 확신
착잡한 심정 표현한 '한산도가' 보성 열선루에서도 읊어
 
8월15일에 이순신은 보성 열선루에서 선조의 유지(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를 받는다. 선전관 박천봉이 가져왔는데 8월7일에 작성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수군의 전력이 너무 약하니 권율의 육군과 합류해 전쟁에 임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는 사실상 수군을 폐지하겠다는 뜻이었다. 

선조의 유지를 읽은 이순신은 착잡하였다. 조속히 수군을 재건하여 나라를 구하라고 교지를 내린 지가 보름도 채 안 지났는데 이제는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이 되라하니. 수군 재건을 위하여 홀로 혼신을 다하고 있는 이순신을 지원하여 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공문을 보내어 실의에 빠지게 하고 있으니. 

그러면 여기에서 8월15일의 '난중일기'를 읽어 보자. 이순신은 불편한 심정을 일기에 적어 놓고 있다. 

'8.15 비가 계속 내리다가 늦게 개었다.

밥을 먹은 후 열선루에 나가 앉았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다. 그것은 8월7일에 작성된 공문이었다. 영의정(유성룡)은 경기도 지방을 순찰중이라 한다. 곧 받았다는 장계를 작성하였다. 보성의 군기를 점검하여 네 마리 말 위에 갈라 실었다.

저녁에 밝은 달이 수루 위를 비추치는 것을 보았으나 마음이 매우 편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또 다른 난중일기인 '교감본'의 기록도 읽어 보자. 일기가 다소 다르게 적혀 있다. 

'8.15 비가 계속 내리다가 늦게 개었다. 

선전관 박천봉이 유지를 가지고 왔는데 8월7일에 작성한 것이었다. 
곧바로 잘 받았다는 장계를 작성하였다. 과음해서 잠들지 못했다.'

이 두 일기를 읽으면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이순신이 선조의 유지를 잘 받았다는 장계를 작성한 것과 둘은 이순신의 마음이 편하지 않은 점이다. 


보성 열선루 한산도가 이순신 친필 

이순신은 선조의 유지를 받고 그 유명한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나이다. 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장계를 작성한다. 이는 승지 최우해가 지은 ‘충무공 이순신 행장’에 나와 있다. 

“임진년으로부터 5,6년간 왜적이 감히 호남과 충청에 돌입하지 못한 것은 우리 수군이 적의 진격로를 막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만일 수군을 전폐시킨다면 이것이야말로 적에게는 순풍에 돛을 달듯이 다행한 일로 왜적은 호남과 충청 연해를 거쳐 단번에 한강까지 도달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비록 저의 전선수가 적다하나 戰船雖寡
보잘 것 없는 신이 아직 죽지 않은 한, 微臣不死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 할 것입니다. 則敵亦不敢侮我矣”

이 장계를 쓰면서 이순신은 무척 고민하였을 것이다. 선조의 어명을 따르느냐 아니면 수군을 포기할 수 없다고 하느냐의 갈림길에서 몇 달 전에 선조에게 당했던 고초를 떠 올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선조의 유지보다는 수군 재건을 먼저 생각하였다. 수군을 포기하는 것은 왜군이 가장 바라는 것인데 어찌 수군을 폐지할 것인가. 일본 수군이 아직도 두려워하는 것은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인데 어찌 육군이 된단 말인가. 

이순신은 장계에서 수군을 포기 할 수 없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임금의 어명을 따르지 않겠다고 한 마당에 나의 길은 오로지 조속히 수군재건을 하여 국난을 극복하는 길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한편 이순신은 시름을 앓았다. 술 취하지 않고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이 되라하니 어찌 시름이 없었을까. 아군 배 12척으로 600척이 넘은 왜군과 싸워야 하니 어찌 아픈 마음이 안 생기랴.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날, 보름달이 떠 오른 밤에 이순신은 술을 많이 마시고도 잠을 못 이루었다. 


통영 한산도 수루에 걸린 한산도가

일부 학자들은 이 날 이순신이 한산도가를 읊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 제4권 (비봉출판사 발간)' 262 페이지에는 이순신이 1597년 8월15일에 읊었다고 하는 한산도가(閑山島歌) 친필 글씨가 소개되어 있다. 또한 1999년에 보성문화원이 주관이 되어 ‘이순신장군과 보성 열선루’에 대한 학술발표도 있었다. 

그러면 이 날 이순신이 읊었다는 한산도가를 살펴보자.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올라(寒山島明月夜上戍樓)
큰 칼 불끈 잡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撫大刀深愁時)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 이내 시름 더해주네.(何處一聲羌笛更添愁) 
 
정유 중추 이순신 읊음(丁酉仲秋 李舜臣 吟)

보성 열선루에서 지은 한산도가 친필 글씨가 있다니 이는 대서특필감이다. 일반적으로 한산도가는 이순신이 통영 한산도 수루에서 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또 다른 한산도가가 있다니. 

여기에서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읊은 한산도가를 살펴보고 보성 열선루에서 읊은 한산도가와 비교하여 보자. 

한산도가(閑山島歌)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閑山島明月夜上戍樓)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撫大刀深愁時) 
어디에선가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何處一聲羌笛更添愁) 

이 두 시조를 비교하여 보면 두 시 모두 제목이 한산도가 閑山島歌이고, 본문도 단 한 글자만 다르고 모두 같다. 즉 통영 한산도 수루는 본문 첫 글자 한이 한가할 한(閑)이고 보성 열선루는 차가운 한(寒)인 점 외에는 한시의 글이 모두 똑 같다. 

그렇다면 이순신이 읊은 한산도가는 어느 것이 진짜일까? 진위를 따지기에 앞서서, 곰곰이 생각하면 이순신이 예전에 한산도에서 읊었던 한산도가를 보성에서는 한가한 마음의 한(閑)자를 차가울 한(寒)자로 바꾸어 읊었을 수도 있다.

이순신이 '난중일기'에 쓴 것처럼, 보성 열선루에서 지낸 추석날 밤에 과음하고도 잠 못 이룰 정도로 마음이 착잡하였다면 차디 찬 마음으로 한산도가를 또 다시 읊었을 만하다. 

그러니 한산도가는 한산도에서 읊었느니, 아니 보성에서 읊었느니 하는 논란을 일으킬 필요가 없다. 통영과 보성 두 군데에서 모두 읊었다고 해석하면 자연스럽게 문제가 풀린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선조는 통제사 이순신의 수군 유지 장계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순신이 알아서 하라고 한 것이다. 선조는 어차피 없어질 수군이라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이 당시 왜군은 부산 본영에만 배가 600척이었다. 반면에 조선수군은 겨우 12척의 배 뿐이었다. 아무리 전쟁의 신 이순신이라도 왜군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자리에서 전라남도나 보성군에 한 가지 건의하고 싶은 것은 보성교회 근처에 열선루에 관한 안내판을 하나 세웠으면 한다. 열선루가 바로 이순신 수군 재건 길의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순신이 보성 열선루에서 추석을 보낸 다음날인 8월16일에 남원성이 함락된다. 조명연합군 4천명이 5만6천명의 왜군에 저항하여 4일 동안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다. 1만 여명의 군관민이 전몰한다.

김세곤 (역사인물기행작가. 한국폴리텍대학 강릉캠퍼스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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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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